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유인 ― 함정이군 (2)
빈 장원에 홀로 앉은 백아린은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그마한 장원에는 그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고,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인지 별다른 물건 또한 보이지 않았다.
장원 내부에 있는 가장 큰 방에는 허름한 탁자와 의자 두 개가 있었고, 백아린은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의자에 기대어 앉은 그녀가 슬쩍 바깥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늦는데.’
약속 시간에 맞춰 왔거늘 오늘 이곳에서 보기로 한 상대는 아직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의문을 가질 무렵.
백아린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아직 도착한 것은 아니지만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선이 입구로 고정됐고, 이내 문이 열리며 바깥에서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던 백아린이었기에 도착한 상대를 곧장 확인할 수 있었는데……
모습을 드러낸 상대를 확인한 그녀가 꿈틀했다.
상대의 모습이 다소 기이했기 때문이다.
긴 장포를 눌러 써서 얼굴을 가린 상대가 방 안으로 서둘러 들어서며 포권을 취했다.
“이런,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상대의 말투는 어눌했다.
순박해 보이면서도 선한 어투는 얼굴을 가린 겉모습과는 달리 사람의 긴장을 풀어지게 만들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백아린은 얼굴을 보이지 않는 상대의 외관을 가볍게 훑고는 이내 답했다.
“오늘 이곳에서 뵙기로 한 분인가요?”
“예, 우선 이걸.”
말과 함께 다가온 상대가 서찰을 내밀었다. 서찰에는 백아린이 가지고 온 것에 찍혀 있는 것과 똑같은 나비 모양의 인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까지 확인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들었던 서찰을 되돌려 줬다.
그렇게 신분을 확인한 상태에서 상대가 입을 열었다.
“누군가 오신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들어와서 잘못 온 게 아닌가 하고 두리번거렸을 정도였습니다. 하하.”
분위기를 좋게 하려는 듯 백아린에 대한 칭찬을 쏟아 내는 상대.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백아린이 답했다.
“과찬이십니다. 그보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물건은 확인하러 갔고, 뭔가 받아 와야 할 게 있다던데요.”
“아, 잠시만요. 그걸 어디에 뒀더라.”
백아린의 말에 품을 뒤적이던 상대는 이내 안쪽에서 천으로 말아 둔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그걸 백아린을 향해 내밀며 입을 열었다.
“우선은 이걸 보시고…….”
말과 함께 백아린에게 손을 뻗던 상대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졌다.
휘익!
쉭!
천 안에 숨겨 둔 단검을 꺼내 든 상대는 곧장 그것을 백아린의 얼굴을 향해 내리찍었다.
무방비하게 서 있던 상태에서 갑자기 날아든 공격!
하지만…….
파앙!
날아들던 그의 공격을 백아린이 손등으로 쳐 냈다. 동시에 공격을 펼쳤던 상대가 빠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서 거리를 벌렸다.
가볍게 공격을 막아 낸 백아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를 바라봤다.
참으로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암습을 펼친 당사자가 놀라고, 막상 당한 쪽은 무덤덤한 얼굴로 자리하고 있는 지금 이 모습이.
백아린에게 공격을 펼쳤던 상대, 그는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를 죽이기 위해 온 매유검이었다.
매유검은 아직도 얼얼한 손의 감각을 느끼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야. 정말…… 제법이잖아.”
장포 안에 감춰져 있는 매유검의 눈동자가 빛났다.
아슬아슬하게 막아 낸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이 공격을 해 올 걸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미리 방비가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백아린이 그제서야 표정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당신 십천야야?”
“맞아.”
아까의 순박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말투는 어느새 평소 그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매유검의 대답을 들은 백아린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상대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십천야가 자신에게 공격을 가해 왔다는 것.
그것이 지닌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결국 날 적으로 간주하고 죽이겠다고 나선 건가? 갑자기?’
십천야 쪽에서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충분히 이용 가치가 있었고, 그들의 눈 밖에 날 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생각했다.
그랬기에 대략 한 달 이상 무탈하게 그들의 일을 도와오지 않았던가.
그러던 중 갑자기 십천야에서 자신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지금은 알 방도가 없었다.
천무진을 도와야 하는 상황에서 십천야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것이 답답했지만…….
백아린이 곧바로 말했다.
“당신이 매유검이겠네.”
“뭐야? 어떻게 알았지?”
재미있다는 듯 물어 오는 매유검을 향해 백아린이 곧바로 답했다.
“하는 짓거리가 영 비겁한 게 그 사람한테 들은 당신이랑 딱 맞는 것 같아서.”
“……그러는 너도 재수 없는 게 꼭 그놈을 닮았군.”
“어라? 기분 나쁘게 만들었나 보네. 그럼 애초 내 계획이 제대로 성공한 거고.”
놀리는 듯한 백아린의 말투에 매유검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은근히 성질을 건드리는 상대다.
그렇지만 매유검은 최대한 흥분하지 않았다.
이깟 도발 따위는 갚아 주면 그만이니까.
매유검은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백아린이 있는 방향을 향해 휙 하고 내던졌다.
피잉!
백아린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단검은 백아린의 옆을 지나쳐 가서 벽에 틀어박혔다.
애초부터 자신을 노린 공격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이처럼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담담한 모습이 다시 한번 매유검의 심기를 건드렸다.
단검을 던진 그의 손에는 어느새 검 한 자루가 들려져 있었다.
매유검이 말했다.
“그럼 어디 그 떠드는 입만큼 실력도 되나 한번 확인해 볼까?”
백아린을 죽이기 위해 이곳으로 왔고, 저 잘난 입으로 떠들어 댄 대가는 곧 받아 낼 생각이었다.
상대의 모습을 보며 백아린 또한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스르르릉.
커다란 대검이 백아린의 손바닥 위에 자연스레 자리했다. 가녀린 체구의 여인, 그렇지만 세상의 그 누구보다 이 커다란 대검이 잘 어울리는 무인이기도 했다.
대검을 든 백아린의 몸에서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풍겨져 나왔다.
그녀가 대검을 든 채로 매유겸을 향해 까닥였다.
“덤벼.”
상대의 도발에 매유검의 몸에서 기운이 폭발했다.
그리고…….
콰아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던 건물이 산산조각 나며 그 잔해가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동시에 부서지는 건물 안쪽에서 두 사람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슈슈슈슉!
매유검의 몸이 허공에서 빠르게 백아린을 향해 접근해 가더니, 이내 손에 들린 검이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뻗어지는 검은 뱀처럼 백아린을 감으며 들어왔고 공격 하나하나에는 날카로운 검기가 마치 실처럼 이어져 파고들었다.
밀려드는 공격을 보며 백아린은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그녀의 대검이 팽이처럼 돌며 밀려드는 모든 공격을 받아쳤다.
카카캉!
시원한 소리와 함께 검이 밀려 나가는 그 순간.
매유검이 허공에서 방향을 비틀며 더욱 빠르게 움직이더니, 이번엔 아래로 하강했다.
순식간에 바닥에 착지한 그의 손이 움직였다.
드드드득!
그의 검이 허공으로 치솟는 찰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바닥의 땅이 갈라지며 균열이 생긴 그대로 위를 향해 솟구친 것이다.
파앙!
백아린의 아래를 노리고 펼친 공격.
밀려드는 성난 대지를 확인한 백아린의 선택은 간단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대검이 움직였다.
서컹!
소리와 함께 밀려오던 땅이 잘려 나갔다. 이번엔 허공에서 백아린의 공격이 이어졌다.
우우웅.
울려오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검기가 유성우처럼 쏟아졌다.
파파파파팡!
매유검이 재빠르게 옆으로 이동하며 공격을 피해 내는 사이 백아린 또한 바닥에 착지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멈추지 않았다.
다다다다닷!
매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그녀의 대검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빠르고 강렬한 공격. 매유검은 빠르게 검을 세워 들고 날아드는 공격을 받아 냈다.
그렇지만 그 힘이 워낙 강했던 탓인지 매유검의 몸이 뒤로 붕 뜨며 밀려 나갔다.
동시에 백아린의 몸에서 폭발하듯 밀려 나온 무형의 기운이 주변을 뒤덮었다.
그것은 흡사 벼락처럼 위에서 아래로 꽂혔다.
퍼퍼퍼펑!
연달아 쏟아지는 폭발 속에서 매유검은 서둘러 좌우로 몸을 비틀며 거리를 벌렸다.
잠깐의 격돌.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이미 주변은 엉망이었다.
땅은 들쑥날쑥했고, 곳곳에 커다란 구멍들이 생겨나 있었다.
그런 엉망인 대지 위에 마주 선 상태에서 매유검이 슬며시 소매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떼어 낸 소매에는 붉은 피가 묻어 나와 있었다.
장포로 가려져 보이진 않았지만 매유검의 눈동자는 이미 놀람으로 가득했다.
방금 전 있었던 격돌.
공격을 받아 내긴 했지만 밀려든 힘 때문에 입으로 소량의 피가 터져 나온 것이다.
매유검은 그제야 여태까지 들어온 그 말들의 의미를 체감할 수 있었다.
왜 반조가 이 여자를 조심하라고 했는지.
어째서 천무진이 죽고 싶다면 이 여인과 싸워 보라고 조롱했는지도.
이 백아린이라는 자.
매유검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고수였다.
자신이 먼저 피를 토해 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매유검은 이를 갈았다.
부드득.
동시에 눈앞에 있는 상대를 향한 살의는 더욱 크게 치솟았다. 자신이 이렇게 피를 토해 내게 만든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리라.
그때 다시금 달려들려던 백아린이 멈칫했다.
‘치잇, 역시 혼자가 아니었던가.’
처음 싸움을 시작할 때만 해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작은 소란이 일기 시작하자 어느샌가 구름떼처럼 수많은 이들의 기척이 주변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혼자 상대할 것처럼 굴더니 그게 아니었나 봐?”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한 인원들이 이미 장원 바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그 숫자가 최소 몇백 명은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다. 더군다나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들.
지금 이곳을 포위한 자들은 그저 머리 숫자만 채운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었다.
대단한 실력자들.
그런 이들이 백아린 하나를 죽이기 위해 이곳을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눈앞에 있는 매유검이라는 존재.
거기다가 지금 주변에 나타난 엄청난 숫자의 무인들까지.
언제나 자신만만한 백아린이지만…….
‘쉽지 않겠는데.’
사실 쉽지 않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만큼 최악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휘리릭!
장원의 담장 위쪽으로 모습을 드러낸 노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백아린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 노인의 정체를 알아차린 탓이다.
‘우내이십일성 추풍량?’
최악보다 더한 최악이 있다는 사실에 백아린은 헛웃음이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실로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우내이십일성의 한 명과 십천야의 매유검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걸로 모자라 수백에 달하는 무인들까지 적이다.
주변을 스윽 둘러보는 백아린의 눈가가 슬며시 떨려 왔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
덩달아 그녀는 자신과 떨어진 한천에 대한 걱정이 밀려들었다.
차라리 이들이 노리는 것이 자신만이라면 좋을 텐데 지금 분위기를 보면 결코 한천 또한 그냥 놔두지는 않았을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그런 그녀의 상념을 깬 것은 다름 아닌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던 매유검이었다.
까앙!
검으로 바닥을 후려치며 분노를 표출한 그가 매서운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매유검이 소리쳤다.
“백아린! 어디를 보고 있는 거냐! 네 상대는 바로 나다!”
그는 마치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주변을 확인하는 백아린의 모습에 재차 화가 치밀어 올랐다.
쏟아지는 투기에 백아린은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살아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현재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천운이 따르지 않고서야 지금 이곳에서 살아 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결국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지 않은가.
스윽.
백아린이 자세를 잡았다.
싸운다.
그리고 계속해서 싸운다.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울 뿐이다.
적이 쓰러지든 자신이 쓰러지든 결국 양쪽 중 하나가 남을 때까지.
그래야만 끝이 나는 싸움이니까.
자세를 잡는 백아린의 모습에 한껏 흥이 오른 매유검이 소리쳤다.
“박살을 내 주지! 그러니…….”
그가 막 외치고 있는 그때 백아린이 갑자기 매유검을 뒤로한 채로 몸을 돌렸다.
갑작스러운 모습에 매유검이 움찔하는 순간이었다.
백아린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타다다닷!
백아린이 향한 곳.
놀랍게도 그녀는 이곳을 포위하고 있는 수백에 달하는 무인들 사이로 날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