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거짓과 거짓 ― 입맛이 없어서 (2)
긴 꿈을 꾸었다.
그것도 지독한 악몽을.
끔직한 악몽에 고통받던 천무진은 정신이 돌아오기 무섭게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로 그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헉헉!”
천무진은 땀으로 범벅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바깥은 아직도 무척이나 어두웠다.
보아하니 한 시진 정도밖에 자지 못한 것 같은데 꿈은 꽤나 길었다.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들.
그런데 갑자기 돌변한 자신이 천운백의 가슴에 직접 칼을 꽂아 넣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고, 그걸 뒤집어쓴 자신이 악마처럼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천무진은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고야 만 것이다.
꿈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불쾌했다.
다른 때도 아니고 사부에게 위험이 닥쳐 있는 이런 상황에 이 같은 끔찍한 악몽이라니…….
그때였다.
“괜찮으십니까?”
천무진이 낸 소리를 들은 것인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윤이 안으로 들어섰다.
천무진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들어오라고 허락한 적 없는 거 같은데?”
“……그렇군요.”
“됐으니 당신은 나가 봐.”
항상 영감이라 불렀던 친숙한 칭호도 이미 사라져 있었다.
천무진의 싸늘한 명령에 남윤은 방을 나갔고, 혼자 남은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뱉던 천무진이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봤다. 창문을 통해 바깥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무사하십니까?’
그곳에 가면 죽는다고 말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을 바꾸지 않은 천운백이다. 그러면서 그는 호언장담을 했다.
절대 죽지 않겠다고.
사부는 언제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죽지 않을 거라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알고 있다. 살아서 돌아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다른 이도 아닌 천운백을 죽이기 위해 나섰는데 얼마나 커다란 함정을 준비해 두었겠는가.
백아린을 통해 사부가 생존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백아린 또한 사부의 생존을 알아내는 건 어렵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알아내기 쉽고 어렵고를 떠나 그것에 대해 알고자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게 지금 천무진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알면 천지광까지 알게 될 수도 있다는 걸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천무진은 아무런 것도 묻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야 오히려 모두가 안전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렀고 천무진의 마음은 답답해져만 갔다.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자리에 누웠지만, 결국 심란한 마음으로 인해 눈을 붙이지 못한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차라리 이럴 때는 몸을 쓰는 쪽이 더 낫다는 걸 알아서다.
문을 박차고 연무장으로 향하는 천무진.
그리고 그런 그를 남윤은 억지로 걱정을 삼킨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잠도 자지 않고 하루 종일 연무장에서만 시간을 보낸 탓에 천무진은 무척이나 기진맥진했다.
혼절할 정도로 움직였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 몸은 침상에 눕는 즉시 곯아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그렇지만 천무진은 자신의 방이 아닌 천지광의 집무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방금 전 날아든 연락 때문이었다.
천지광이 갑작스럽게 십천야 전원에게 소집 명령을 내렸고, 그 때문에 천무진 또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모임 장소로 가야만 했다.
잠을 청하려던 계획을 변경하고 땀으로 엉망이 된 몸만 씻은 채 도착한 천지광의 집무실에는 아직 전원이 도착해 있지 않았다.
“여, 왔군.”
반조가 웃는 얼굴로 천무진을 반겼다. 그렇지만 그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채로 비어 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맞은편에 자리한 주란은 불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천무진과 시선이 마주하는 것이 어색했는지 주란이 다른 방향을 향하며 말을 꺼냈다.
“매유검은 왜 매번 가장 늦게 오는 거야?”
“아직 정해진 시간은 안 됐잖아. 곧 오겠지.”
반조의 대답에 주란은 끄덕거리면서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녀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짜증 나.’
천무진은 그녀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불편하고 마음에 안 드는 상대였다.
몇 마디의 대화 이후 다시금 조용해진 집무실 내부에 방금 전 그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매유검이 나타났다.
그는 장포를 펄럭이며 자리에 가서 앉았다.
모두 들어서는 매유검을 향해 잠깐 시선을 주었지만, 그것이 전부였고 누구 하나 먼저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십천야라는 이름 아래에 있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
그렇지만 이들 사이에 동료애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집무실 내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을 무렵.
누군가가 집무실의 입구로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이곳의 주인인 천지광이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그는 언제나 휘장 뒤편으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문으로 다가오는 사람의 정체는…….
덜컹.
집무실의 문을 열고 성큼 들어선 인물은 다름 아닌 자운이었다.
천운백을 죽이기 위해 산동까지 갔던 그가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그의 복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주란이 입을 열었다.
“언제 돌아온 거야?”
“오늘 아침에 돌아왔다.”
“갔던 일은…… 잘된 모양이네.”
말과 함께 주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운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니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주고받는 대화에 조용히 앉아만 있던 천무진이 움찔했다.
자운이 무슨 일을 하러 움직였는지 알고 있는 탓이다.
순간 천무진의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그리고 머리는 쇠망치로 세게 맞은 것처럼 어질거렸다. 앉아 있어서 망정이지, 만약에 서 있었다면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렸을 정도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사부님…….’
사부인 천운백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던 그다.
그랬던 자운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이겠는가?
천무진이 손으로 슬쩍 입 부분을 가렸다.
분노로 인해 비틀리는 안면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동시에 천무진은 분을 참기 위해 이빨을 꽉 깨물었다.
좋다고 웃고 있는 자운과 주란을 보고 있노라니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몸을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생각일 뿐, 막상 천무진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일은 천지광의 명령으로 인해 이루어진 일이었기에 자신은 그걸 거역할 힘이 없었다.
고아였던 천무진에겐 부모님과도 같았던 사람.
그런 그의 죽음에 대해 전해 들으면서도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치도록 싫었다.
그저 이렇게 들끓는 살의를 감추는 것만이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자운 네놈을 반드시 죽인다.’
천운백은 자신에게 돌아오겠다고 했다.
반드시 돌아온다며 약속까지도 했었다.
그렇지만 천운백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런 그를 향해 천무진은 당장이라도 볼멘소리를 토해 내고 싶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그러니까 가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며 말이다.
하지만 그런 불만조차도 이제는 토해 낼 수 없게 된 것이다.
천운백은 죽었으니까.
결국 과거와 똑같아진 사부의 운명에 천무진은 깊은 절망과 분노를 느꼈다.
천무진은 조용히 자신의 손바닥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는 이것밖에 방법이 없을 것만 같았다.
묘하게 변해 가던 천무진의 표정을 느껴서일까?
옆에 있던 매유검이 슬쩍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건 비단 매유검뿐만이 아니었다.
천무진의 스승인 천운백의 일이었으니 자연스레 모두의 관심이 그에게 쏠리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걸 알기에 천무진은 억지로 손을 내리며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동요해서는 안 된다.
패를 드러냈다가는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조차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무표정한 얼굴.
그렇지만 그 이면에서 천무진은 울고 있었다.
처음 사부를 만났던 그 조그마한 꼬마가 되어 천무진은 계속해서 울었다.
참아야만 했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굴어야만 했기에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은 더욱 슬플 수밖에 없었다.
천무진이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이어 나가던 그때, 마침내 마지막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휘장 너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다섯 명이 동시에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내 휘장 안쪽에서 천지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왔구나.”
자운이 임무를 잘 끝마쳤다는 보고만 전해 듣고, 막상 돌아온 그를 처음 마주하는 천지광이었다.
눈엣가시 같았던 천운백을 죽였다는 사실에 천지광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사실 마음 같아선 직접 천운백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이번 생에서 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천무진에게 천룡혼을 받아 보다 빨리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그다.
천운백을 직접 손봐 주는 건…… 다음 생이면 된다.
자신을 향한 부드러운 목소리에 한껏 기분이 들뜬 자운이 소리쳤다.
“보고하겠습니다. 어르신!”
말을 끝낸 그가 곧바로 포권을 취하며 부복했다.
자운이 말을 이었다.
“십천야의 자운, 어르신의 명을 따라 천룡의 숨을 끊고 돌아왔습니다.”
고개를 치켜든 그의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 * *
푸드득, 푸득.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 한 대가 산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길이 넓지 않았기에 그곳을 이동하는 마차 또한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데 마차를 몰고 있는 이는 마부가 아닌 무인이었다.
이십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는 보통 정도의 키에, 외모는 다소 투박하고 덩치는 살짝 있는 편이었다.
무인이기는 하지만 실력도 그리 빼어난 이는 아니었다.
그의 정체는 바로…… 방건이었다.
처음 천무진이 천룡성의 무인이라는 걸 감춘 채로 무림맹에 들어가 몸담았던 곳이 홍천관이다. 그런 그곳에서 함께 지냈던 그가 지금 움직이고 있었다.
홍천관 관주였던 금호의 손에 이끌려 십천야의 실험체가 되었다가 천무진 덕분에 목숨을 구제받았던 방건은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문파인 옥수문에서 지내고 있었다.
천무진 덕분에 목숨을 구제받았고, 이후 천룡성의 비밀 거점에 숨겨 둔 채로 치료까지 해 줬다.
천무진이 손을 써 준 덕분에 이제는 무림맹 때와 달리 평범하면서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랬던 그가 갑자기 문파의 사람 하나 대동하지 않은 채로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것도 직접 마차를 몰면서 말이다.
방건이 들어선 곳은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 된 협곡이었다.
사실 말이 협곡이지 이제는 폭발로 인해 아예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 버린 장소였다. 더는 마차로 움직일 수 없었기에 방건은 마부석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엉망으로 변해 버린 그 공간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폭발이 일었던 건 역시 여긴데…….’
대지를 울릴 정도의 커다란 폭발이 있었고, 그것이 어디였는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이 인근이 박살이 나 있었으니까.
커다란 화산 구멍이라도 된 것처럼 움푹 파여 있는 길을 걸으며 방건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뭔가를 찾는 것처럼 말이다.
방건은 계속해서 주변을 더듬거리며 힘겹게 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워낙 범위가 넓어서 시간이 꽤나 소모되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꼼꼼하게 주변을 확인했다.
그런데 길 위를 걷는 내내 방건은 주기적으로 이상한 행동을 해 댔다. 조그마한 병을 꺼내 그 안에 담긴 향수를 자신의 손등에 조금씩 묻혀 대고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 그리고 또 전혀 알기 어려운 이곳을 찾아온 것까지. 누가 본다면 의심을 할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넓게 펼쳐진 공간 위에는 사실 아무런 특별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폭발로 인해 나무고 돌이고 남아난 것이 없을 정도로 모두 가루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로지 흙만이 가득한 그곳을 걸으며 방건은 아주 중요한 뭔가를 찾으려는 듯 보였다.
그렇게 무려 두 시진 가까이를 흙만 가득한 공간 위를 걸어 다니던 방건은 힘겹게 허리를 폈다.
“흐아!”
날이 추웠지만,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제법 지쳤지만 아직까지도 그는 포기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소매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낸 방건이 안에 넣어 두었던 자그마한 병을 다시금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그 병의 뚜껑을 열어 막 손등에 향수를 뿌리는 바로 그때…….
덥석.
“으아악!”
소스라치게 놀란 방건이 손에 들린 병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이내 당황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자신의 발아래였다.
아무것도 없는 흙.
그리고 그 흙 아래에서 뻗어져 나온 손 하나가 방건의 발목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