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각오 ― 그 사람을 위해서 (1)
백아린은 자신과는 달리 완벽한 잔마폭멸류를 완성시킨 매유검의 모습에 순간 동요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 무공은 천무진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리고 천무진은 이 무공을 저번 생에서 십천야를 통해 알게 됐다. 그러니 그들의 손에 잔마폭멸류가 있다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 지금 문제는 상대가 자신보다 더욱 완벽한 상태를 구현했다는 거다.
백아린은 이를 악물었다.
‘아니, 진짜는 이쪽이야.’
잔마폭멸류 자체는 훨씬 오랜 시간 그걸 익혀 온 매유검 쪽의 것이 완성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애초에 잔마폭멸류의 적통을 이은 건 백아린이었다.
잔마폭멸류는 백 년 전의 인물인 풍운무정검의 무공. 그리고 백아린은 그의 무공의 명맥을 이어오는 당사자였으니까 말이다.
풍운무정검의 무공은 검왕에게 전수되었고, 그걸 백아린이 배웠다. 그랬기에 백아린과 매유검의 무공은 같은 잔마폭멸류라고 해도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 근간이 되는 내공심법의 차이다.
순간 숫자에 압도당했던 백아린은 마음을 정리하고 거침없이 손을 움직였다.
후우웅!
허공으로 날아올랐던 열여덟 개의 검은 검기들이 매유검을 향해 쏟아졌다. 도발적인 언사로 백아린의 심기를 흔들려 했던 매유검은 침착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잔마폭멸류를 뿌리는 그녀의 모습에 짧게 혀를 찼다.
“쯧.”
무인들의 싸움은 아주 자그마한 차이로 승패가 갈리곤 한다. 그랬기에 그녀에게 조금의 망설임이나 두려움이 있었다면 이 격돌의 결과는 생각보다 쉽게 정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아린의 눈빛에서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더는 머뭇거릴 수 없었기에 매유검 또한 서둘러 잔마폭멸류의 기운을 쏘아 보냈다.
두 개의 힘이 서로를 향해 얽히듯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잔마폭멸류들이 충돌하는 순간 그것을 펼친 두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충격파가 전달될 수밖에 없었다.
퍼엉! 펑!
연이은 폭발과 함께 백아린과 매유검이 각자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퓨퓨퓻!
두 사람의 옷이 마구 휘날렸고, 둘은 곧장 앞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밀려드는 강렬한 충격파를 받아 내기 위해서였다.
백아린과 매유검의 주변으로 피어오른 호신강기.
그리고 잔마폭멸류의 기운은 둘을 넘어 인근에 있던 적풍대 무인들까지 휩쓸었다.
콰콰콰쾅!
폭음과 함께 주변에 있던 이들이 견뎌 내지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나마 충격파의 범위에서 빠르게 빠져나가 제법 거리를 벌린 추풍량이었지만 그조차도 서둘러 손바닥에 내력을 집중시켜 간신히 기운을 받아 냈다.
범위를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충격파에 추풍량은 인정사정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운 그가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
“…….”
추풍량의 안색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휩쓸렸던 적풍대 무인들이 모조리 최후를 맞이한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위험 범위에서 벗어났고 호신강기를 끌어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엉망이 되어 버린 손은 지금 이 둘의 격돌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자신의 손 가죽이 찢겨 나간 걸 보는 추풍량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 또한 우내이십일성의 한 명으로 중원을 호령하는 괴물 중 하나였지만…….
‘이 둘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치켜든 추풍량의 시선에 버티고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멀리 떨어져 있던 무인들까지 휩쓸려 버릴 정도의 충격파가 터져 나왔거늘, 막상 그걸 정면으로 받은 두 사람은 아직까지 건재한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아린이나 매유검 두 사람 모두 완전히 멀쩡하지는 못했다.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호신강기를 불러일으킨 덕에 그나마 충격을 완화시키긴 했지만…….
“흐읍.”
“큭!”
백아린과 매유검이 동시에 짧게 숨을 내뱉었다.
짧은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켜 세우던 백아린이 비틀했다. 그녀의 꽉 다문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잔마폭멸류는 엄청난 내공 소모가 있는 파괴적인 무공이다. 그런 무공끼리 충돌했으니 그 여파가 있는 건 당연했다.
거기다가 매유검은 백아린보다 훨씬 긴 시간 이 무공을 익혀 온 탓에 더욱 완벽한 경지에까지 오른 상태.
사실 원래대로였다면 더 큰 부상을 입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다만 숙련도에는 미치지 못했을지언정 가장 적합한 내공심법을 익힌 덕분에 그 하나하나의 파괴력은 백아린이 한층 위였다.
덕분에 매유검과의 대결에서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들끓는 속을 억지로 누르며 백아린이 쥐고 있던 대검을 더욱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녀가 날아올랐다.
콰콰쾅!
몸과 함께 정면으로 움직인 대검에서 막대한 강기가 가닥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그에 매유검이 장포 자락을 휘날리며 반격했다.
둘의 격돌에 주변 광경이 순식간에 피폐하게 변해 갔다.
그 상황에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던 추풍량이 이내 손바닥에 내력을 집중시켰다.
가능하면 이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았지만…….
‘길어질수록 피해를 보는 건 나다.’
지금 이 싸움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두 사람의 공격에 휘말려 죽어 나가고 있는 적풍대였다. 그리고 적풍대가 피해를 본다는 건 곧 그들을 이끄는 수장인 추풍량의 힘이 약해진다는 의미였다.
십천야 내에서 보다 높은 위치에 오르고 싶은 그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적풍대가 그의 뒷받침이 되어 줘야 했다.
그랬기에 추풍량은 최대한 빠르게 이 싸움을 매듭짓기로 결정을 내렸다.
추풍량이 검을 섞고 있는 두 사람 쪽으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의 손바닥이 백아린의 옆구리를 덮쳤다.
파앙!
손바닥에 맺힌 회색빛 기류.
기류에 휩싸인 손이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은밀하게 움직였지만 이미 극도로 집중한 채 매유검과 싸워 대던 백아린이다. 추풍량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대검이 폭풍처럼 휘둘러졌다.
커다란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력!
파아앙!
울려 퍼지는 굉음과 함께 주변의 땅들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땅들을 향해 추풍량이 손을 움직였다.
콰콰콰쾅!
손바닥에서 뿜어진 장력이 곧장 대지를 삼키며 백아린을 향해 밀려들었다. 그녀는 그대로 대검을 십(十)자 형태로 그었다.
유마십자성(柳魔十字星)이라는 초식이었다.
커다란 대검의 움직임에 맞춰 공기가 갈라졌다.
동시에 허공이 일렁였다.
추풍량의 눈동자가 흔들림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그가 뻗어 낸 장력을 가르면서 매섭게 밀려들었다.
“크으읏!”
추풍량이 황급히 내공을 끌어올려 백아린이 뿜어낸 공격을 손바닥으로 쳐 냈다. 그렇지만 그 힘에서 차이가 있어서인지 추풍량의 팔뚝에는 긴 상처와 함께 피가 뿜어져 나왔다.
바로 그때 백아린의 반대편에서 매유검이 파고들었다.
백아린 또한 서둘러 움직였지만…….
서걱.
옆구리를 베고 지나가는 화끈한 감각. 거기에 보다 깊게 밀고 들어오려는 공격을 느낀 백아린은 서둘러 팔을 휘둘렀다.
팔꿈치가 매유검의 얼굴에 적중했다.
얼결에 얼굴 정중앙에 타격을 입은 그가 비틀거렸다. 백아린은 피가 쏟아지는 와중에서도 곧바로 대검을 휘둘러 매유검의 목을 노렸다.
부웅!
아슬아슬하게 매유검이 피해 내는 바로 그 순간!
백아린이 슬쩍 몸을 뒤로 날리며 곧바로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손은 피를 뿌리며 주춤거리고 있는 추풍량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백아린의 모습에 매유검의 공격으로 잠시 숨을 돌리며 방심하고 있던 추풍량이 당황했다.
‘이런 젠장!’
추풍량이 서둘러 손을 날카롭게 세워 백아린의 배를 향해 찔러 넣었다.
그러나 추풍량의 손가락이 백아린의 배를 꿰뚫으려는 찰나, 그녀의 손이 먼저 도착했다.
뻐억!
그녀의 주먹이 정확하게 추풍량의 얼굴을 후려쳤고, 그는 그대로 십여 장 정도를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매유검을 밀어내고, 추풍량에게 일격을 먹인 후에야 백아린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부상당한 옆구리를 감싸 안았다.
손바닥을 가져다 대기 무섭게 쏟아지는 피가 손을 집어삼켰다.
그만큼 상처는 꽤나 깊었다.
그녀의 하얀 백의는 피로 물들었고, 덩달아 내상을 입은 속 또한 날뛰었다.
백아린은 서둘러 손가락으로 상처를 입은 옆구리 근처를 점혈했다.
상처를 살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녀를 죽이기 위해 많은 이들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파앙!
적풍대 무인 십여 명이 백아린을 둘러싸며 공격을 쏟아 냈다. 둘러싼 숫자보다 더 많은 숫자의 무기들이 그녀를 향해 밀려들었다.
백아린은 가볍게 상체를 흔들며 날아드는 공격들을 피해 냈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 들린 대검이 흔들렸다.
쾅! 쾅쾅!
바닥이 박살 나며 백아린에게 공격을 펼치던 적풍대 무인들이 휩쓸려 나갔다. 그녀가 팽이처럼 회전하며 매서운 검기를 사방으로 쏟아 냈다.
파파파파팡!
그렇게 모두를 밀어낸 백아린이 짧게 숨을 토해 냈다.
“후우.”
잠시 숨을 돌리고는 있었지만, 눈과 몸은 빠르게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곧바로 매유검이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카아앙!
둘이 검을 맞댄 채로 서로를 노려보는 상황에서 매유검이 입을 열었다.
“어쩌지? 곧 죽을 것 같은데.”
말과 함께 매유검이 슬쩍 백아린의 상처 난 옆구리 쪽에 시선을 줬다.
상대의 도발에 백아린이 곧바로 받아쳤다.
“걱정 마. 그 전에 넌 죽여 줄 테니까.”
“그게 되겠어? 점점 밀리고 있는 것 같은데.”
“숫자가 줄어드니 초조한가 봐?”
“초조? 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저딴 놈들이 죽어 나가는 걸로 내가 초조할 리 없잖아.”
적풍대의 상당수가 두 사람의 싸움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했다. 거기다가 백아린이 직접 쓰러트린 숫자도 꽤나 많아서 어느덧 버티고 있는 이는 처음에 비해 반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그 대가로 백아린은 입은 부상과 내공 소모가 상당하긴 했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싸우다가는 점점 불리해질 거야.’
백아린은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부상을 입었고 내공 소모도 심했지만 아직은 버틸 만했다.
다만 문제는 적들 또한 여전히 위협적이라는 점이었다.
많은 숫자의 적풍대를 쓰러트렸지만 아직까지 반수가량이 남아 있었고, 결정적으로 매유검과 추풍량 두 사람 모두가 건재했다.
적풍대를 전부 쓰러트리는 건 어찌어찌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도 저 둘을 쓰러트릴 수 있을 만큼의 내공이 남아 있을까?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아는 백아린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투지를 잃지 않았다.
검을 맞댄 채로 힘 싸움을 하고 있는 그 순간 옆으로 추풍량이 다가왔다. 그의 손이 빠르게 백아린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손바닥이 정확하게 그녀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방금 전 매유검에게 베이며 크게 상처가 났던 부위였다.
푸웃!
혈도를 점혈하며 진정시킨 상처에서 다시금 피가 터져 나왔다. 게다가 한 번 깊은 부상을 입은 곳을 재차 공격을 당했으니 그 고통은 오죽하랴.
다리가 휘청할 정도의 충격.
그렇지만 백아린은 두 발로 굳건하게 버티고 선 채로 대검을 쥐고 있던 한 손을 빠르게 떼어 내서 움직였다.
그녀의 손이 아래쪽으로 파고든 추풍량의 얼굴로 향했다.
그리고…….
뻐엉!
굉음과 함께 추풍량의 얼굴에 백아린의 내력이 실린 주먹이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근거리에서 휘둘러진 그녀의 주먹에 제대로 얼굴을 적중당한 추풍량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멀리 밀려 나가며 나가떨어진 그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얼굴을 감싼 손바닥은 터져 나온 피로 범벅이었다. 거기다가 입 안쪽으로 이물감이 느껴졌다.
박살이 나며 깨져 버린 이였다.
몸을 일으켜 세운 추풍량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벌려진 입을 통해 보이는 그 안은 피투성이였다. 거기다가 반 이상은 박살이 나 버린 이들까지.
자리에서 일어난 추풍량은 피와 침이 뒤섞인 액체를 거의 토하듯 뱉어 냈다. 그러자 부서진 이들도 덩달아 바깥으로 쏟아져 나왔다.
추풍량은 분한 듯 부들부들 떨었다.
“으으으으!”
손꼽히는 강자인 그가 이런 굴욕스러운 경험을 언제 겪어 봤겠는가. 그랬기에 추풍량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렇지만 타격을 입은 건 추풍량만이 아니었다.
대검을 한 손으로 쥔 채로 버티고 서 있는 백아린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두 번의 큰 공격을 받아 내며 옆구리에서는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고, 상처에선 쉼 없이 피가 쏟아져 나왔다.
옆구리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연신 솟구쳐 오르는 피.
그리고 정신을 잃어도 이상할 것 없을 고통까지도.
그렇지만 백아린은 이를 악물었다.
싸울 것이다.
앞에 보이는 적들을 베고, 또 베서 누구도 앞에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그리고 설령 그것이 되지 않아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결국 천무진이 자신의 복수를 해 줄 거라 믿었으니까.
지금의 그는 조종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백아린은 결국 천무진이 모든 걸 이겨 낼 수 있다 확신했다.
자신이 아는 그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그를…… 사랑했으니까.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안 된다면…… 가기 전에 최대한 그에게 도움이 되고 숨을 거두고 싶었다.
그랬기에 싸워야만 했다.
죽기 전에 천무진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상대는 한 명이라도 더 줄여 줄 것이다.
옆구리에서 연신 쏟아져 나오는 피.
그 상황에서 백아린은 자신을 눌러 오는 매유검의 검을 힘으로 점점 밀어 올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매유검이 놀란 듯 꿈틀할 때였다.
파앙!
매유검을 밀쳐 낸 백아린이 자세를 다잡았다.
그녀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상대를 응시하며 되뇌었다.
‘그 사람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