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각자의 길 ― 부탁한다 (2)
천무진이 반조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형산(衡山)이었다.
형산은 중원 오악의 하나로, 그중 남악(南嶽)이라 불리는 곳이기도 했다. 형산은 다른 오악인 화산이나 태산 같이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일흔두 개의 봉우리들이 무척이나 넓게 퍼져 있는 산이었다.
형산은 불교와 도교의 성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고 수백여 개에 달하는 절과 사당, 암자들이 자리한 곳이기도 했다.
거기다 기후적인 특징으로 인해 산을 뒤덮은 푸르른 나무들로 인해 사시사철 녹색 빛을 머금은 곳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여행객들과 시인들이 찾아오는 장소.
그랬기에 천무진은 지금 반조가 이곳으로 온 것이 미심쩍었다.
비밀 거점이 있는 곳이라고 하기엔 이곳 형산은 너무도 많은 이들이 오고 가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형산에 들어서고 적당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뒤따르던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거의 다 와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니까.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네.”
“성격이 급한 게 아니라…… 좀 이해가 안 가서.”
“뭐가?”
“형산에 십천야의 거점이 있다는 게 말이야. 여기에 드나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곳에 거점이 있다는 거야.”
“가 보면 안다니까.”
정확한 대답을 피하며 반조가 씩 웃어 보였다.
천무진은 그 말을 끝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반조의 뒤를 묵묵히 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형산을 거닐던 중이었다.
일흔두 개의 봉우리 중 어딘가에 도착하자 반조는 숲길의 옆으로 난 소로를 따라 나아갔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그곳에는 조그마한 사당이 하나 있었다.
사당은 위패 몇 개만 모셔 놨을 정도로 아주 작은 곳이었다.
주변으로 쳐진 울타리는 오랜 시간 관리가 되지 않은 듯 엉망이었다.
그 사당의 앞에 선 반조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십천야에 거점에 온 걸 환영해.”
“……농담이지?”
눈앞에 보이는 사당은 무척이나 작았다.
어디 그뿐이랴.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내부의 모습도 훤히 보였고, 사람이 기거할 만한 환경이 못 됐다. 그런데 이곳이 십천야의 거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때 반조가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사당에 자리한 위패 중 하나를 꾸욱 눌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위패가 아래로 들어갔고, 동시에 주변 기의 흐름이 요동쳤다.
그리고 그 짧은 틈을 이용해 반조는 주변에 있는 다른 물건들의 위치를 움직였다.
그러자…….
휘이이잉!
거센 바람이 주변을 한 바퀴 휩쓸고 지나갔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천무진이 슬쩍 소매로 시야를 가렸다. 그러고는 이내 거짓말처럼 사라진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손을 내렸을 때였다.
전방을 확인한 천무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여기는…….”
눈 앞에 펼쳐진 곳은 흡사 성을 연상케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소였다.
앞을 가로막은 벽은 쉽사리 넘지 못할 정도로 높았고, 그 크기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크게 느껴졌다.
주변으로는 커다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거대한 거처에서 느껴지는 웅장함에 시선을 떼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천무진이 모습을 드러낸 진짜 십천야의 거점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옆에서 반조가 말을 걸어왔다.
“어서 오라고. 우리 진짜 거점에.”
“진법에 감춰 뒀던 건가.”
“맞아.”
“……이렇게 은밀한 진법이라니 놀랍군.”
이 정도로 대규모인 공간을 진법을 통해 감춰 뒀다는 사실에 천무진은 무척이나 놀랐다. 그리고 이것은 그만큼 십천야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놀라고 있는 천무진을 향해 반조가 입을 열었다.
“들어가자고. 모두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고개를 끄덕인 천무진이 곧장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입구에 있던 수십 명의 무사들이 반조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길을 비켜섰다.
그렇게 반조를 따라 들어선 십천야의 비밀 거점 내부. 그곳은 밖에서 보았을 때 느꼈던 것처럼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수천이 넘는 인원들이 기거해도 모자랄 것 하나 없는 커다란 공간. 거기에 내부는 이것저것 꾸며져 있어, 곳곳에 연못이나 화려한 화단들이 가득했다.
반조를 따라 걷던 천무진이 물었다.
“여기가 비밀 거점 중 하나라고 들었는데 맞아?”
“그렇지. 그런데 그건 왜?”
“그럼 이런 곳이 몇 개는 더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물론. 이런 비밀 거점이 열 개는 더 있을 거다.”
반조의 대답에 천무진은 십천야가 지닌 힘이 생각보다 더욱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무너트리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어릴 적 십천야의 거점 중 한 곳에서 지낸 일이 있었던 천무진이다.
그렇지만 당시에 천무진은 바깥으로 전혀 나가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 비밀 거점이라는 곳들이 이리도 대단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늘…….
주변의 모습들을 눈에 담으며 반조를 쫓던 사이.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밀 거점의 중앙 지역에 위치한 커다란 거처.
이곳은 바로 어르신의 거점이자, 다른 이들과의 회동이 준비되어진 장소였다.
입구에서 간단한 절차를 끝낸 반조가 여전히 뒤편에서 주변의 모습을 보고 있는 천무진을 향해 손짓했다.
“가자고.”
말을 끝낸 반조가 열린 문안으로 성큼 들어섰고, 천무진이 뒤를 쫓아 움직였다.
터벅터벅.
긴 복도는 어두웠다.
마치 동굴 내부라도 된 것처럼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울렸고, 긴 복도는 왠지 모르게 음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꽤나 큰 공간.
그렇지만 극히 일부의 기척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지광은 자신의 얼굴을 쉬이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게 얼마나 심했으면 십천야에 속한 일부조차도 그의 얼굴을 본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 천지광이었으니 자신의 거처에 많은 사람을 둘 리가 만무했다.
한참을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걷던 천무진이 걸음을 멈췄다.
복도의 끝에 위치한 곳.
안에서는 몇 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곳에 자신을 기다리는 십천야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천무진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입구로 다가간 반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르신, 도착했습니다.”
“들어오거라.”
안에서 들려오는 천지광의 목소리.
허락이 떨어지고서야 반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선 천무진의 시선이 방 내부를 빠르게 살폈다.
방의 크기는 꽤나 컸다.
입구에서 가장 먼 쪽에 짙은 휘장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안에는 천지광이 있었다.
그리고 그 휘장의 양옆에는 익숙한 얼굴을 한 이들이 있었다.
장포를 뒤집어쓰고 있는 매유검과, 주란이 그곳에 자리한 상태였다.
장포를 쓰고 있어 표정을 확인할 수 없는 매유검과는 달리 주란은 무척이나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사실 그녀로서는 지금 이곳에서 천무진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고, 불편했다.
반조가 매유검의 옆에 가서 서자, 천무진 또한 자연스레 주란 옆에 자리했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내부를 감도는 사이.
휘장 안쪽에서 천지광이 말했다.
“이렇게 다들 한자리에 모이니 보기 좋구나. 예전부터 언젠가 이런 자리를…….”
“한 명이 없는 것 같은데요.”
천지광의 이야기를 자르며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자신이 알기로는 이곳에 모여 있는 인원들에다가 자운까지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그랬기에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런 천무진의 모습에 다른 이들 모두가 움찔했다.
사실 누구도 이처럼 천지광의 말을 자르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만큼 천지광이라는 인물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무진은 달랐다.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건 천지광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가 이처럼 행동했다면 당장에 휘장 안쪽에서 손을 휘둘렀을 그이지만, 상대가 천무진이니 오히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자운은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조만간 인사하게 될 게야.”
“알겠습니다.”
천무진이 짧게 답하자 천지광이 다시금 하던 말을 이었다.
“다들 이리 모였으니 함께 식사라도 해야겠군. 자리를 따로 마련해 두었으니 그리로 가서 식사들 하고 있도록 하거라. 나도 곧 가지.”
“예, 어르신.”
주란이 조심스레 답하며 곁눈질로 옆에 있는 천무진을 살폈다.
명이 떨어지자 곧바로 움직이는 나머지 인원들과는 달리 잠시 서 있는 그를 향해 주란이 작게 말했다.
“뭐 해. 빨리 나오라니까.”
자신을 향한 부름에 천무진이 휘장 쪽으로 향했던 시선을 거둔 채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주란을 따라 밖으로 나서자 그곳에는 다른 두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천무진을 뒤에 둔 채로 주란이 투덜거렸다.
“어르신한테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시키시는 일에는 머뭇거리지 말고. 그런 식으로 굴다가는 언젠가…….”
“너냐?”
“갑자기 뭔…….”
“너냐고. 백아린을 죽이려고 왔던 십천야가.”
천무진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뒤에서 여러 가지 일을 꾸민 탓에 이것저것 얽혀 있긴 했지만 주란과 직접 얼굴을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백아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주란은 표정을 팍 찡그렸다.
그날 그녀는 십천야로서 다시없을 굴욕을 당했다.
그렇게 백아린에게 패한 이후부터 주란의 인생은 이상할 정도로 꼬이기 시작했다.
계속된 작전들이 수포로 돌아갔고, 그 때문에 십천야 내에서 자신의 위치가 점점 흔들리는 상황까지 다다랐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이 백아린이라 여기는 주란으로서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이 치밀었다.
주란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데 왜?”
“어르신에게 들었겠지만 백아린은 계속 날 도울 예정이다. 그러니 이제 함부로 굴지 마. 그랬다가는 내가 용서 안 할 테니까.”
경고하듯 말하는 천무진의 모습에 주란이 버럭 소리쳤다.
“망할! 그때 더 다친 건 나거든?”
“언제까지 여기서 떠들고 있을 거야. 가자고.”
대화가 길어지는 것 같자 옆에서 듣고만 있던 반조가 개입했다.
그의 말에 주란은 씩씩거리면서 곧장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러자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매유검이 비웃듯 말했다.
“자기도 그런 무명 소졸한테 박살이 난 건 민망한 모양이지. 한심하긴. 같은 십천야라는 게 부끄럽다니까.”
들으라고 내뱉은 말에 주란은 휙 고개를 돌려 매유검을 노려봤다. 그렇지만 매유검은 오히려 어깨를 으쓱하며 상대를 도발했다.
“노려보면 어쩔 건데? 적화신루의 총관 하나 못 이기는 주제에 나한테 덤벼 보려고? 그런데 어쩌지? 나한테 덤비면 그땐 정말 죽을 텐데.”
“매유검……!”
주란이 이를 악문 채로 소리를 내지를 때였다.
두 사람 사이에 반조가 끼어들며 말했다.
“어르신 거처 앞이다. 조용들 해.”
“…….”
반조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이내 주란이 붉어진 얼굴로 몸을 돌리고는 다시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장포 안쪽에 드러난 매유검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능력도 하찮은 머저리 같은 게 자존심만 있어 가지고.”
조롱하는 그를 향해 반조가 말했다.
“매유검, 말 좀 가려서 하지. 그리고 나도 그날 그 적화신루의 총관과 마주해 봐서 아는데 너라고 해도 쉽사리 못 이길걸. 확실히 보통은 아니었으니까.”
“넌 또 뭔 개소리야.”
반조의 말에 매유검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허나 그런 매유검의 말에 굳이 답해 줄 필요가 없다는 듯 반조는 천무진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마치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저기 있지 않냐는 듯이.
그걸 끝으로 반조 또한 몸을 돌려 나아갔고, 매유검이 몸을 돌려 가장 뒤편에 자리하고 있던 천무진을 바라봤다.
그가 여전히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지금 반조가 지껄인 저 개소리를 어떻게 들어야 돼?”
불만 가득한 그 모습을 보며 천무진이 걸음을 옮기면서 입을 열었다.
“그냥 그대로 들으면 되겠네.”
“……무슨 의미지?”
되묻는 매유검의 말에 천무진이 대꾸도 하지 않고 막 그를 지나쳐 갈 때였다.
못 참겠다는 듯 매유검이 천무진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이! 내 말에……!”
팍!
어깨에 닿으려는 손을 재빠르게 쳐 낸 천무진이 싸늘한 눈빛으로 매유검을 바라봤다.
어릴 적부터 얽힌 좋지 않은 사이.
그렇게 손을 쳐 낸 그 상태로 멈추어 선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천무진이 마치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매유검의 손을 쳐 냈던 손등을 옷에 슥슥 닦아 내며 말했다.
“궁금하면 덤벼 보든가.”
“킥킥, 그래도 되겠어? 그랬다가는 네 그 잘난 동료가…….”
“그러니까 덤벼 보라고.”
말을 내뱉는 천무진의 얼굴엔 확신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확신이 무엇인지 눈치를 챈 매유검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천무진은 자신이 그 백아린이라는 여인에게 질 거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쐐기를 박듯 천무진이 말을 이었다.
“꼴 보기 싫은 네가 알아서 죽어 주겠다는데 뭐 말릴 이유는 없지.”
그 말을 끝으로 멀어져 가는 천무진의 모습에 매유검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천무진!’
뿌드득.
매유검은 절로 이가 갈렸다.
동시에 후회가 됐다.
이십 년 전 그날.
어떻게든 저놈을 죽였어야 했다.
십삼 호라 불리던 천무진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만 보고 죽었을 거라 생각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나무뿌리를 잘라 내는 것이 아니라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어야 했거늘…….
결국 그 한 번의 과오로 운명이 바뀌어 버린 매유검이다.
혼자 서 있던 매유검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이 있던 천지광의 거처 쪽이었다.
‘어르신은 저놈에게 뭘 바라는 거지?’
천지광은 유독 천무진에게 있어 관대했다.
그건 곧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의미인데…… 그게 뭔지 대체 모르겠다.
천무진을 천룡성에 넣으면서까지 벌이려고 하는 일이 과연 뭘까?
처음엔 천운백을 죽이는 것이 목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뭔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기분 더럽군.”
이를 악문 매유검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