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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43화 (242/293)

243화. 용기 ― 한마디만 해요 (1)

“왔어요? 생각보다 좀 늦었네요?”

거처로 돌아온 천무진을 반긴 건 백아린이었다. 그녀는 돌아오는 천무진의 기척을 눈치채고는 곧장 그의 방으로 찾아온 것이다.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채로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천무진이 픽 웃으며 답했다.

“기다렸어?”

“……아까까지만 해도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막상 얼굴 보니 그러지 못하겠네요. 맞아요. 언제 오나 목이 빠져라 계속 기다렸다고요.”

농담과 진심이 섞인 그 말에 천무진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가 백아린이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끄집어내며 말했다.

“날도 추운데 거기서 그러고 있지 말고 들어와.”

“그럼.”

허락이 떨어지자 백아린이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그녀는 천무진이 미리 빼놓은 의자에 착석한 채로 잠시 겉옷 안에 넣어 두었던 물건들을 정리하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턱을 괸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백아린의 시선을 느낀 천무진이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동안 말하지 않은 게 몇 개 있는데.”

“몇 개나 돼요?”

백아린이 웃으며 물었다.

매일 엉망이 되어 돌아오는 천무진을 보며 뭔가 일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던 그녀다. 그랬기에 그동안 말하지 않은 게 있다는 말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묻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천무진이 곧장 답했다.

“요즘 매일 지쳐서 들어오던 건 천룡성의 마지막 절초를 전수받고 있어서야. 매일 다쳐서 와서 걱정했을 텐데 이야기가 많이 늦었네. 미안해.”

“……왜 사과를 저한테 해요. 힘든 건 당신이었을 텐데.”

“나?”

“그렇게 엉망이 될 정도로 몸을 굴리면서도 계속 저한테 신경 쓰고 있었잖아요. 모르는 줄 알았어요?”

“그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계속해서 백아린을 신경 써 왔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걸 그녀는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더더욱 천무진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몸을 돌린 천무진이 백아린이 있는 건너편으로 다가와 앉았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상태에서 백아린이 물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걸 감춘 거예요? 천룡성의 무공을 익힌다는 걸 비밀로 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것 때문에 몇 가지 해 줄 이야기가 있어. 꽤 놀랄 텐데 마음의 준비는 됐고?”

“이래 봬도 강심장이라고요. 당신도 알잖아요.”

“……알지.”

걱정 말라는 듯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백아린의 모습에 천무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제아무리 강심장을 지닌 백아린이라고 할지라도 지금 자신이 내뱉는 말은 결국 그녀에게 큰 짐이 될 거라는 걸 알았기에.

천무진은 오늘 이 자리에서 백아린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랬기에 천지광을 만나러 가기 전, 입구에서 만난 그녀에게 저녁에 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언급했던 것이다.

그간 계속해서 고민하다 내린 결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꺼내기 힘든 이 말.

이 말로 인해 자신과 백아린의 사이가 변하게 될 것이 두려웠다.

그렇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자신을 위해 싸워 온 그녀다. 그런 그녀를 더는 속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화산파의 자운. 그놈 십천야야.”

“……농담이죠?”

“아니, 진짜야. 그놈이 무림맹과 관련된 모든 일을 도맡는 십천야라고 하더군.”

천지광을 통해 전해 들었던 기밀을 천무진은 아무렇지 않게 백아린에게 전달했다.

그 놀라운 정보에 농담이냐고 되묻는 그녀에게 진지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다른 이도 아닌 천무진이 한 말이다.

이것이 결코 허튼소리는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그걸 어떻게 안 거예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천무진의 눈과 귀가 되어 주는 것이 바로 백아린이 수장으로 있는 적화신루의 일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정보를 천무진이 물고 왔다.

그것도 무림을 발칵 뒤집을 정도로 커다란 정보를 말이다.

그렇지만 천무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에 천무진은 또 다른 정보를 꺼내어 들었다.

“마교에서 단엽이 죽였던 십천야 기억하지? 얼굴을 망가트려 알아볼 수 없었던 그놈 말이야. 정체불명 시체의 정체는 흑풍진천대(黑風振天隊) 대주 양사창이었어.”

“…….”

이어지는 천무진의 충격적인 발언.

그 발언까지 들은 직후 백아린의 표정은 오히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분명 두 가지 모두 엄청난 정보들이었다.

그간 막혀 있던 부분을 해결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새로운 정보들을 구해 낼 방도가 생긴 것이다. 그렇지만 백아린은 기쁘지 않았다.

천무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직감했으니까.

백아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게 끝이에요?”

천무진이 가져온 정보가 모자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차라리 이것이 전부이기를.

더는 뭔가가 없기를 바라며 물은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간절한 바람을 먼지로 만들어 버릴 충격적인 말이 천천히 천무진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나도 십천야야.”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 어떠한 이야기에도 더 큰 충격을 받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거늘, 지금 천무진이 내뱉은 말은 그녀의 사고를 정지시키기에 충분했다.

백아린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표정을 찌푸린 채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저기 미안한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거든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어요?”

“말 그대로야. 나도 십천야라고.”

“그러니까…… 당신이 십천야라고요? 우리가 여태까지 싸워 왔던 그 십천야요?”

너무도 간단한 말인데 이해가 되지 않을 리 없었다.

그저 그 충격적인 발언을 믿을 수 없었기에 몇 번이고 설명을 듣기 위해 되묻는 것뿐이다.

되묻는 그녀를 향해 천무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누구보다 십천야와 싸워 오던 게 당신인데, 그런 당신이 십천야라고요?”

백아린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사실 이런 반응이 당연했다.

어둠 속에 있는 십천야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나게 한 것도 천무진이고, 그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 온 것도 그다. 그리고 과거의 삶에서 그들로 인해 비참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도 백아린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천무진이 십천야일 수 있단 말인가.

천무진이 말했다.

“믿기 어려운 거 알아. 나도 믿기 어려운데, 당신이 이러는 것도 당연하지. 그런데 사실이야. 농담이면 나도 너무 좋겠는데…… 슬프게도 아니네.”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내뱉는 천무진의 말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 나왔다.

그런 그를 향해 백아린이 힘겹게 질문을 던졌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십천야라면서 왜 그들과 싸운 거고요.”

“나도 내가 십천야라는 걸 안 건 얼마 전이야. 그러니까…….”

천무진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아린이 떠났을 때 매유검을 통해 진법에 갇혔고, 그곳에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은 것부터. 그리고 어렸을 때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또 어떻게 해서 자신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까지.

천무진의 아픈 과거를 비롯해 꽤나 긴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동안 백아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 줬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였다.

입을 닫은 천무진은 반쯤 고개를 숙인 채로 지그시 눈을 감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백아린은 또 마음이 아팠다.

천무진은 언제나 당당한 사내였다. 언제나 자신감이 가득했고, 그 누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이렇게 어깨가 처져 슬퍼하고 있었다.

백아린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천무진의 볼에 닿았고, 놀란 그가 황급히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였다.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고개 들어요. 그런 모습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으니까.”

“……아무리 내가 뻔뻔하다고 해도 당신 앞에서 당당할 순 없잖아. 날 믿어 준 당신에게 이런 실망감을 줬으니까.”

몇 번이고 위험을 무릅쓰며 몸을 던지면서까지 자신을 위해 싸워 온 백아린이다.

그녀에게 미안한 건 당연했다.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그 침묵 끝에 천무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 정체를 알았으니…… 떠날 건가?”

천무진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

그건 바로 백아린이 자신의 옆을 떠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천무진은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은 십천야였고, 여태까지 싸워 온 적의 일원이었으니까.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천무진의 목소리 끝은 떨리고 있었다.

백아린을 비롯한 함께해 온 동료들이 떠나는 건 지금의 천무진에게는 모든 걸 잃는 것과도 같은 외로움을 안겨 줄 일이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천무진은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을 잡으려고 하는 건 자신의 욕심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때였다.

“그거 알아요? 당신 지금 앞뒤가 완전히 틀렸다는 거.”

이해가 안 되는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게 무슨…….”

“내가 십천야와 싸우기 위해 당신과 함께했다고 생각해요? 아뇨, 난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십천야와 싸웠어요.”

백아린의 그 말에 천무진은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백아린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리 사이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이 있는 곳이라면 전 어디라도 같이 갈 거니까. 그곳이 설령 십천야라고 할지라도요. 당신 옆에 있을 거고 옆에서 계속 조언할 거예요. 당신이 가는 길에 도움이 될 수 있게요. 그래서 당신이 끝까지 싸울 수 있도록 옆에서 힘이 될 생각이에요.”

백아린의 말은 천무진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천무진이 십천야여도 상관없다고. 그의 옆에 있겠다고. 계속 옆에 있으면서 천무진이 스스로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게끔 돕겠다고 말이다.

놀란 천무진을 향해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잊지 말아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천무진의 옆에는 그와 함께하는 이들이 있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다.

한천이나,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 단엽도 있다. 그리고 천무진을 걱정하고 있는 천운백 또한 언제나 그를 위한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줄 것이다.

거기다 천무진에게 은혜를 입은 무림의 많은 이들 또한 그를 돕기 위해 움직일 게 분명하다.

백아린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천무진을 향해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까 말해요. 가지 말라고. 옆에 있으라고. 그 말 한마디면…… 저와 적화신루는 당신과 함께 갑니다.”

용기가 필요했다.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딜 그런 용기.

그저 한마디일 뿐이었다.

하지만 작게 느껴질 수도 있는 그 용기가 지금의 천무진에게는 무척이나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 작지만 커다란 용기를 내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 있던 천무진은 이내 자신을 바라보는 백아린의 눈빛을 마주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

저 따뜻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천무진에게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주었다.

그가 말했다.

“……가지 마. 당신이 필요해.”

천무진의 그 말이 떨어졌을 때였다.

백아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이내 포권을 취해 보이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답했다.

“약속하죠.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게요. 적화신루 십이대 루주 백아린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말을 끝낸 백아린은 곧장 천무진에게 다가오더니 자리에 앉아 있는 그의 머리를 양손으로 꽉 끌어안았다.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방금 그건 적화신루 루주로서 당신에게 한 맹세, 그리고 이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하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약속이에요.”

말과 함께 더욱 강하게 천무진의 머리를 끌어안는 백아린이었다.

그녀의 따뜻한 말과, 체온에 천무진의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갈 때였다.

백아린이 재차 말했다.

“이제 혼자 하려고 하지 마요. 지금까지처럼 같이 싸워요.”

백아린의 품에 안긴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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