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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64화 (263/293)

264화. 선택 ―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2)

반조가 목에 가져다 댔던 손을 떼며 감탄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이거 점점 더 궁금하게 만드는데.”

천무진 일행 중 한천이라는 사내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가 적화신루의 일개 부총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실력을 지녔다는 것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반조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저 생각보다 대단하고, 이름값에 비해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 뿐이지 자신의 관심을 끌 만한 상대는 아니라 생각했으니까.

그랬기에 얼마 전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이름조차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평소 실실 웃고 다니던 때와는 확연하게 달라지는 이 분위기는 그가 보통 사내가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이 사내의 모든 것이 궁금했다.

진짜 정체도, 그리고 온전한 실력까지도.

그러기 위해서는…….

스윽.

반조가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든 그에게서 칼날 같은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반조의 모습. 하지만 그는 오히려 검을 위쪽으로 추켜올렸다.

반조가 소리쳤다.

“상대는 강하다! 방심하지 말고 상대해라!”

그의 선택은 백아린과 일대일 대결을 하려 했던 매유검과는 달랐다.

반조 또한 무인이기에, 이런 강한 상대를 앞에 두면 피가 끓어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는 냉철한 사내였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확실하게 숨통을 끊을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반조의 외침과 함께 숲 속에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던 혈기군단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 왔다.

파파팡!

수십여 개의 암기들이 한천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공격에 당할 한천이 아니었다.

그의 신형이 날아드는 암기들 사이사이에서 마치 귀신처럼 모습을 비쳤다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들어오는 그의 보법을 보며 반조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하던 그때.

부우웃!

허공을 찢는 소리와 함께 한천의 검이 가까이에 위치해 있던 혈기군단의 선발대를 향해 치고 들어갔다.

날카로운 그의 검이 앞에 있던 상대의 목을 긋고 스쳐 지나갔다.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스슥, 스슥.

한천이 움직일 때마다 근처에 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한천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반조는 그의 독특한 싸움 방식에 집중했다.

한천이 상대를 제압하는 방식은 간결했다.

큰 동작이나 파괴적인 내공으로 상대를 짓누르기보다는 적재적소에 필요한 움직임을 섞는다. 그것만으로 상대에겐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자신은 유리한 위치를 점한다.

‘싸우는 방식이 일반 무인은 아니야. 그렇지만…… 살수도 아닌데.’

중원에서 저런 식의 무공은 찾아보기 어렵다.

파괴적이고 현란한 무공이 대부분이다.

물론 빠름에 중점을 둔 쾌검 같은 것들도 있었지만 지금 한천이 펼치는 싸움과는 다소 느낌이 달랐다.

은밀하고 빠르게.

그것만 놓고 본다면 살수를 연상하게 되겠지만 분명 그 또한 아니었다.

한천의 무공은 살수의 것이라 보기에는 무게가 있었고, 또한 기의 흐름 또한 명문정파의 것처럼 정갈했다.

겉으로 뽐내기보다는 상대를 제압하는 데 중점을 둔 실용적인 검술.

그리고 저런 검술을 쓰는 곳이라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반조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한 곳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중얼거렸다.

“군부(軍部)?”

무림과 황실은 서로 간섭하지 않지만 그들의 무공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랬기에 반조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이런 종류의 무공이라면 황궁 쪽의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반조가 한천의 무공에 대해 알아차리는 사이. 쉼 없이 상대를 베어 넘기던 한천의 검이 다음 목표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 빠르지 않다 느꼈거늘, 검이 어느새 상대의 가슴팍에 가 닿았다.

“어…….”

놀란 상대가 그저 탄성을 내지르며 무방비하게 목숨을 내놓으려는 그 순간.

카앙!

옆에서 날아든 검 한 자루가 한천의 공격을 밀쳐 냈다. 순간 몸의 균형이 무너진 한천이 옆으로 몇 걸음 물러서며 다시 자세를 잡을 때였다.

검이 날아든 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주가 제법이오.”

“…….”

한천은 차가운 눈빛을 한 채 자신에게 말을 던져 온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사십 대 중반의 평범한 외모.

그렇지만 그 실력 하나만큼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내.

혈기군단을 이끄는 단주 야율인이었다.

파앙!

그가 손을 가볍게 휘젓는 순간 양쪽에서 혈기군단의 무인들이 한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달려드는 기습에 한천이 막 그들을 향해 검을 움직이려는 찰나.

부우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정면에 있던 야율인이 무섭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의 두 손바닥에서 하얀빛이 쏟아졌다.

양옆에서 달려드는 이들의 공격을 받아 내려던 한천이 다급히 움직임에 변화를 줬다.

정면에서 들어오는 야율인의 공격을 받아 내기 위해서였다. 양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은 옆으로 움직이는 것만으로 피해 냈고, 이내 밀려드는 야율인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순간 폭발이 일었다.

퍼엉!

“큭!”

한천의 몸이 뒷걸음질 치는 사이 어느덧 그의 뒤편으로 혈기군단의 다른 무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쉭쉭!

세 명의 검이 한천의 등을 노리고 빠르게 다가왔다.

이미 이런 방식의 싸움이 익숙한지 기다렸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한천은 손목에 이는 고통을 참아 내며 곧장 뒤편으로 검을 움직였다.

차라라랑!

세 자루의 검을 쳐 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들의 다른 손에는 어느덧 짧은 단검들이 들려 있었다.

퓩퓩퓩.

빈틈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공격에 한천은 서둘러 어깨로 상대를 밀쳐 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 명의 공격은 제대로 피해 내지 못한 탓에 결국 등 뒤에 긴 상처가 생겨나고야 말았다.

찌이익.

옷이 찢어졌고, 동시에 등 뒤에서 화끈거리는 감각이 일었다.

한천은 자신의 등을 베고 지나간 상대의 목을 곧바로 발로 걷어찼다.

뻐억.

소리와 함께 상대는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황급히 손으로 등을 어루만지며 뒤로 물러선 한천의 눈은 정면에 위치한 야율인에게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개입으로 인해 많은 숫자의 적들을 상대하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던 흐름이 깨졌다.

반조를 제외하고 이런 고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한천이었기에 지금 이 상황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한천은 슬쩍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방금 전의 공격.

사실 그 공격도 이 오른손만 멀쩡했다면 절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천의 오른손은 엉망이었고, 일상생활을 할 때가 아닌 이런 순간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한천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시간을 끌리고 있을 여유는 없어.’

어떻게든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빠져나가 백아린과 합류해야 했다.

그렇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혈기군단과 그들을 이끄는 야율인. 그리고 반조까지 한천을 막아서고 있었으니까.

순간 멀리에 자리하고 있던 야율인이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꽤나 기다란 창이었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창보다 대략 두 뼘 이상은 더 긴 길이.

황실의 대장군이었던 한천이기에 창에 대해서는 꽤나 빠삭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지금 야율인이 들고 있는 저런 식의 창은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긴 길이만이 아니다.

창의 뒷부분이 마치 칼날처럼 되어 있어서 뒤쪽으로 가격당한다 해도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앞과 뒤가 모두 위협적인 무기.

모양새나 구조는 창의 형태지만 어쩌면 봉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휘두르는 식의 무공을 펼칠 공산이 컸다.

창을 강하게 움켜쥔 야율인이 주변에 포진해 있는 수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 조와 삼 조, 그리고 사조는 폭쇄진(爆鎖陣)을, 육 조는 팔각미로진(八角迷路陣)을 펼치고 좁혀 들어간다. 나머지는 내 움직임에 따라 반응할 수 있도록.”

야율인의 명령에 한천을 포위하고 있던 인원들이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사실 야율인은 직접 싸움에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상대는 고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런 상대에 자신까지 나설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이 바뀌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반조를 향한 한천의 공격에 놀랐고, 이내 그가 자신의 수하들을 휩쓸어 버리는 모습까지 봤다.

결국 야율인은 보고 있기만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한천의 주변에서 순식간에 폭쇄진과 팔각미로진이 펼쳐졌다.

폭쇄진을 펼치는 세 개 조는 각각 열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팔각미로진을 담당하는 육 조는 열다섯 명의 인원이었다.

그렇게 마흔다섯 명의 무인들이 한천을 진법 안에 가둔 채 주변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역시나 그 안에서 고고하게 서 있는 야율인이었다.

그가 창을 곧추세운 채로 말했다.

“시작한다.”

말과 함께 주변의 기운들이 한천을 향해 쏟아졌다.

콰콰쾅!

커다란 진법의 회오리 속에서 공격들이 사방팔방으로 날아들었다. 그 순간 한천 또한 앞으로 몸을 날렸다. 공격들 사이를 파고들며 한천은 곧장 야율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앙!

두 개의 병기가 맞닿는 순간.

한천과 야율인의 무기가 서로를 향해 미칠 듯이 몰아쳤다.

카카카캉!

주변으로 불꽃이 튀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터져 나온 충격파로 인해 주변의 공기가 확 하고 밀려 나갔다.

이내 야율인이 창을 강하게 바닥에 꽂아 넣었다.

쿠웅.

진동과 함께 충격파가 파도처럼 밀려 나갔다.

한천이 그 공격을 피하기 위해 뒤로 성큼 뛰어나가는 순간.

옆쪽에서 기다렸다는 듯 수십여 개의 검기들이 파고들었다.

한천은 서둘러 검로를 바꾸며 날아드는 검기들을 받아 내야만 했다. 그사이 반대편에서도 그를 향해 무인들이 다가서고 있었다.

카앙! 캉!

한천이 연달아 날아드는 공격들을 검으로 받아 냈고, 이내 그가 미친 듯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그의 신형이 움직이는 길을 따라 포위한 채로 공격해 들어오던 진법 또한 그의 움직임에 함께 흔들렸다.

푸슉!

혈기군단의 무인 두 명이 동시에 피를 쏟으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그 순간 야율인의 창이 성난 황소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카카카카캉! 캉!

가까스로 받아 낸 한천의 몸이 마구 뒤로 밀려 나갔다.

그렇게 야율인의 창을 어렵게 받아 내는 순간 옆쪽에서 다시 한번 공격이 쏟아졌다.

다만 문제는…… 그 공격이 오른쪽에서 밀려들고 있었다는 거다.

‘이런 젠장.’

다가오는 공격을 바라보며 한천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최대한 비틀어 대부분의 공격을 빗겨 냈지만, 결국 피하지 못한 장력 하나가 그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한천의 몸이 꺾이듯 휘어지며 반대편으로 밀려 나갔다.

“으윽.”

주춤거리며 다시 자세를 잡은 한천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한천이 공격에 당하자 오히려 야율인이 당황했다.

분명 자신들의 합공이 날카롭긴 했지만, 적어도 지금 자신이 손을 섞고 있는 상대가 당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한천의 눈은 이미 쏟아지는 공격을 완벽히 읽고 있었다.

그런데 당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 상황에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던 야율인의 시선이 검을 쥔 채로 서 있는 한천을 살폈다.

왼쪽 손으로 검을 든 좌수검.

처음엔 특이하다 싶었을 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부분이었는데…….

야율인이 움찔했다.

‘설마……?’

뭔가가 떠올랐는지 야율인은 곧바로 한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고는 그곳에 있는 수하들 중 한 명에게 전음을 날렸다.

『오른쪽이다. 저자의 오른쪽을 집중 공략해.』

명을 날린 야율인은 곧장 한천의 왼쪽으로 움직였다. 그의 손에 들린 창이 다시금 한천을 찔러 들어갔다.

장력을 허용하며 내상을 입은 한천이었지만 야율인의 공격에 재빠르게 반응했다.

밀려드는 창을 받아 냈고, 동시에 번개처럼 검로를 바꿨다.

쩌엉!

검을 막기 위해 야율인은 서둘러 창을 회전시키며 공격을 받아 내야만 했다. 이내 밀려 나가는 야율인을 향해 한천이 다가서려는 그때였다.

양쪽으로 혈기군단이 밀려들며 야율인에게 공격을 가할 기회를 막았다.

한천이 멈칫하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그들을 먼저 베어 넘겼다.

촤악! 촤악!

사방으로 피가 튀어 오르는 그 사이에서 다시 한번 야율인의 창이 파고들었다.

쩌엉!

커다란 소리가 주변으로 울려 퍼지는 그때였다.

여태까지 똬리를 틀고 있던 팔각미로진이 한천의 오른쪽을 노리고 밀려들었다.

팔각미로진은 여덟 개의 방향으로 치고 들어가는 협공술이었다.

평소였다면 아무리 불편한 오른쪽이라고 한들 막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왼쪽을 야율인이 압박하고 있었고, 그를 막아 내면서 오른쪽으로 파고드는 모든 공격을 무위로 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날아드는 검을 발로 차 내고, 최대한 몸을 움직이며 공격을 흘려 보내긴 했지만, 팔각미로진은 그리 피한다고 해서 끝이 나는 진법이 아니었다.

이윽고 그 안에 자리한 열다섯 명의 무인들에게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하나가 되어 휘몰아쳤다.

콰콰콰쾅!

성난 파도가 되어 밀려드는 공격에 휩쓸린 한천의 신형이 마구 흔들렸다.

그리고…….

퍼퍼펑!

폭발 속에서 튕겨 나온 그가 땅에 내팽개쳐지듯 던져졌다. 바닥을 구른 그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힘겹게 벌린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쿨럭.”

피를 토하는 와중에서도 한천의 시선은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상을 입은 사이 이어질 다음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야율인은 곧바로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피를 토하고 있는 한천을 바라보며 이내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했는데 내 생각이 맞았군. 당신…… 오른팔을 못 쓰는 모양이오.”

야율인의 그 말에 한천은 물론이고, 거칠게 몰아붙이는 혈기군단의 싸움 방식을 방관만 하고 있던 반조조차 놀란 듯 움찔했다.

야율인이 감탄했다.

“대단하오. 처음부터 좌수검이었던 게 아니라 오른팔을 못 써서 왼손으로 검을 든 거였다니.”

“…….”

이어지는 칭찬에도 한천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다.

오른손을 못 쓰는 것보다, 그 사실이 적들에게 노출되었다는 게 더욱 큰 문제였으니까.

이제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을 알았으니 저들은 계속해서 오른쪽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올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결국 이 싸움의 승패가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한천의 손이 천천히 가슴팍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이내 그는 품 안에 감춰 뒀던 자그마한 전낭을 꺼내어 들었다.

하지만 전낭 안에 들어 있는 건 돈이 아니었다.

모습을 드러낸 건 새카만 단환 하나, 바로 의선을 통해 전달받았던 귀명신단이었다.

아주 잠시지만 고통을 잊게 만들고, 신체의 능력을 증가시키는 금지된 단환.

한천은 그 귀명신단을 꽉 움켜쥐었다.

알고 있다.

이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정도는.

최악의 경우 죽게 될 것이고, 운이 좋아 산다고 한들 폐인이 될 확률이 높다. 그리고 약 기운이 사라진 후에는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알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이 귀명신단을 받을 때부터 오늘을 예상하지 않았던가.

백아린을 위해 언젠가는 자신의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해 왔던 한천이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 되었을 뿐이다.

어차피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운명.

한천에게는 언제나 자신보다 백아린이 더 소중했다.

단 한 명의 가족조차 없는 한천에게 그녀는 마치 딸과 같은 존재였다.

아무것도 없었던 자신에게 빛이 되어 준 아이.

그 빛을 위해서라면…… 이런 목숨 따위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고통? 죽음?

사람인 이상 두려운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가 한천의 의지를 뒤흔들 순 없었다.

슬쩍 하늘을 올려다본 그가 입을 열었다.

“뭐, 아무렴 어때.”

한천은 손에 들린 귀명신단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입안에 쑤셔 넣었다.

목구멍을 타고 느껴지는 뜨거운 기운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후회는 없었다.

고개를 치켜든 그가 피투성이인 이를 드러낸 채로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설령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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