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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20화 (219/293)

220화. 진실의 조각들 ― 어떻게 아는 거지 (2)

해가 지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이미 시각은 인시(寅時: 오전 3―5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꽤나 늦은 때였지만 그제야 하루의 일을 끝마친 의선은 자신의 거처로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도 하루 종일 천무진에게 부탁받은 해독약을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한 탓인지 눈꺼풀은 당장에 떨어져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자신의 거처로 들어선 그가 예전과는 다르게 침침한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나이를 먹으니 몸이 예전 같지 않군그래.”

예전에는 며칠 밤을 새워도 끄떡없었거늘 세월이라는 것 앞에는 장사가 없는지 이제는 조금만 무리를 해도 곧장 몸에서 신호를 보내왔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에 막 찻물을 채우는 그때였다.

“혼자만 마시지 말고 나도 한 잔 주게나, 진균.”

기척도 없이 곧바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의선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진균이라는 본명을 듣는 순간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천운백, 바로 그였다.

의선은 슬쩍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고, 그곳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천운백이 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운백을 확인한 의선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계시면 기척이라도 내시지 그러십니까. 방심하고 있다가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습니까.”

“언제나 긴장하고 있어야지 방심하고 있으면 어쩌는가. 하여튼 나도 차나 한 잔 주게.”

손사래를 치며 말하는 천운백의 모습에 결국 의선은 찻잔을 하나 더 꺼내서 그 안에 찻물을 채웠다. 그리고 이내 찻잔을 올려 둔 탁자로 천운백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가 찻잔을 코에 가져다 댄 채로 향을 음미했다.

“흐음, 좋은 향이로군.”

“그런데 대체 언제 오신 겁니까? 연락도 없이 오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의자에 앉으며 의선이 물었다.

그러자 반대편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으며 천운백이 짧게 답했다.

“오늘 오전쯤 온 것 같은데?”

“그런데 지금 오신 겁니까?”

“일이 좀 많았네. 오랜만에 제자 녀석 얼굴도 보고, 마교까지 온 김에 처리해야 할 일들도 있었고.”

“천 공자님을 뵌 겁니까?”

“그러네. 헤어지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완전 어른이 되어 있더라니까. 이제 다 커서 내가 뭘 더 해 줄 필요도 없을 지경이야.”

차를 마시며 슬쩍 웃어 보이는 천운백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의선이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

“천 공자님께는 어디까지 말씀해 주신 겁니까?”

“……아주 조금?”

“아직도요?”

“어쩔 수 없었어. 아직 때가 되지 않았잖은가.”

“그건 그렇지만…….”

뭔가가 신경 쓰인다는 듯 의선이 중얼거렸다.

허나 그 또한 천운백의 생각에 반대하는 건 아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들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 그 둘은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했다.

천운백이 물었다.

“해독약은 어찌 되어 가는가?”

“일전에 연락드렸던 것처럼 꽤나 큰 진척이 있긴 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지금 생각이 맞는다면 조만간 좋은 결과가 나올 거고, 헛짚은 거라면…… 뭐 어쩌겠습니까. 처음부터 다시 해야죠.”

“자네가 고생이 많아.”

“이게 다 누구 때문이죠.”

눈을 흘기며 말하는 의선의 모습에 천운백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허허, 설마 내 이야긴가?”

“그럼 다른 분이겠습니까? 숨어서 잘 살고 있는 제 정보를 일부러 흘려서 천 공자님을 만나게 만드신 분이 지금 눈앞에 계신 천 대협이신걸요.”

“거 너무 원망은 말게. 그래도 좋은 일을 하고 있잖은가.”

“그렇긴 합니다만 뭔가 천 대협의 술수에 놀아난 것 같아 억울한 건 사실이지요.”

“내 나중에 술 한번 사겠네.”

“값싼 화주로 퉁 치시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예끼, 이 사람아. 지금 자네가 하는 일이 얼마나 큰데 겨우 화주로 때우겠는가. 내 이번 일이 끝나면 근사하게 대접하겠네.”

걱정 말라는 듯 호언장담하는 천운백.

그런 그의 말에 의선이 답했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신다니 이번엔 믿어 보지요. 그러니까 천 대협…… 모든 일이 끝나면 술을 사시겠다는 약속 반드시 지키셔야 합니다. 값싼 화주라도 좋으니 꼭입니다.”

처음엔 장난스럽게 시작했던 말. 그렇지만 말이 길어지면서 점점 의선의 말투에서는 장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의선의 모습에 천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지키지.”

“믿겠습니다.”

진지한 얼굴이었던 의선이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렇게 잠시 차를 마시던 도중 퍼뜩 생각난 듯 천운백이 말했다.

“아, 그리고 여기에 내가 머물 곳 좀 만들어 주게.”

“여기서 지내실 생각입니까?”

“허허, 그럼 지기인 자네가 여기에 있는데 내가 어디서 지내겠는가.”

“공짜라서 그러시는 건 아니고요?”

“거참 내 제자 녀석도 그러더니만 자네까지 참 매정하기 그지없군그래.”

의선은 못 말리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이내 의선이 진지하게 물었다.

“정체는 감추실 생각이시지요?”

“그래야지. 내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정체가 드러나시지 않게끔 거처를 마련해 보도록 하지요.”

“부탁하지.”

“여기가 제 거처가 아닌 마의의 것인지라 그에게 가서 청을 해야겠군요. 지금 가서 잠을 깨우면 난리를 피우긴 하겠지만…… 그래도 가서 천 대협의 거처를 마련해서 오지요.”

말을 끝낸 의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내 잠시 쉬고 있으라는 말만 남긴 채로 훌쩍 자신의 방을 빠져나갔다.

의선이 사라지자 방 내부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혼자 남은 천운백은 차를 홀짝였다.

그러던 그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술이라…….”

찻잔을 어루만지던 천운백이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도 자네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다면 좋겠군그래.”

혼잣말을 내뱉고 있던 천운백의 시선이 찻잔을 만지는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그가 찻잔에서 손을 떼고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단단해 보이는 자신의 주먹.

그 주먹을 바라보던 천운백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가 언제까지 도움이 되려나.”

* * *

마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적멱산(荻冪山).

그곳엔 오래전부터 흑록채(黑祿寨)라는 녹림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실 흑록채는 말이 녹림도지, 실상은 마교 휘하에 있는 하나의 소규모 단체에 가까웠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이곳 적멱산의 왕인 듯 굴었지만, 사실 마교와 워낙 가까이 있는 지리적 특징 탓에 제대로 기를 피고 살 수가 없었다.

오히려 녹림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된 돈벌이가 마교에서 시키는 물건을 적멱산 너머로 옮겨 주는 것이었으니, 굳이 자세한 상황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흑록채의 채주 상충(桑忠)은 오래전에 마교에 잠시 몸담았던 무인이었다.

나름의 재능은 있어 일류 수준의 무인은 될 수 있었지만, 성격에 다소 문제가 있어서 자잘한 문제들을 일으켰고, 결국 이렇게 쫓겨나다시피 나와 이곳 흑록채의 채주 짓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흑록채는 상충을 필두로 하여 어중이떠중이 수준인 마교의 무인들과, 애초에 이곳에 있던 녹림도들이 모여 구성되어 있었다.

마교와 가까이 위치한 탓에 인근 마을에서 자릿세를 걷는 것조차 함부로 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들은 머릿수가 제법 됐다.

오십 명이 넘는 규모의 그들은 마교의 잡일을 해 주거나, 다소 먼 곳에서부터 오는 이들의 통행세를 받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나마 마교의 일을 도와주고 받는 돈이 적지 않았지만…….

사실 근근이 입에 풀칠이나 하는 수준이지 큰돈을 벌기는 어려웠다. 그 때문에 내심 불만이긴 했지만, 어차피 마교로 돌아갈 수 없는 지금 상충의 입장에서는 이곳의 왕 노릇을 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었다.

“드르렁! 커억!”

숨이 넘어갈 정도로 커다란 코 고는 소리를 토해 내고 있는 건 바로 흑록채의 채주 상충이었다. 아직 해가 지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별다른 일이 없었기에 대부분의 흑록채 녹림도들 또한 각자의 거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평화로워 보이는 흑록채의 입구로 한 명의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스윽, 슥.

긴 장포를 두르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큰 키와 덩치를 보고 추측건대 사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흑록채의 입구는 단 한 명의 녹림도가 지키고 서 있었는데, 항상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탓인지 그 또한 거의 졸다시피 그곳의 자리만 채우고 있던 상황이었다.

순식간에 흑록채의 입구로 다가온 장포의 사내가 졸고 있는 녹림도의 앞에 이르러 멈춰 섰다.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누군가가 있는지도 모른 채로 졸고 있었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녹림도의 실력이 모자란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지금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장포 사내가 뛰어난 무인인 이유가 더 컸다.

장포를 입고 있는 사내의 정체는 바로 십천야의 일원인 매유검이었다.

어르신이라는 존재의 명령을 받고 뭔가 계획을 실행시키기 위해 움직였던 그가 마침내 마교와 가까운 이곳까지 도착한 것이다.

매유검이 졸고 있는 상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일어나.”

“……으음?”

목소리를 들은 녹림도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힘겹게 눈을 치켜떴다. 정신을 차린 그는 순간 누군가가 앞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움찔했다. 그는 이내 눈앞의 상대가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정체불명 괴한의 등장.

일반적으로 다른 산채였다면 당장에 눈을 부라리며 상대를 겁박했겠지만, 이곳 흑록채는 달랐다.

마교와 가까웠던 탓에 종종 그곳에서 일을 맡기기 위한 사람이 찾아왔다. 한마디로 마교의 인물일 확률이 높다는 소리였다.

그랬기에 졸고 있던 사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뉘시오?”

“여기가 흑록채 맞지?”

“그렇긴 한데…… 마교에서 오셨소?”

사내의 질문은 들은 척도 않고 매유검이 말했다.

“모두 모이라고 해.”

그 말을 끝으로 매유검은 사내를 지나쳐 흑록채의 중앙 광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행동하는 매유검의 행동에 사내는 순간 울컥하긴 했지만 이내 화를 눌렀다.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곳 흑록채에 와서 이토록 뻔뻔하게 구는 건 마교의 인물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여겨서다.

거기다가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평상시 보아 오던 마교의 무인들과는 달랐다.

묘하게 섬뜩한 느낌.

매유검을 마교의 중요한 인물이라 판단한 사내는 결국 그가 시킨 대로 흑록채 곳곳을 뛰어다니며 사람들 모두 중앙 광장으로 모이라는 말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 말을 전달받은 이들 중에는 이곳의 채주인 상충도 있었다.

상충은 갑작스럽게 자신을 깨우는 수하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살이 쪄서 비대한 배를 긁어 대며 그가 물었다.

“뭐야? 벌써 저녁 시간이야?”

“그게 아니라 마교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마교에서?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상충은 마교라는 소리에 결국 눈을 비비며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 또한 다른 이들이 모두 모여 있는 광장 쪽으로 향했다.

광장에 도착한 상충이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아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뭔가 일을 맡길 생각이라면 자신을 찾아와 이야기를 하면 될 일이다. 이렇게 광장에 흑록채의 녹림도들을 모조리 불러 모으는 일은 여태껏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상충은 불만이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마교의 일을 맡아서 하는 산채라고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연락도 없이 찾아와, 우두머리에게 일언반구 말도 없이 모두를 광장으로 불러 모으는 행동은 이곳의 수장인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 행위라 여겼기 때문이다.

광장에 도착한 상충은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이내 외부에서 온 상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장포를 눌러쓴 채로 광장 한편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에 기대듯 앉아 있는 사내. 그를 확인한 상충은 이내 이곳으로 모이라고 전달한 수하를 찾아 물었다.

“다른 자들은 어디에 있고 저자 혼자야?”

“처음부터 혼자던데요?”

“그래? 이상한데.”

딱히 옮겨야 할 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안면이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잠시 상대를 바라보던 상충이 결국 마음의 결단을 내렸는지 그를 향해 성큼 다가갔다.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매유검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움직임을 눈치채고는 가볍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장포 사이에 있는 눈동자가 빠르게 상충을 훑고 지나갔다.

매유검의 지척까지 다가선 상충이 헛기침을 토해 냈다.

“흠흠.”

그런 그를 향해 매유검이 입을 열었다.

“네가 이쪽 수장이냐?”

너무도 자연스러운 하대에 상충은 움찔했다.

듣기에 목소리는 어려 보였고, 정체도 알 수 없다. 그런 자가 하대를 내뱉으니 울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이곳이 마교와 가깝지만 않았다면 단번에 공격적으로 나섰겠지만…….

애써 화를 누르며 상충이 답했다.

“그렇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요?”

“그건 알 거 없고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

“그게 무슨 소리요. 적어도 신분은 밝히고 우리가 뭘 도와야 할지 말해야 알 거 아니오.”

상충의 목소리가 다소 커졌다.

그리고 장포를 쓰고 있는 매유검은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원래는 같은 말 두 번 안 해. 하지만 처음이니 마지막으로 예외로 치지. 그러니 똑똑히 들어. 이곳 흑록채의 모두는 지금 시간부로 내 명령대로 움직인다.”

“아니, 그러니까 당신이 누군데…….”

말을 하던 상충은 문득 뭔가가 이상했다.

‘……어라?’

왤까?

갑자기 수하들이 자신을 놀랜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그리고 왜 세상이 갑자기 거꾸로 보이는 걸까.

그리고 그것이 상충이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툭.

손의 움직임조차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깔끔하게 상충의 목이 잘려져 나간 것이다. 목이 잘린 본인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빠르고 깔끔한 솜씨였다.

그 때문에 상충은 자신의 목이 뒤로 떨어져 내리면서도 스스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푸슈슈슉!

떨어져 나간 목.

동시에 하늘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 피는 매유검이 뒤집어쓰고 있는 장포를 적셨다. 그리고 피를 뒤집어쓴 그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자꾸 같은 말 하게 하지 말라니까 짜증 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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