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대결 ― 너다 (2)
단엽의 말에 한천은 일순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자신과 싸워 보고 싶다는 그 한마디.
평소였다면 웃으며 넘겼을 그다. 그렇지만 지금 마주하고 있는 단엽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열의가 전해져서인지 한천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단엽의 시선에 한천이 결국 픽 웃었다.
‘……하여튼 대단하다니까.’
강한 사람과 싸우고 싶어 하는 저 순수한 열의는 정말이지 감탄을 금하기 어려울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다.
잔을 비워 낸 한천이 슬쩍 옆에 놓여 있는 술병을 손에 들었다. 때마침 술은 다 떨어졌고, 시간도 제법 흐른 상황.
한천이 빈 술병을 흔들며 말했다.
“부담스러우니까 그런 눈빛은 좀 치우자고. 그보다 아직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안 한 거 같은데. 언제쯤 대홍련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삼 일 후? 그쯤 생각하고 있어.”
“……뭐야 정말 며칠 안 남았네.”
떠날 날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가깝다는 사실을 안 한천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삼일이라니, 생각보다 훨씬 짧았다.
한천이 말했다.
“그럼 슬슬 다른 사람들한테도 말해야 하지 않겠어? 전에 잠깐 말했을 때도 천 공자님이 네가 떠난다는 사실에 꽤나 아쉬워했었잖아.”
“……그래야지. 그런데 이런 말 하는 어색한 분위기가 너무 싫어서 말이야. 가능하면 떠나기 전날 하고 싶은데.”
“인마. 그건 네 생각이고. 보내는 사람도 좀 생각해야 할 거 아니냐. 이번에 떠나면 꽤나 오래 못 볼 텐데 갑자기 떠나보내면 어떻겠어. 거기다가 천 공자님이 그리는 계획이 있을 텐데, 그렇게 급작스럽게 떠난다고 하면 앞으로의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고 말이야.”
“하아, 그것도 그렇긴 한데…….”
말을 흐리면서 이걸 어쩌나 하는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단엽의 모습에 한천이 답했다.
“말하기 어색하고, 그런 분위기를 피하고 싶은 거면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마친 한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스스로의 가슴을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형님이 알아서 해 줄 테니까. 넌 그냥 와서 옆에 있기만 하면 돼.”
“형님은 무슨.”
말과 함께 픽 웃은 단엽이지만 이내 그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대로 천무진은 십천야라는 존재와 싸우고 있다.
그리고 백아린과 함께 여러 가지 계획들을 준비해 두고, 또 그걸 성공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되어야 할 자신이 이곳을 떠나게 됐다.
비록 며칠이라 할지라도 먼저 보고를 해야 천무진이 계획을 수정하는 데 도움이 될 터.
단엽이 다짐을 받으려는 듯 말했다.
“말했다? 난 어색하고 막 그런 분위기 절대 못 견딘다고.”
“걱정도 팔자라니까. 나만 믿으라고.”
말과 함께 한천이 단엽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러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단엽을 향해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 가자고.”
꽤나 오랫동안 기루에서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은 곧장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갔다. 시간은 이미 많이 늦어서 모두가 잠들어 있어도 이상할 것 없었던 상황.
입구에 들어서며 단엽이 입을 열었다.
“오면서 생각해 봤는데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우선 자고 내일 일어나서…….”
“에이, 그게 무슨 소리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미적거리다가는 더 말하기 어려워져. 거기다가 우리 대장이나 천 공자님이나 얼마나 지독한 사람들인데. 이 시간이면 아직 안 자고 있을걸.”
호언장담을 한 한천은 단엽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는 곧장 백아린이 기거하는 건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입 근처로 양손을 동그랗게 말더니 이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대장!”
버럭 내지른 소리에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던 단엽은 귀청이 떨어진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귀가 먹먹했다.
생각지도 못한 한천의 행동에 단엽은 손으로 이마를 감싸 안았다.
이런 사내를 믿고 움직였다는 사실에 후회가 밀려오는 찰나, 그 큰 목소리에 반응한 백아린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근처의 건물에 자리하고 있는 천무진 또한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 다가온 백아린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 밤에 웬 소란이야?”
“왜는요. 급히 말씀드릴 게 있어서 왔지요.”
“급히 할 말?”
백아린이 되물을 때였다.
뒤편에서 다가오던 천무진 또한 어느덧 근처에 도착해 일행에 합류했다.
그러자 한천이 기다렸다는 듯 옆에 있는 단엽을 가리키며 말했다.
“단엽이 두 분에게 할 말이 있답니다.”
말과 함께 한천이 성큼 한 걸음 옆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단엽에게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옆에 있기만 하라던 한천의 호언장담을 믿고 미리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던 단엽이다.
그런데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자 판만 깔아 놓고 재빠르게 빠져 버리는 그의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단엽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색한 분위기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이제 와서 아무런 일도 아니라고 하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였다.
결정을 내린 그가 입을 열었다.
“나 삼 일 후쯤 떠날 생각이야. 대홍련의 련주가 되어야 하니까.”
단엽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천무진과 백아린은 순간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단엽이 떠난다는 것은 그리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개인적인 일이 아닌 대홍련이 얽힌 일이다.
결국 때가 되면 떠날 거라는 걸 알았고, 그랬기에 천무진은 그때가 되면 언제든 단엽을 보내 줘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그리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잠시 침묵하던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정했군.”
“미안. 주인 옆을 지키기로 약속했는데 이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서.”
사과를 하는 단엽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누군가에게 쉽게 사과를 하는 사내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천무진은 지금 그가 얼마나 자신에게 미안해하는지를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때문에 천무진은 속내를 감춘 채로 작게 웃음을 흘렸다.
“미안하긴.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 나한테 그럴 필요는 없어. 난 괜찮으니 맘 편히 가.”
편안하게 그가 떠날 수 있도록.
천무진은 최대한 단엽이 떠나는 길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답했다.
허나 그런 천무진의 배려에 오히려 단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찌 모를까.
지금 천무진에게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그런데도 불구하고 천무진의 대답은 자신을 위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이런 대답을 한 게다.
그래야 자기가 편하게 갈 수 있을 테니까.
천무진의 그 마음이 느껴졌기에, 단엽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 한편부터 점점 무언가 채워져 오는 이 느낌.
이들을 만나고 나서 단엽은 동료라는 게 뭔지 알게 됐다. 그리고 지기라는 것이 뭔지도 알았다.
좋은 이들, 그리고 재미있는 사람들.
닭살 돋는 분위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단엽이다.
그런 그가 입을 열어 자신의 진심을 내보였다.
“……고마워, 주인.”
말을 내뱉는 단엽의 어깨 위로 천무진이 손을 올렸다. 가볍게 어깨를 두드린 그가 이윽고 말했다.
“그간 날 위해 싸워 줘서 고맙다. 단엽.”
“…….”
마찬가지로 진심을 내보이며 인사를 건네는 천무진의 모습에 단엽이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그때였다.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한천이 재빠르게 끼어들며 말했다.
“천 공자님, 여기서 제가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을 해도 되냐는 한천의 말에 천무진이 물었다.
“지금 부탁을 할 사람은 부총관이 아니라 단엽이어야 되는 거 아닌가?”
“정확히는 단엽을 위해 제가 부탁을 하는 거라서요.”
히죽 웃으며 대꾸하는 한천의 모습에 오히려 옆에 있던 단엽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물었다.
“날 위한 부탁이라니?”
특별히 한천에게 뭘 말해 달라 부탁했던 건 없었다. 오히려 판만 벌려 놓고 빠져 버려서 단엽 스스로 말을 꺼내 놓은 이런 상황에 자신을 위한 부탁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어 오는 단엽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천은 천무진에게 말을 이었다.
“연무장 하나가 필요합니다.”
부탁이 뭔가 하고 있던 천무진은 너무도 간단한 부탁에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연무장은 이곳 귀림원에도 몇 개나 있잖아.”
“아뇨, 그런 곳 말고요.”
귀빈을 모시는 이곳 귀림원에도 손님들을 위한 몇 개의 연무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사실을 한천이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부탁을 하는 건 한천이 원하는 연무장이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천이 말을 이었다.
“저와 단엽이 죽도록 싸워서 전부 박살이 난다고 해도 전혀 상관없는 그런 연무장이 필요해서요. 큰 소란이 일어도 사람들이 오가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예상치 못한 한천의 말에 그를 제외한 세 사람 모두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너 설마…….”
단엽이 중얼거리며 한천을 바라봤다.
그와 싸워 보고 싶다고 한 자신의 말이 떠올라서다.
분명 그건 진지하게 한 이야기였지만 그런 자신의 말에 한천이 이런 식으로 반응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한천은 자신처럼 싸움을 즐기는 사내가 아니었으니까.
모두가 당황하고 있던 그때 정신을 차린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네, 적당히 취기도 올랐겠다 자고 일어나면 또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서요.”
한천은 재차 자신의 생각을 밝혔고 그런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천무진이 말했다.
“여기서 북쪽에 있는 연무장은 아무 때나 써도 좋다는 승낙을 받아 둔 상태야. 거기라면 원하는 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줄 것 같은데.”
“그럼 그곳으로 가죠.”
한천의 말에 천무진은 알겠다는 듯 몸을 돌려 일행들을 그 연무장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천무진이 말한 연무장은 귀림원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랬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는 내내 단엽은 말이 없었다. 거리가 가까워 떠들 시간이 많지 않기도 했지만, 갑작스레 한천의 제안을 받은 직후부터 단엽은 급속도로 말이 사라진 상태였다.
허나 그의 얼굴엔 감추기 어려울 정도의 흥분이 느껴졌다.
그토록 싸워 보고 싶었던 상대인 한천.
그가 자신과의 대결을 받아들여 주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지금 단엽의 심장은 터질 듯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연무장에 들어서기 무섭게 단엽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함께 도착한 한천이 먼저 연무장 위로 올라서려 할 때였다.
서둘러 다가온 백아린이 연무장에 올라서려는 그의 옷소매를 잡아챘다.
그녀를 향해 한천이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부총관.”
“네, 대장.”
“진짜 싸울 생각이야?”
“그럼요. 저랑 싸우고 싶다 했거든요. 그것도 아주 진심을 담아서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꾸하는 한천을 보며 백아린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부러 걸어오는 싸움조차도 능글맞게 넘어가던 한천이 아니던가.
그러던 그가 오히려 스스로 먼저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 그랬기에 백아린은 놀랐고,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한천의 숨겨진 과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남이 하자는 대로 해 줬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웃음을 터트린 한천이 가볍게 목을 풀었다.
어느덧 반대편 쪽에 모습을 드러낸 단엽이 연무장 위로 천천히 올라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한천의 눈동자 또한 조용히 빛나기 시작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둘 사이에 흐르는 그 묘한 분위기를 느낀 백아린이 아직까지 미련이 남은 듯 한천을 말렸다.
“굳이 싸워야겠어? 오히려 이번은 마음만 먹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이 싸움을 피할 수 있는 상황이잖아.”
“……대장 말씀이 맞습니다. 피할 수 있는 싸움이었죠. 그리고 평소의 저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테고요. 하지만 이번엔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장.”
말과 함께 한천은 백아린의 손에 잡혀 있던 소매를 슬그머니 빼냈다.
그러고는 연무장 위에 자리한 채로 자신을 기다리는 단엽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저 싸워 보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만이 가득한 저 눈빛을 보고 있노라니 예전 생각이 나서요. 그리고 그때의 전……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었죠.”
말을 하는 한천의 눈동자는 백아린이 아닌 단엽에게 틀어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만류가 전혀 통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결국 체념한 듯 백아린이 짧게 말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와.”
“네, 대장.”
말을 끝낸 한천이 슬쩍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그의 몸이 연무장 위로 올라섰다.
연무장에 올라선 한천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단엽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오래 기다렸냐?”
그런 그의 말에 단엽 또한 웃으며 답했다.
“목 빠지는 줄 알았다.”
어느덧 절친한 지기가 되어 버린 두 사람.
허나 지금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연무장 위에서 마주한 지금, 두 사람은 그저 무인 대 무인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무인으로 단엽과 마주한 그 순간부터…… 한천의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