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진행 ― 충분하거든 (1)
화산파 자운의 서재.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약속하지 않은 누군가가 다급히 들이닥쳤다.
갑작스러운 방문객의 등장에 서재에서 서책을 보고 있던 자운이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그의 서재에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조수아였다.
외부로의 출입도 적고, 누군가와의 만남도 피하는 그녀가 제 발로 이렇게 찾아온 건 놀랄 일이 분명했다.
화산파 내에서 자신보다 위의 항렬인 조수아가 나타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자운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사고(師姑:사부의 사매 또는 사제)께서 이곳엔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자운이 자신을 향해 건넨 인사에는 답변도 하지 않은 조수아가 다급히 이곳에 온 이유를 드러냈다.
“자운, 내가 들은 이야기가 사실인지 물으러 왔는데.”
“뭘 말입니까?”
“이번에 임무가 있어서 화산파를 떠난다며. 그런데 그 임무가…… 천룡성의 그분과 관계된 게 맞아? 그때 화산파에 온 사내 말고 진짜 천룡성의 주인 말이야.”
조수아의 질문에 자운의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사실 그녀가 이곳에 나타났을 때부터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자운은 함정을 파 놓았고, 그곳에 조수아가 걸려들도록 사전 준비까지 해 뒀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녀는 그 소식을 전해 듣기 무섭게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고.
자신의 계획이 먹혀들었다는 기쁨을 감춘 채로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맞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곳에 함께 갈 누군가를 고르고 있고?”
“예. 그렇습니다만 갑자기 그건 왜…….”
전혀 모르는 척 말꼬리를 흐릴 때였다.
조수아가 양손으로 자운의 책상을 팍 소리가 나게 짚으며 말했다.
“아직 자리가 비어 있다면 내가 가고 싶은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하는 조수아의 모습에 자운은 짐짓 당황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말했다.
“같이 가 주신다면야 큰 도움이 되어 주실 테니 그건 괜찮습니다만 갑자기 왜 이런 부탁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조수아는 화산파에서도 무척이나 배분이 높은 여인이다. 거기다가 실력 또한 뛰어나 화산파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다.
물론 지금 이 임무에 그녀의 실력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천운백을 죽이기 위해 조수아를 끌어들이는 가짜 작전.
그리고 그 계획에 그녀가 말려든 것뿐이었으니까.
다 알면서도 자운은 모르는 척 질문을 던졌고, 조수아가 대충 답했다.
“천룡성 분을 만나서 할 말이 있거든. 어쨌든 내가 가도 된다는 거지?”
“물론입니다. 사고 같은 실력자가 나서 주신다니 오히려 환영할 일이지요.”
승낙의 뜻을 내보이자 조수아의 다급해 보이던 표정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이윽고 그녀가 물었다.
“언제 출발할 예정이지?”
“함께 갈 인원이 정해지는 대로 최대한 빠르게 움직일 생각이긴 했는데…… 혹시 내일도 가능하시겠습니까?”
“오늘도 상관없어.”
“하하! 그건 제가 어려울 것 같군요. 그럼 말씀드린 대로 내일 오전 중에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런데 목적지는 어디야?”
물어 오는 조수아의 질문에 억지로 웃음을 감춘 자운이 답했다.
“산동(山東)입니다.”
* * *
대홍련은 큰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련주 단관호의 은퇴, 그리고 그 자리는 기다렸다는 듯 단엽이 물려받았다.
분명 단엽은 대홍련의 련주 자리를 물려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뛰어난 무공 실력.
거기다가 부련주라는 직책까지 갖췄으니까.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련주가 될 수는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얽혀 있는 대홍련답게 그 내부에는 각자의 욕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욕심에 부합하는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각자의 생각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전대 련주였던 단관호가 적극적으로 나서며 단엽을 밀어준 덕분에 내부 분열은 최소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단관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들이 단엽을 련주로 인정하는 건 아니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인 여섯 명의 사내들은 모두 단엽이 련주가 된 사실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었다.
나름 대홍련에서 힘깨나 쓰는 이들.
이들은 단엽이 련주가 되며 자신들이 가진 상당 부분을 빼앗길까 염려하고 있었다.
여섯 명의 사내 중 삐쩍 마른 인물이 입을 열었다.
“각주, 요새 대홍련이 돌아가는 꼴이 보이십니까? 아주 개판입니다.”
“맞습니다. 이대로 보고만 계실 생각입니까?”
다른 인물의 동조와 함께 다섯 사내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들을 이끄는 수장 격인 묵혼각의 각주 진명훈이라는 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진명훈은 대홍련 내에서도 서열 사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번 단엽이 련주가 된 일에 크게 불만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의 말에 진명훈이 표정을 구긴 채로 답했다.
“나라고 해서 그냥 있고 싶겠소. 허나 전대 련주가 이리도 강경하게 밀어주고 있으니 섣불리 행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그간 이뤄 놓은 모든 것들이 모두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이 여섯 명의 사내는 꽤나 오랜 시간 대홍련의 이득이 아닌 사사로운 욕심을 위해 몇 가지 일들을 벌여 왔다.
그렇지만 련주가 바뀌고, 그에 따라 몇 가지 규율들이 변하면서 이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올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다른 이들의 말처럼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위급한지 잘 알고 있는 진명훈이다.
그의 수심이 깊어질 때였다.
옆에 있던 사내가 말했다.
“차라리 대홍련 구북(丘北)지부를 기점으로 하여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곳이라면 제아무리 단엽이라고 해도 섣부르게 쳐들어오기는 어려울 것 아닙니까.”
“그거참 좋은 생각입니다! 어떠십니까 각주?”
“…….”
“시간이 갈수록 점점 상황이 좋지 않아집니다. 지금이라면 우리에게도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목소리를 높이는 다른 이들의 모습에 눈을 감은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명훈이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그가 번쩍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탕!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친 그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좋소! 내 여러분들의 의견대로 하리다. 이번 기회에 구북을 손에 쥐고, 단엽이라는 그 애송이를 끌어내립시다!”
“좋습니다!”
“하하! 역시 진 각주는 호탕하셔서…….”
모두가 진명훈의 결단에 좋다고 소리를 내지르는 그때였다.
콰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벽면 한쪽이 박살이 나며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여 있던 여섯 명의 사내들이 놀라 움찔했을 때였다.
벽면에 난 구멍을 통해 한 명의 사내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사내들의 표정은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이 목청 높여 욕하던 단엽이 나타났으니까.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 단엽은 여섯 명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보며 비웃듯 말했다.
“쥐새끼들처럼 숨어서 떠들어 대기는.”
쥐새끼라는 말에 여섯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진명훈이 버럭 소리쳤다.
“말을 삼가시오! 쥐새끼라니 우리에게 그런…….”
어떻게든 목소리를 높이려는 그 순간.
상대의 행동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단엽이 곧바로 움직였다.
쾅!
순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여섯 사내가 놀란 듯 주춤거릴 때였다.
몸을 굽히며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친 단엽이 고개를 들어 올린 채로 히죽 웃어 보였다.
그가 말했다.
“어디서 말을 삼가라 마라 명령 질이야. 고작 각주 주제에.”
“…….”
입을 닫은 상대의 모습을 보며 단엽의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단엽은 이미 바깥에서 이들이 주고받는 모든 대화를 들은 상태였다.
가능하면 전대 련주이자 삼촌인 단관호의 말대로 최대한 좋게 풀어 가고 싶었지만…….
단엽이 가볍게 손목을 꺾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분명 련주 취임식 때 말하지 않았나? 도전은 언제든 받아 준다고. 원한다면 언제라도 덤벼서 힘으로 빼앗으라고.”
실로 충격적인 취임식이 아닐 수 없었다.
취임식에서 옆에 자리하고 있던 전대 련주 단관호가 얼굴을 감싸 쥘 정도로 놀라운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바로 련주 자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련주의 자리를 원한다면 언제든 덤벼도 좋다. 그리고 자신을 이긴다면 그 자리를 내주겠다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그만큼 스스로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기에 가능했던 말.
그리고 단엽이 한 말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여섯 명의 사내를 향해 다가가며 단엽이 말했다.
“그리고 말했지. 그 반대로 이렇게 숨어서 뒤가 구린 행동을 하는 놈들은…… 박살을 내 버린다고.”
“이익! 멈추십시오, 련주! 우리에게 손을 댄다면 그냥 넘어갈 것 같습니까?”
진명훈의 옆에 있던 다른 사내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소리쳤을 때였다.
단엽이 번개처럼 달려들어 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빠악!
소리와 함께 곧장 바닥에 널브러진 상대를 내려다보며 단엽이 말했다.
“그냥 안 넘어가면 어쩔 건데?”
“련주!”
진명훈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에 단엽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어루만지며 표정을 찡그렸다.
“거참, 더럽게 시끄럽네. 떠들지 말고 그냥 빨리들 덤비라고. 여섯 명이서 동시에 덤비면 되겠…… 아, 이제 다섯 명이지, 참.”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자를 툭툭 차며 단엽이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바로 그때였다.
“각주님! 괜찮으십니까?”
외침과 함께 문을 열고 나타난 수하의 모습에 진명훈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생각해 보니 이곳은 자신의 거처였다.
거기다 지금 나타난 단엽은 누가 봐도 혼자였다.
묵혼각의 인원들 중 절반 가까이가 이곳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까지 있다면…… 이 싸움은 자신들의 승리다.
진명훈의 표정이 득의양양하게 돌변했다.
“아무래도 련주가 자리를 잘못 찾은 듯싶소. 함부로 이곳에 들어오다니…… 이러니 내 당신이 련주로 부족하다 말하는 거요. 할 줄 아는 건 무식하게 주먹을 쓰는 것밖에 없는 작자가 련주라니, 대홍련의 꼴이 우습지 않겠소.”
마치 이겼다는 듯 말하는 진명훈을 바라보며 단엽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멍청하네.”
“……뭐요?”
“왜 내가 적진에 혼자 왔겠어?”
말을 마친 단엽은 권갑을 낀 주먹을 앞으로 내밀며 싸울 자세를 취했다.
상대를 향해 투지를 쏟아 내며 단엽이 말했다.
“너희 따위는 혼자서도 충분하거든.”
도발적인 그 말과 함께 단엽이 움직였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몸을 일으켜 세운 단엽이 길게 기지개를 켜며 소리쳤다.
“끄아아아!”
수많은 이들을 바닥에 널브러트린 채로 그 위에 서 있는 단엽은 방금 전까지 치열한 싸움을 벌인 사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밝은 표정이었다.
꼴은 엉망이었지만, 사실 단엽이 입은 부상은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 단엽에게 묻은 피 대부분도 그에게서 나온 게 아니라 쓰러져 있는 이들에게서 튄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단엽이 중얼거렸다.
“남은 놈들 더 있나?”
무려 육십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었다.
그들을 정리하는 데 고작 일각의 시간밖에 들지 않았다.
그것도 최대한 손속에 사정을 두어 죽지 않게끔 손을 봐주었는데도 이 정도였다.
자신의 의지로 행동한 우두머리급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명령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수하들까지 죽이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이들 또한 대홍련의 사람들이고, 이제 자신은 그들을 이끌어야 할 련주였다.
물론 추후 조사를 통해 이곳에 있던 육 인과 연관되어 악행을 저지른 자는 그에 맞는 벌을 받아야겠지만.
싸움을 끝낸 단엽이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봤다.
참으로 바쁜 나날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루라도 헤어진 그들이 생각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천무진과 백아린. 그리고 항상 자신과 어울려 주던 한천까지.
그가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하아, 다들 벌써 보고 싶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쓰러진 이들 위를 걸어 내려가는 단엽.
거침없는 단엽의 주먹 아래에 대홍련의 모든 일들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천무진 일행으로의 복귀가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