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진정한 목적 ― 처음부터 원하는 건 하나였다 (1)
한쪽 무릎으로 힘겹게 몸을 지탱하고 있던 천무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머리와 가슴에 치미는 극심한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그는 어느덧 사라진 상태였다.
냉혹하게 변한 눈빛을 한 천무진이 말했다.
“죽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살아 있을 줄은 몰랐군.”
“큭큭, 뭐 운이 좋았지. 네 덕분에 꽤 긴 시간을 지옥 속에서 살았지만 그래도 살아는 있으니 좋네. 이렇게…… 너도 다시 만나고.”
말로는 좋다 하고 있지만, 듣는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매유검의 말투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그날 어르신에게 천무진이 선택받게 되면서 매유검의 인생은 완전히 변해 버렸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끔찍했던 시간.
당연히 천무진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을 리 만무했다. 그 긴 시간을 보내게 된 원흉이 천무진이라 생각했으니까.
그 지옥 속에서 살며 수도 없이 천무진을 생각했었다. 고통스러운 순간순간마다 그를 떠올렸기에 매유검은 버틸 수 있었다.
반드시 살아서 만나고야 말리라.
그리고 언젠가…… 그 심장에 검을 꽂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 지옥에서 나와 십천야 중 일인이 된 매유검은 알게 됐다.
천무진은 자신이 어찌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적어도…… 한동안은.
매유검이 솟구치는 살의를 억지로 내리누르는 그때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이 진법은 언제 치울 생각이야?”
아직까지도 자신을 진법 안에 가둬 둔 것이 맘에 안 든다는 듯 천무진이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매유검이 옆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그의 손가락 끝에 모였던 내력이 진법 안의 한 공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파아앙!
거센 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훅하고 바람이 밀려 나갔다. 그러자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환영들이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진법이 깨어져 나간 공간 위로 천무진과 매유검이 마주 섰다.
천무진은 손으로 슬쩍 미간을 눌렀다.
매유검이 준비해 둔 것들로 인해 머릿속에 억지로 잠겨져 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풀려나왔다. 너무도 많은 기억이 한 번에 밀려 들어온 탓에 순간적으로 두통이 찾아왔다.
기억과 기억이 뒤엉키며, 그것이 하나로 되어 가는 과정.
그때 매유검이 말했다.
“십삼 호, 아니 이제 천무진이라고 불러야 하나?”
“……천무진이라 불러. 네 입에서 그 번호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지 뭐. 아, 나도 그때와는 다르게 이름이 하나 생겼거든. 매유검이라고 불리니 그렇게 알아 둬.”
천무진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매유검을 슬쩍 바라봤다. 아직까지 장포를 눌러쓰고 얼굴을 감춘 채로 있는 그다.
과거의 삶에서 자신을 죽였던 그자가 누구일지 천무진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이 알던 바로 그 칠 호였다니…….
천무진은 십천야로 키워진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의 입장에서 천무진은 같은 편이었다는 거다. 하지만 천무진은 자신이 그들의 손에 죽은 것에 대해서 아무런 의문도 가지지 않았다.
기억을 되돌리며 덩달아 그 일에 얽힌 진실이 떠오른 탓이다.
애초부터 천무진의 저번 삶은 이번 인생을 위한 초석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몇 가지 남아 있는 건 사실이었다. 죽는 건 원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외에 몇몇 부분이 천무진이 알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랬기에 알아야 했다.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르게 흘러간 일들에 대한 진실을.
천무진이 물었다.
“왜 벌써 내 기억을 되돌린 거지? 아직 어르신이 원하는 걸 손에 넣지 못했는데.”
“그만큼 네가 위협적이었다는 소리지. 이대로 널 놔뒀다가는 아예 원하시는 걸 얻지 못하게 될 거라는 확신을 하신 모양이더군.”
매유검의 말에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은 어느 정도 천무진이 날뛰는 것을 그대로 놔뒀었다. 그로 인해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온다 해도 미래에 자신이 얻고자 하는 그 무언가를 위해서라면 눈감아 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천무진은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천무진과 그의 동료들은 십천야를 아예 박살을 내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결국 어르신은 계획을 바꾸면서까지 그의 기억을 되돌리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천무진과 그의 일행들을 막아 낼 수 없다 생각했기에.
천무진이 말했다.
“어르신을 한번 뵙고 싶다.”
“전달하도록 하지. 네 연락을 목 놓아 기다리고 있으시니 꽤 좋아하실 거다.”
말투에 왠지 모를 가시가 담겨 있음을 눈치챘지만 천무진은 그에 신경 쓰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그럼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뭐지?”
“변한 건 없을 거다. 넌 지금의 위치에서 어르신이 원하는 걸 얻어 오면 그만이니까. 다만 예전처럼 십천야를 박살 내는 건 피해야겠지.”
“……이곳에서 그대로?”
“그럼 뭐가 바뀔 거라 생각한 거야? 어차피 네가 해야 할 일은 하나잖아. 그걸 위해선 넌 여기 있어야 하고.”
매유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애초에 천무진이 어릴 때부터 선택받고 십천야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로 키워진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다.
바로 천운백의 제자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그 계획이 성공했고, 모든 것이 끝을 향해 가는 이 순간 천무진이 돌아갈 순 없었다. 이곳에 있어야만 그 일을 매듭지을 수 있었으니까.
분명 매유검의 말대로 하는 것이 맞았지만…….
천무진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 냈고, 그로 인해 천무진의 내부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똑같은 사람, 하지만…… 과연 지금의 자신이 매유검을 만나기 전의 그와 같은 사람일까?
아니, 자신은 그때의 천무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전 모습으로 함께 지내던 사람들에게 돌아가 그들 곁에 있게 된다는 것, 그 점이 못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천무진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그때였다.
매유검이 손으로 가볍게 턱을 쓸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이라도 한잔했다면 좋았을 텐데, 장소가 이래서야, 원.”
아쉽다는 듯 말하는 매유검을 향해 천무진이 비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몇 번을 죽었다가 살아나도 너랑 오붓하게 술을 마실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거든.”
“뭐야. 아직도 예전 일로 꽁해 있는 거야? 그땐 다 그래야 했잖아. 슬슬 이해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이해는 무슨.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구역질 나는 놈이야.”
처음으로 가족처럼 느꼈던 이였다.
그랬기에 매유검이 배신했을 때 느꼈던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나 어린 나이에 당한 일이었기에 그 충격이 더욱 강하게 뇌리에 박힌 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향해 계속 적의를 드러내는 천무진의 모습에 매유검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그가 말했다.
“후후, 그래. 그럼 그 잘난 네 동료들과 얼마 안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라고. 뭐 그들도 네 정체를 알게 되면 지금 날 보는 너 같은 표정을 짓겠지만.”
“…….”
매유검의 조롱 섞인 한마디.
당연히 받아치려고 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천무진은 일순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그의 말처럼 선한 사람의 흉내를 내며 자신을 속였던 매유검과, 지금의 본인이 뭐가 다르단 말인가.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
하지만 그건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자신은 그들을 이용했고, 결국은 그들의 뒤통수를 치는 꼴이 될 테니 말이다.
매유검이 천천히 천무진을 향해 다가왔다.
그렇게 천무진의 옆에 선 매유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만간 또 연락 줄게. 네 그 잘난 동료들도 좀 적당히 날뛰게 하고. 계속 그렇게 설치고 다니면…… 그냥 놔두기 어려워지잖아.”
충고인지 경고인지 모를 그 말과 함께 매유검은 손을 들어 올렸다. 말을 하며 어깨를 두드리려던 그였지만 순간 자신을 노려보는 천무진의 눈빛에 자연스레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알겠다고. 그러니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말지그래.”
“친한 척하지 말고 이제 그만 내 눈앞에서 꺼져 줬으면 좋겠는데.”
“얼마든지.”
말과 함께 매유검은 천무진을 스쳐 지나갔다.
어차피 한자리에 있기 힘든 건 매유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장포 속으로 집어넣은 손을 꿈틀거렸다.
당장이라도 손을 휘두르고 싶은 걸 참느라 온몸에 경련이 날 지경이다.
지금은 이렇게 물러나야만 하지만…….
‘천무진, 언젠가 넌 내 손에 죽는다.’
다짐과 함께 사라지는 매유검의 장포가 펄럭였다. 그렇게 매유검이 사라지고 대략 반 각 가까운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천무진은 그때까지도 그곳에 가만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위로 젖혔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새파란 하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천무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꾸욱.
참으로 우스웠다.
기억하지 못하던 과거를 알게 되었고, 이제야 조금 더 진실에 가까워졌는데……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천무진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싸워 온 이들.
그들 때문이다.
그들을 배신해야만 했으니까.
분명 이 모든 건 천무진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무진은 해야만 했다.
그것이…… 천무진의 운명이었으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눈을 감은 채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있던 천무진에게서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
그의 처절한 고함이 메아리쳤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수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처럼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 * *
늦은 시각.
의선이 움직이고 있었다.
야음을 틈타 비밀리에 움직이던 그가 도착한 곳은 거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였다. 숲길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거처는 한적하면서도, 운치가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의선이 찾은 상대.
그는 바로 천운백이었다.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천운백은 늦은 시간 자신을 찾아온 의선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 이 시간에 어쩐 일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는 천운백을 향해 의선이 슬쩍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
“제가 별로 안 반가우신가 봅니다?”
“허허, 그럴 리가 있겠는가. 바쁜 친구가 갑자기 찾아오니 놀라서 그렇지.”
“잘 아시는군요. 그럼 바쁜 제가 왜 이리 허겁지겁 천 대협을 찾아왔겠습니까?”
의선의 그 말에 천운백의 눈동자가 빛났다.
현재 천운백의 위치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오직 한 명 의선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렇게 숨은 채로 천무진은 의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운백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자네 설마…… 성공한 것인가?”
그 질문에 의선이 기다렸다는 듯 품 안에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하나 꺼내어 흔들었다. 그러고는 이내 씩 웃으며 답했다.
“이 안에 뭐가 있는지 보시겠습니까?”
그 한마디에 천운백은 한달음에 의선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고생했네. 고생했어. 내 자네가 이렇게 해낼 줄 알았어.”
말을 내뱉는 천운백의 얼굴엔 기쁨의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마찬가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던 의선이 이내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대협, 어깨 부러지겠습니다.”
“아, 내 정신 보게. 미안하네, 너무 기뻐서. 허허.”
감정이 너무나 격해져 자신도 모르게 의선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던 천운백이다.
아프다며 죽는소리를 해 댄 의선이었지만, 그 또한 기쁜 건 매한가지였다.
의선이 주머니 안에 넣어서 가지고 온 물건.
그건 바로 천무진이 의뢰했던 흑주염의 해독약이었다. 꽤 긴 시간 이곳 마교로 와서 마의와 함께 흑주염의 해독약을 만드는 데 열중했던 의선이다.
최근 점점 성과를 보이는 듯싶더니 결국엔 이처럼 흑주염의 해독약을 완성한 것이다.
사람을 조종하는 가루인 흑주염.
그 가루를 통해 십천야는 세력을 넓혀 왔다.
하지만 이제 흑주염의 해독약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
주머니를 든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의선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스스로 큰일을 해냈다는 성취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흑주염에 조종당하는 이들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의선은 그 무엇보다 환자의 치료를 중요하게 여기는 진정한 의원이었으니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의선을 향해 천운백이 말했다.
“자네 덕분에 많은 이들이 십천야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네. 정말 훌륭한 일을 해낸 게야.”
“뭐 당연히 저나 마의의 역할도 컸지만…… 그래도 이 일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역시나 천 대협의 제자분 덕분이지요.”
천무진이 가져온 흑주염의 가루.
그것이 없었다면 제아무리 의선과 마의가 힘을 합쳤다 한들 해독약을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천무진이 언급되자 천운백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에 녀석이 참 큰일을 해냈지.”
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천운백을 향해 의선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 해독약에 대해 대협의 제자분께 알려도 되겠습니까?”
의선의 의미심장한 질문.
그 질문을 들은 천운백이 의선의 손에 들린 주머니를 전해 받고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함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