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명령 ―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 (2)
천지광이 예상치 못한 자신과의 만남에 놀란 듯 서 있는 천무진을 향해 말했다.
“이게 몇 년 만이지? 이십 년 정도 된 거 같은데. 아…… 나는 그렇지만 너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겠구나.”
천무진과 천지광의 시간은 같지 않았다.
천무진은 지금보다 더욱 나중인 미래까지 살고 현재로 돌아온 상태였으니까. 당연히 마주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같을 리가 없었다.
천지광의 말에 천무진이 짧게 답했다.
“사십 년 만입니다.”
“사십 년이라…… 참으로 긴 시간이구나.”
감개가 무량하다는 듯 말을 내뱉는 천지광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무진이 물었다.
“연락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네가 한번 만나고 싶다 하지 않았더냐. 나 또한 너의 기억이 돌아오기를 무척이나 바랐던 사람이었기에, 기억을 되찾은 걸 알자마자 만나고 싶기도 했고.”
천지광의 답에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만남을 예상치 못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정신이 돌아온 이상 두 사람은 반드시 한 번쯤은 만나야 할 관계였으니까.
사실 그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많았다.
그리고 확인해야 하는 것들도.
천무진이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해 보거라.”
“저번 생에서 조종당하다가 죽는 건 애초에 계획이었으니 그렇다고 치겠습니다. 물론 그것도 그리 유쾌한 죽음은 아니었단 게 불만이긴 하지만 그 또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제 죽음이 우리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 삶에서까지 절 조종할 수 있는 여인을 보내신 이유가 뭡니까?”
천무진이 지닌 첫 번째 의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저번 삶에서의 일들은 계획대로였다. 그에 비해 이번 생은 다소 달랐다. 자신이 아는 원래의 계획을 떠올려 보면, 이번 삶에 적련화를 보내 섭혼술을 사용하는 건 없었다.
천무진의 질문에 천지광은 기다렸다는 듯 답변을 토해 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개중에 가장 큰 건 역시나 네 능력 때문이었다. 기억을 되돌리기에는 다소 이른 시기인데 너무도 많은 타격을 주더구나. 그래서 아주 잠시 널 멈춰 두려고 했던 것뿐이다. 시간을 끌기 위해 말이다.”
“잠시라고요?”
“그래, 잠시 네 움직임을 더디게 만들었다가, 시기가 되면 섭혼술을 풀어 주려 했던 게지.”
청산유수처럼 이어지는 답변.
그 답변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도록 잠시 시간을 끌려 했고, 적당한 시기가 되면 풀어 주려 했다는 게 정황상 납득할 수 없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만큼 중요한 계획이었고, 조금의 어그러짐이 거사를 망칠 수도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그 대답에서 그리 신빙성이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하지만 천무진은 그런 개인적인 감정은 무시한 채로 질문을 이어 갔다.
“계획은 어떻게 되어 갑니까?”
“우리가 정해 놓은 대로 잘 흘러가는 중이다. 네가 망쳐 놓은 몇 가지 일들이 있긴 하지만…… 그 또한 수습 중이고.”
대답을 하는 천지광을 살피던 천무진이 이내 슬쩍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지금 십천야는 몇 명이나 남아 있는 겁니까?”
“너에게 당한 이들을 제외하고 전원이 건재하다.”
“그래요? 그럼 그중에 제가 아는 것이 어르신과 저를 제외해 일곱이면…… 한 명만 못 본 겁니까?”
“그렇게 되겠지?”
“그게 누굽니까?”
물어 오는 천무진의 질문.
어쩌면 별다른 의미가 없는 질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천무진이 이런 질문을 던진 건 전부 이유가 있었다.
천무진의 질문에 천지광은 아주 잠시 멈칫했지만 숨겨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었기에 솔직하게 사실을 밝혔다.
“십천야로는 만나 보지 못했겠지만, 다른 식으로는 스치듯 만나 본 적 있는 이다. 바로 화산파의 자운이다.”
자운이라는 말에 천무진은 놀라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드러냈고, 현재는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고수. 그리고 다음 대 무림맹주로 거론될 정도의 인물이다.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십천야였기 때문이었다.
천무진이 괜히 더 이야기를 끌었다.
“그가 십천야라니 놀랍군요.”
“자운은 무림맹의 일을 맡은 자다. 마찬가지로 마교의 일을 맡았던 것이 양사창이었지. 네 동료의 손에 죽긴 했다만.”
“아, 그때 그가 양사창이었군요.”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엽이 죽였던 십천야, 하지만 그의 정체는 파악하지 못했었다.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망가트린 탓에 여태까지 확실한 정체는 알 수가 없었는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천무진이 머리를 굴리고 있는 그때였다.
“나도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혹시 네 사부에게 천룡비공의 마지막을 전수받은 것이냐?”
물어 오는 천지광의 질문.
그것을 듣는 순간 천무진은 길게 호흡을 내쉬고는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버텨 보려고 했다. 허나 이내 얼마 되지 않아 결국 천무진은 사실대로 답했다.
“네, 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하면서도 천무진은 빠르게 모든 상황들을 머리에 집어넣었다.
이번 만남에서 그는 천지광과 자신의 사이에 관계된 걸 최대한 많이 알아내야 했으니까.
예상은 했었던 일이지만 천무진이 절초를 익히고 있다는 말에 천지광의 눈동자가 조용히 빛났다.
천운백에게서 천룡비공의 마지막을 빼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천지광이 수십 년 넘게 기다려 왔던 목표였으니까.
“그렇다면 혹시 천룡혼은…….”
“아직은 무리입니다. 천룡혼은 천룡비공이 완전해진 이후에나 사용할 수 있답니다.”
“……그래?”
되묻는 천지광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천무진이 자신에게 거짓 보고를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인지 의심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내 천지광이 말을 이었다.
“무공의 성취가 보인다면 내게 말해 주거라. 나 또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으니.”
“그리하도록 하지요. 그런데 어르신.”
“응?”
자신을 향한 부름에 천지광이 답했을 때였다.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 이 일의 보상을 받고 싶습니다.”
너무도 의외의 말이었던 것일까?
천무진의 말에 천지광의 표정이 꿈틀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천무진의 말에 답했다.
“보상이라. 분명 내 기억으로 확실한 보상을 주기로 이야기가 끝났던 것 같은데…… 시간이 너무도 지나서 잊은 게냐, 아니면 더 많은 걸 원한다는 소리냐.”
“똑똑히 기억합니다. 어르신이 제게 주시기로 약속한 보상은 자유였지요. 그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완전한 자유.”
천무진의 어린 시절 천지광은 말했었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평생을 자유로이 살게 해 주겠다고. 죽을 때까지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정도의 재물을 줄 것이고, 누구의 간섭도 없는 삶을 살게끔 해 주겠다 했다.
그뿐인가.
천지광은 천무진의 다음 삶까지도 약속했었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고아가 되어 떠돌 어린아이인 천무진을 찾아, 또 한 번 풍족한 삶을 살게 해 주겠다고. 그리고 원한다면 부모도 한 번 찾아봐 주겠다는 약조까지 했던 그다.
그 모든 것이 당시 어렸던 천무진에게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고아로 이곳저곳을 떠돌며 힘겹게 살아왔던 천무진이다. 그에게 두 번의 삶 모두를 풍족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싫을 이유가 있었겠는가.
분명 그때는 그거면 충분하다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천무진이 말을 이었다.
“전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자 합니다.”
“무엇을 말이냐?”
“제 동료들, 그리고 사부님까지. 그들을……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천무진의 말에 천지광은 잠시 뜸을 들이다 이내 말문을 열었다.
“……그것이 네 새로운 부탁이더냐?”
“예, 무리한 부탁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어차피 어르신의 계획에 그들을 죽여야 할 이유는 없잖습니까.”
십천야들은 천지광의 목적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무림을 손에 넣고 싶어 한다고 여길 뿐이다.
하지만 천무진은 달랐다.
그는 천지광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었다.
천룡혼을 통해 두 번째 삶을 가지는 것. 그랬기에 이런 부탁 또한 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천무진의 새로운 부탁.
대답은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천지광이 답했다.
“네 말이 맞다. 그리 무리한 부탁은 아니지. 나 또한 너와 연관된 사람은 가능하면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네 부탁도 있으니 더욱 그리하도록 하지. 그 부분에 있어서는 네가 염려할 필요 없도록 하겠다. 다만…… 만약 그들이 내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그때는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봐야겠구나. 그건 너도 이해하겠지?”
천무진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며 내뱉는 천지광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천무진을 수긍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순간 천지광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뭐 이번 생이야 어느 정도 벌어진 일들을 모두 알고 있으니 그렇다 치고…… 네 저번 생이 궁금하구나. 어찌 살았느냐?”
단순히 천무진의 저번 삶이 궁금하다는 듯한 질문.
그렇지만 천지광이 괜히 이런 질문을 던졌을 리가 없다. 그는 이 질문을 통해 천무진의 저번 삶을 확인하고, 혹시 벌어질 수도 있는 일들에 대해 방비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무진 또한 천지광의 속셈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저는…….”
그로부터 약 반 시진가량.
천무진은 과거 자신의 삶에 있었던 많은 일들을 그에게 전했다. 하지만 천무진이 단순히 대답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 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천지광이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대답을 하는 와중에 천무진 역시 계속해서 여러 가지를 확인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긴 대화가 끝이 났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천지광이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실로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구나. 하지만 걱정 말거라. 이제부터 네 삶은 결코 그렇지 않을 테니. 나만 믿고 따라오너라.”
“예, 어르신.”
천무진이 순순히 답했고, 이내 천지광이 옆에 있는 창을 통해 바깥을 살폈다.
이미 알아야 할 것은 어느 정도 확인한 상황이었기에 더는 천무진과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다. 돌아가서 쉬도록 하고, 전달한 것처럼 나흘에 한 번씩 연락을 취하도록 해라. 혹 그 중간이라도 천룡비공의 성취가 있다면 언제든 연락을 넣어도 좋다.”
“알겠습니다. 그럼 물러가죠.”
말을 마친 천무진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곧장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주고받은 대화들.
그리고 가벼운 행동들까지도.
그것을 통해 천무진은 몇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자신은 어르신인 천지광에게 대적하기 어렵다. 그의 명령이라면 거스르지 못하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걸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평소에도 그랬지만 더욱 순종적으로 행동하게 되었으니까.
그렇지만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작지만 몇 가지 소득도 있었으니까.
그중에 가장 중요한 건 그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고, 뭔가를 요구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가 명령을 내린 걸 제외한다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도 컸다.
거기다가 마지막에 과거의 삶에 대해 이야기들을 나누는 과정에서도 알게 된 사실…….
몸을 돌리고 걸어가는 천무진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사라졌다.
적어도 이번 만남에서 뭔가를 얻어가는 건…… 천지광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천무진이 이 거처를 완전히 빠져나갔을 때였다.
천무진이 사라진 공간에 혼자 남아 있던 천지광이 가볍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 귀찮게 되었군. 내가 이래서 그냥 조종을 하고 싶었던 건데…….”
천무진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었다.
천지광은 단순히 시간을 끌기 위해 천무진에게 적련화를 보냈던 게 아니었다.
그저 그게 이용하기에 편했으니까.
적련화를 통해 천무진을 조종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서였다.
자유의사.
천무진은 분명 자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련화를 통해 조종하는 것처럼 순종적일 수는 없었다. 천무진에게 스스로의 의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본인의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따르는 것뿐이다.
그저 시키는 것을 그대로 따르는 인형과, 지금의 천무진은 엄연히 달랐다.
천무진 스스로가 의사를 지니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지금, 결국 천지광 또한 어느 정도는 그에게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명령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감정까지 아예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그랬다가 아주 조금이기는 하나 뭔가 일이 어긋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으니까.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천지광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앞에선 그러겠다 답했지만 사실 그는 그렇게 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죽일 것이다.
이번 생에서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게 될 새로운 삶에서도.
애초에 위험 분자인 그들을 살려 둘 이유가 없잖은가. 특히나 천운백은 더더욱.
천운백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던 인물이다.
새로운 삶에서 그런 위협이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개인적으로도 그가 싫었다.
이번 생에서 천운백에게 빼앗긴 모든 것들.
천지광은 그 모든 걸 다음 생에서 갚아 줄 계획이었던 것이다.
사실 애초에 약속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었다.
다음 생에서 자신이 일을 벌이는 그때는 그들끼리 아무런 관계도 아닐 테고, 심지어 천무진은 태어나기도 전일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손대지 않겠다는 거짓말을 해 주는 것 정도가 뭐 그리 어렵겠는가.
다만 문제는 이번 생인데…….
그 또한 크게 문제 될 부분은 없었다.
천무진에게서 천룡혼을 받는다면 그 이후부터는 그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천지광이 모멸감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간 구실도 못하던 어린 거지새끼를 거둬서 지금까지 살아 있게 해 줬더니 이제는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구나.”
이를 부득부득 갈며 자신에게 당돌하게 제안을 해 오던 천무진을 떠올린 천지광이 휘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금이야 천무진이 쓸모가 있으니 까부는 것도 이리 눈감아 주고 있지만…… 결국 사냥이란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사냥이 끝나고 원하는 걸 얻게 되는 그날.
‘널 살려 둘 이유 또한 사라지는 게지.’
쓰임새를 다한 사냥개는 필요가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