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연인 ―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서 (2)
천무진은 죽을 맛이었다.
“헉헉.”
자리에 벌렁 드러누운 그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천룡비공의 절초인 천추나락을 익히기 위해 천무진은 매일같이 이곳을 찾았다.
천추나락.
단 한 번 눈으로 보았을 뿐이지만 그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천운백을 통해 내공의 흐름에 대해 전해 들었고, 그 이후부터는 오롯이 천무진 혼자 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수십여 번의 시도를 했지만, 결과는 계속해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 탓에 소모된 막대한 양의 내공과 지친 육신을 버티지 못한 천무진이 잠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닥에 누워 있는 천무진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
거기에는 천운백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커다란 천을 이용해 누울 장소를 만든 그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였다. 편안한 자세로 누운 그는 손에 들린 과일을 먹으며 쓰러져 있는 천무진을 향해 혀를 내둘렀다.
“쯧쯧, 벌써 지친 게냐?”
자신을 향해 놀리듯 말하는 천운백의 모습에 쓰러져 있던 천무진이 슬쩍 상체를 일으킨 채로 퉁명스레 말했다.
“지금 제자는 이렇게 죽어 가는데 그게 입에 들어가십니까?”
“왜, 이놈아. 옛날 생각도 나고 좋은데. 요새 영 재미없지 않았느냐. 더 가르칠 것도 없어서 널 괴롭힐 일도 없었고.”
“……성격이 너무 이상하신 거 아닙니까?”
“이상하긴! 이상한 건 지금 네 녀석의 모양새다. 시간이 얼마가 지났는데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냐. 그거 알고 있느냐? 오늘이 벌써 열흘째다. 난 말이다, 나의 스승님이 천추나락을 보여 주고 열흘 만에 흉내를 내는 정도에 성공했었다. 그런데 지금 네 녀석은 뭐냐?”
천운백의 그 말에 오기가 생겼는지 천무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이내 퉁명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앞질러 보일 테니 기다리시죠.”
악에 받친 듯 다시금 천인혼을 들어 올리는 천무진의 모습을 보며 천운백은 남몰래 미소를 흘렸다.
이런 광경은 참으로 오랜만이었으니까.
천무진에게 한창 무공을 가르쳐 주던 때와는 달리 최근 들어서는 그에게 특별한 무엇인가를 전수할 일이 없었다. 이미 대다수의 것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종종 옛날의 이런 순간을 그리워하곤 했었는데…….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운 천무진의 몸 주변으로 조금씩 내공의 흐름이 요동쳤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림 없이 강인했다.
천무진은 끌어올린 기운을 천인혼에 담았다.
천운백에게 들은 것처럼 내공을 움직였고, 동시에 몸 안에 있는 힘을 폭발시켰다.
하지만…….
“큭!”
비틀거리던 천무진이 천인혼을 땅에 박아 넣으며 힘겹게 몸을 지탱했다. 터져 나가야 할 힘이 제 방향을 찾지 못하며 오히려 몸 안에 큰 충격을 가져다줬다.
“우웩.”
입을 통해 피가 터져 나왔고, 천무진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 냈다.
속이 진탕이 되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천무진의 눈동자에 맺힌 독기는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시간이…… 얼마 없어.’
천무진에게는 그리 긴 여유가 없었다.
어르신이 자신의 기억을 되돌렸고, 곧 연락이 올 것이다. 그러면 천무진은 십천야로서 자신의 임무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것은 곧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소리였고, 천무진은 그렇게 되기 전에 천운백에게 천룡비공을 완성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허리를 곧추세운 천무진이 다시금 천인혼을 들어 올렸다.
‘다시 간다.’
이렇게 머뭇거릴 틈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몇 차례 더 실패를 거듭한 천무진이 비틀거리다 힘겹게 몸의 균형을 잡았다.
손과 다리가 미친 듯 떨렸고, 검을 쥘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천무진은 자세를 잡았다.
이제 그만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천운백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큰 실례가 될 거라 느껴질 정도로 천무진은 진지했으니까.
천무진이 쥐고 있던 천인혼을 비스듬히 움직였다.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내공의 흐름만으로 가득했다.
‘기의 시작은 충문혈(衝門穴)에서부터. 이후 천추, 황유 기문을 따라…….’
천룡무극심법을 통해 닦아 놓은 혈도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내공이 흘러내렸다. 최대한 빠르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 부드러우며 강렬하게.
수많은 조건들이 하나가 되어 가며 천무진의 몸 주위로 미지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기운이 점점 하나의 형상이 되며 천무진에게 밀려드는 그때였다.
여전히 자리에 누워 천무진의 상황을 모르는 척 곁눈질하고 있던 천운백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토해 냈다.
“흐음.”
다르다.
여태까지와 비슷하면서도 본질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순간 천인혼이 움직였다.
파앙!
하지만 그 힘은 앞으로 쏟아져 나오지 못했고, 오히려 반탄력으로 인해 검을 휘두른 천무진의 몸이 뒤편으로 밀려 나가며 바닥에 처박혔다.
“컥컥!”
그가 거친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명백한 실패.
그런데…….
벌떡!
나무 사이에 연결해 놓은 간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선 천운백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은 열흘 만에 흉내를 내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건 농담이었다.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닌 천룡성의 절초다.
그리 쉽게 그 안에 담긴 묘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그저 그런 식으로 천무진을 도발한다면 그가 더욱 열의를 낼 거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리 말한 것뿐이다.
그런데 천무진은 자신의 그 농담을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천운백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괴물 같은 녀석.”
분명 이건 시작에 불과했고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었다.
하지만 다시금 일어서서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기운을 끌어모으기 시작한 천무진의 모습을 보며 천운백은 알 수 있었다.
‘문턱을…… 넘어섰구나.’
* * *
십천야를 이끄는 천지광의 거처.
그곳으로 오늘 십천야들이 모여들었다.
그 모든 건 곧 있을 중요한 거사를 위해서였다.
반조와 주란.
그리고 화산파의 자운.
마지막으로 천무진을 만나러 갔던 매유검까지 돌아오며 이 자리에는 남은 십천야들 전원이 자리하게 됐다. 단 한 명, 천무진을 제외하고는.
자운은 자신의 맞은편에 자리한 매유검을 보며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십천야들끼리도 은근히 적대심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저자는 정도가 심했다. 매유검은 모두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대놓고 시비를 걸어 댔다.
당연히 자운 또한 매유검을 좋아할 리 만무했다.
자운이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
“어이, 사람이 말을 걸었으면…….”
“시끄러워. 머리 복잡하니까.”
귀찮다는 듯 대꾸하는 매유검의 모습에 자운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원래부터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지금 그의 태도는 자운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매유검!”
버럭 소리를 내지른 자운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매유검이 여전히 장포를 뒤집어쓴 채로 힐끔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해 보게?”
“못할듯싶더냐.”
자운 또한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러자 매유검이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며 입을 열었다.
“잘됐네. 네놈의 그 고생 하나 모르는 것 같은 낯짝이 내내 맘에 안 들었거든.”
자운이 마찬가지로 검을 뽑아 들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그때.
상황을 보고만 있던 반조가 눈을 감으며 소리쳤다.
“그만들 못해!”
“반조, 네가 어르신의 총애를 좀 받는다고 우리들의 대장처럼 구는데…….”
자운이 그간 쌓여 왔던 불만을 쏟아 내려던 때였다.
쿵.
그들의 앞에 자리하고 있는 휘장 안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살기를 쏟아 내던 매유검과 자운은 검을 거둬야만 했다.
동시에 이곳에 자리한 네 명의 십천야들이 휘장 쪽으로 무릎을 꿇었다.
십천야의 우두머리인 어르신.
천지광의 등장이었다.
휘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던 의자에 몸을 실은 그가 말했다.
“소란스럽군.”
“죄송합니다, 어르신.”
“됐다.”
반조의 사과에 천지광이 상관없다는 듯 말을 끊었다.
어차피 이들끼리 사이가 좋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의 명령만 충실히 따라 주기만 한다면 서로를 헐뜯고 미워하고 이런 것 따위는 전혀 상관없었으니까.
천지광이 말을 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모두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뭐…… 몇 개의 공석이 생겼지만 말이다.”
네 명의 십천야들이 천무진과, 그의 일행들에게 죽었다.
그로 인해 십천야 내부에서도 많은 전력 누수가 있었다. 단순히 그들이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로 인해 그 아래에 거느리고 있던 세력들이 갈가리 찢겨 나간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개중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정보 단체인 귀문곡이었다.
천지광이 물었다.
“귀문곡은?”
“……아무래도 수습이 어려울 것 같아요.”
주란이 조심스레 대꾸했다.
십천야의 일원이자 곡주인 상무기가 죽고, 십천야 쪽에서 심어 둔 핵심 인물들 중 상당수가 죽어 버리는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이후로 적화신루가 개입하며 빠르게 귀문곡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무림에 전면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십천야의 입장에서는 그런 적화신루를 밀어내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대충 상황을 알고 있는 천지광이었기에 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얼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천지광이 불편한 어투로 말했다.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적화신루라는 날파리들이 일을 번거롭게 만드는군.”
“이대로 두실 생각이신가요?”
“그럴 순 없지. 다만 아직은 아니다.”
천무진의 기억을 되돌렸고, 동시에 어릴 때부터 그에게 걸어 둔 금제 또한 다시 시작된 상황이다. 그렇게 천무진은 자신이 편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주변 인물들을 지금부터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십천야들에게도 밝히지 않은 진짜 천지광의 목표는 천룡성이 지닌 환생의 힘.
그것만 얻을 수 있다면 사실 이번 생의 모든 것들이 망가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삶을 살면 그만이니까.
이번 생에서 이렇게 십천야를 만들고 수많은 일들을 벌여 온 모든 건 다음 생을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 그리고 천룡성의 힘을 손에 넣고, 또 천운백의 방해를 견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어차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순간 모두 사라질 모래성과도 같은 존재들.
그랬기에 천지광은 그 모든 것에 큰 욕심은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진짜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천지광이 물었다.
“천운백과 천무진의 상황은?”
“우리의 예상대로 무공을 전수하고 있는 듯싶어요. 조만간 천무진에게서 정확한 정보가 올라올 것 같고요.”
“……그래?”
무공을 전수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에 휘장 안쪽에 위치한 천지광의 눈동자가 빛났다.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다.
그가 말했다.
“그럼 우리도 슬슬 준비하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천룡성의 힘을 자신이 가지는 것. 그리고 그다음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건 바로 천운백이었다.
천지광은 곧장 말을 이었다.
“천룡성의 무공을 천무진이 모두 알게 됐다면…… 이제 천운백은 필요 없잖아?”
천운백은 언제나 위험 요소였다.
그리고 그는 천룡성의 많은 걸 알고 있는 자. 어떠한 방식으로 방해를 하고 들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살려 둔다면…… 천지광에겐 걸리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운백을 제거하는 목표를 세운 데에는 천지광의 개인적 원한 또한 큰 영향을 줬다.
사실 그의 파문은 천운백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모든 건 천지광 본인의 잘못이었으니까. 그가 쫓겨났기에 천운백이 천룡성에 들어온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지광은 언제나 천운백이라는 존재를 증오해 왔다. 마치 그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것처럼 느꼈으니까.
의자에 앉아 있던 천지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도 완벽했다.
자신이 짜 놓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굴러가고 있었다.
천지광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사부님, 당신이 틀렸습니다.’
천운백과 천지광의 사부인 천명환은 말했었다.
천지광에겐 천룡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지만 보라!
그가 주지 않은 그 천룡의 자격이라는 것을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손에 넣는 이 모습을!
자격이 없다고?
웃기는 소리다.
자격? 그런 건 만들면 된다.
자신의 힘으로.
희열이 가득한 표정으로 천지광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천운백을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