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왕-270화 (269/293)

270화. 각오 ― 그 사람을 위해서 (2)

백아린의 대검으로 내력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콰아앙!

그녀의 대검이 근처에 있던 적풍대 무인들을 휩쓸었다. 인정사정없는 백아린의 공격에 적들은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녀의 대검이 미친 듯 사방으로 날뛰었다.

파라락.

백아린이 적풍대의 무인들 일부를 급습하는 그때 피투성이의 얼굴을 감싸 안고 있던 추풍량이 달려들었다.

“이 망할 계집!”

욕설과 함께 휘둘러진 그의 손바닥에서 맹렬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콰콰쾅!

백아린을 집어삼키려는 장력.

그렇지만 그 안에서 몸을 움츠린 채 대검으로 공격을 받아 낸 백아린은 곧장 날아올랐다.

쉬익!

빠르게 치고 나온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번쩍.

날아드는 대검을 추풍량이 가까스로 밀쳐 냈다. 그리고 그 순간 옆에서 매유검이 밀려들었다.

재차 추풍량에게 공격을 가하려던 백아린은 서둘러 대검의 방향을 비틀었다.

카카카카캉!

당장이라도 백아린을 찢어발길 듯이 밀려드는 검공에 그녀는 뒷걸음질 치며 빠르게 대검을 움직였다.

커다란 대검이지만 그녀는 무척이나 기민하게 반응했고, 덕분에 매유검의 쏟아지는 공격을 모두 받아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날아드는 검을 강하게 후려치자 매유검의 균형이 다소 무너졌고, 백아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손바닥을 휘둘렀다.

퍽!

뻗어져 나온 장력이 매유검의 가슴을 후려쳤다.

순간적으로 뒤로 밀려 나간 그이지만, 백아린은 알고 있었다.

이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음을.

장포로 가리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아마도 별다른 표정 변화는 없을 거라 확신했다.

싸움이 길게 이어질수록 백아린은 상대의 실력이 생각보다 빼어나다는 걸 느꼈다.

‘여태까지 싸워 본 십천야와는 차원이 달라.’

다소 무공이 약한 적련화를 제외하고도 그녀는 십천야들 중 두 명과 정면으로 붙어 봤었다.

그녀는 주란을 이겼고, 왕도지는 죽였다. 그들 역시 십천야였지만 그 둘과 매유검은 아예 다른 존재였다.

그 둘이었다면 아무리 상황이 이렇다 한들 결코 백아린을 이 정도까지 몰아붙일 수는 없었을 게다. 거기다가 우내이십일성인 추풍량까지.

백아린은 가볍게 손목을 풀었다.

별다른 피해 없이 막는 것처럼 보였지만 방금 전 쏟아진 추풍량의 장법은 꽤나 위력적이었다. 그걸 고스란히 대검으로 받아 냈으니, 아무렇지 않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슬쩍 추풍량의 모습을 확인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눈동자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걸 확인한 백아린이 대검을 등 뒤에 사선으로 걸친 채 자세를 잡았다.

당장이라도 전방으로 튀어 나갈 것만 같은 모양새.

거기다가 그녀의 몸 주변으로 빠르게 내공이 휘몰아쳤다.

파앙!

자세에서 풍겼던 느낌처럼 백아린이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동시에 그녀의 등에 걸쳐진 듯 자리하고 있던 대검이 빠르게 땅으로 내리꽂혔다.

쾅!

대검이 향한 곳에 자리하고 있던 추풍량은 이미 그 장소에 없었다.

하지만…….

쩌저저적.

갈라지는 땅. 그리고 그 틈으로 백아린의 응축된 힘이 분수처럼 용솟음쳤다.

콰콰콰쾅!

이어지는 굉음과 함께 추풍량의 몸이 그 빛에 휩쓸렸다. 허공에서 그가 놀란 듯 방어를 하며 다급히 백아린의 비어 있는 등 뒤로 장력을 날렸다.

하지만 추풍량은 결국 백아린의 공격을 버텨 내지 못하고 허공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떨어진 추풍량은 입으로는 피를 토해 냈고, 몸 곳곳에는 수십여 개의 베인 듯한 상처가 생겨났다.

그렇지만 그의 공격 또한 백아린에게 정확하게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매유검 때문이었다.

백아린은 날아드는 추풍량을 공격을 피해 낼 수 있었다. 허나 그걸 매유검이 그냥 두고 보지 않은 것이다. 그가 백아린이 피하려는 쪽의 방위를 점하며 치고 들어왔다.

파파파팍!

달려드는 매유검,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검의 움직임까지.

백아린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둘 중 무엇을 감수할 것인지.

그리고 결정은 눈 깜빡할 사이에 내려졌다.

그녀는 매유검의 공격을 피하는 대신 추풍량의 공격을 그대로 등으로 받아 내는 걸로 정한 것이다.

쾅!

등에 틀어박힌 장력으로 인해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듯한 충격이 밀려들었다. 동시에 입에서는 울컥하고 피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주춤하며 상체가 밀렸던 백아린이었지만, 그녀는 그 상태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았다.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다.

버텨야만 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다음에 이어질 매유검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을 걸 알아서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백아린을 향한 매유검의 공격이 이어졌다.

카캉! 캉!

연달아 두 번 밀고 들어오는 공격을 쳐 낸 백아린의 대검이 주변을 휩쓸었다.

부와아앙!

재빠르게 피해내긴 했지만, 대검에서 뿜어져 나간 무형의 기운이 매유검의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덩달아 뒤편에 자리하고 있던 적풍대의 일부 무인들 또한 그 공격에 휩쓸려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격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슬쩍 뛰어오른 백아린이 곧장 아래쪽에 있는 매유검을 향해 강하게 대검을 후려쳤다.

그러나 그건 단순한 휘두르기가 아니었다.

쏴아아아.

밀려드는 내력, 동시에 내리치는 대검에 실린 힘까지. 순간적으로 강기가 사방으로 퍼지더니, 이내 아래에 있는 매유검을 집어삼켰다.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콰콰쾅!

박살이 난 땅이 사방으로 요동치는 사이, 백아린의 표적이 되었던 매유검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흙먼지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백아린이 펼친 뇌령십이초삭이라는 초식에 순간적으로 휩쓸린 탓에 그의 꼴은 다소 헝클어져 있었다.

전신을 가리고 있던 장포의 곳곳이 찢겨 나가 엉망이었는데, 특히 얼굴을 가리고 있던 윗부분이 슬쩍 헤져 있었다.

장포를 최대한 잡아끌어 얼굴을 가린 매유검은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찢겨진 장포 사이로 곳곳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거기다가 얼굴에도 부상을 입었는지, 볼을 타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매유검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손등으로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 낸 그가 중얼거렸다.

“짜증 나게 하네.”

말과 함께 매유검의 검이 움직였다.

츠츠츠츠!

그의 몸에서 피어오른 기운이 주변으로 향했고, 이내 그의 주위로 검은 색의 검기들이 땅에서부터 솟아올랐다.

치치치칭!

매유검이 다시금 잔마폭멸류를 펼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 순간 백아린 또한 기다렸다는 듯 내공을 끌어모아 잔마폭멸류의 힘을 끌어올렸다.

몸 주변으로 피어오르는 열여덟 개의 검은 검기.

그 검기들이 백아린을 감싸 안았고, 이내 그녀의 의지에 따라 땅에 박힌 듯 자리하고 있던 검기들이 동시에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매유검이 비웃듯 말했다.

“멍청하게 또 붙어 보겠다고?”

방금 전에도 백아린과 매유검은 같은 잔마폭멸류로 승부수를 띄웠다.

얼핏 보면 상황은 무승부였다.

둘 모두 반대쪽으로 튕겨져 나갔고, 양쪽의 기운 또한 동시에 상쇄됐으니까. 그렇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이득을 본 건 그래도 매유검이었다.

그 격돌로 백아린은 내상을 입고 피를 쏟아 냈다.

스무 개의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매유검과 아직은 열여덟 개만을 다룰 수 있는 백아린의 대결이다.

제아무리 백아린의 내공심법이 잔마폭멸류에 최적화된 것이라 한들 아직까지는 매유검이 보다 앞서 있는 상황이었다.

잔마폭멸류는 실로 위협적인 초식이다.

그랬기에 매유검은 이번에도 잔마폭멸류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고, 이것이 승부를 가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공격을 받아 내기 위해 다른 무공을 쓴다고 해도 잔마폭멸류의 위력을 넘어설 수 없으니 자신이 이길 테고, 설령 지금처럼 같은 무공으로 받아 온다 해도 상관없었다.

결국 백아린이 어떤 선택을 하든 이득을 보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끓어오르는 힘을 느끼며 백아린은 침착하게 상대를 응시했다.

매유검의 생각을 영리한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해내야 해.’

애초에 백아린은 매유검이 결국 이런 식으로 잔마폭멸류를 이용해 승부를 걸어올 확률이 높다 예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걸 이겨 낼 방책도 고민해 봤다.

그렇지만 이처럼 격렬하게 싸우고 있던 와중이라 특별한 방책이 나오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내린 하나의 결론.

바로 열아홉 번째의 검을 불러오는 것이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경지를 백아린은 지금 이처럼 위급한 순간에 승부수로 내건 것이다.

어차피 매유검의 예상대로 이 공격을 막아 낼 무공은 그녀에게도 잔마폭멸류밖에 없었다.

백아린의 신경이 주변의 흐르는 모든 기의 흐름을 받아들였다.

생과 사의 갈림길.

그리고 고도의 집중력과 무인으로서의 승부욕까지.

그 모든 것이 하나가 되며 백아린의 감각이 평소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려지고 있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 목숨을 걸고 승부수를 내걸 수 있는 건 백아린 그녀가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백아린의 몸 주변으로 미약한 기운 하나가 더 작게 회오리치기 시작한 바로 그때!

콰콰콰쾅!

선공을 펼친 건 매유검이었다.

그가 만들어 낸 스무 개의 검은 검기가 백아린을 향해 밀려들었다. 순간 백아린도 허공으로 띄워 올렸던 검은 검기들을 뿜어냈다.

두 개의 힘이 다시금 허공에서 충돌했다.

쿠쿠쿠쿠쿠쿠!

떨리는 몸, 동시에 전신의 모든 기운이 쑥 빨려 나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순 머리가 멍했고, 다친 상처들에서는 지독한 고통이 밀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그렇지만 백아린은 대검을 보다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이긴다. 반드시…… 이긴다.’

백아린의 의지가 육신의 충격을 이기는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눈앞으로 자그마한 무형의 기운이 빠르게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하나의 검은 검기가 되었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더는 망설일 틈이 없었다. 밀려 들어오는 파괴적인 공격을 이겨 내기 위해선 지금 이 하나의 힘이 필요했으니까.

마침내 만들어 낸 열아홉 번째의 검은 검기.

그것이 두 사람의 힘이 충돌한 곳을 향해 빛처럼 쏘아져 나갔다.

피잉!

그리고 그것이 백아린이 먼저 쏘아 낸 열여덟 개의 힘과 합쳐지는 순간…….

상황이 급변했다.

퍼어엉!

폭음과 함께 이번에도 백아린과 매유검이 양쪽으로 날아갔다. 그렇지만 이번의 상황은 아까와 달랐다. 아까는 서로 힘을 상쇄시킨 상황에서 피를 쏟아 낸 건 백아린이었다.

그런데…….

“커억!”

비명과 함께 매유검은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에선 연신 피가 터져 나왔고, 동시에 경련이라도 난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 댔다.

밀려온 충격파의 여파로 매유검은 몸이 깨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고개를 치켜든 그가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 백아린!”

분에 찬 듯 막 소리를 내지르는 그를 향해 백아린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워 움직이려던 그때였다.

쉬잇!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백아린이 서둘러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추풍량이 있었다.

그런데 백아린의 시선이 닿는 그 순간 갑자기 추풍량의 모습이 귀신처럼 사라졌다.

이형환위!

자신의 위치를 순간적으로 바꾸는 최상승의 경신술이었다.

그리고 그가 나타난 곳은 백아린과 고작 반 장 정도 떨어진 정면이었다. 추풍량이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내 내력에 휩싸인 그의 주먹이 향한 곳은 바로 백아린의 발아래 바닥이었다.

‘낙성추혼(落星追魂)!’

콰콰콰콰콰콰쾅!

땅이 뒤집어지며 그 주변을 뒤덮는 모습을 보는 순간 피투성이인 추풍량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끝이다.’

이겼다는 확신이 들었다.

백아린은 매유검과 서로 잔마폭멸류로 격돌을 벌였고, 결국 버텨 내긴 했지만 상당한 내력 소모가 있었던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 무방비한 옆을 치고 들어가 추풍량은 자신의 절초인 낙성추혼을 정확하게 성공시켰다. 바닥을 내려치긴 했지만, 이 무공은 아래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힘으로 상대의 전신을 부숴 버리는 공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공격을 피해 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여겼다.

바로 그때였다.

스윽.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추풍량의 한쪽 팔에 닿았다. 아주 미약한 감각이었고, 이런 혼란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추풍량은 그 미세한 자극을 알아차렸다.

추풍량의 눈이 향한 자신의 손목.

그곳에 아주 얇은 은빛 실이 휘감기고 있었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추풍량은 아차 싶었다.

서둘러 팔을 빼내려 했지만…….

꽈악!

실이 추풍량의 팔목을 순간적으로 잡아챘다. 그리고 그때 그의 귓가로 백아린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못 빠져나가.”

백아린의 왼손에 자리한 붉은 장신구.

그리고 그곳에 숨겨져 있는 암기인 귀린사가 아주 잠시지만 추풍량의 팔을 옭아맨 것이다.

아무리 귀린사라 해도 추풍량 정도 되는 고수를 계속 잡아 두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근접한 거리에서 주어진 그 찰나의 순간.

그거면 됐다.

백아린의 대검이 추풍량의 겨드랑이 아래로 빠르게 파고 들어가며 그대로 위로 솟구쳤다.

푸우우웃!

팔과 함께 어깨가 잘려져 나가며 그대로 피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끄아아악!”

팔이 잘려져 나간 고통에 추풍량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칠 때였다.

부웅!

귀린사에 얽힌 채로 잘려진 손이 그대로 추풍량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가 어렵사리 날아드는 자신의 잘려진 팔을 피하는 바로 그 순간.

그 팔 뒤편으로 날아든 백아린의 발이 추풍량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뻐억!

추풍량의 목이 기괴하게 비틀리며 그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털썩.

쓰러지는 추풍량을 슬쩍 바라본 백아린은 귀린사에 얽혀 있는 잘려진 팔을 제거했다.

순식간에 추풍량을 쓰러트린 백아린이 매유검을 향해 다가가려다가 비틀했다.

그녀는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잔마폭멸류를 보다 성장시키며 매유검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그 기회를 틈타 추풍량까지 쓰러트렸다.

그렇지만 백아린 또한 그만큼 타격을 입었다.

잔마폭멸류의 반탄력에 내상을 입었고, 그 와중에 추풍량의 낙성추혼까지 맨몸으로 받아 냈다.

멀쩡하다면 오히려 그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뒤늦게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린 피가 볼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아, 하아.”

백아린은 지친 듯 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곧 대검을 힘차게 들어 올려 어깨에 짊어졌다.

상황이 압도적으로 유리해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방심할 수 없는 상태였다.

주변엔 아직도 팔십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적풍대의 무인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싸울 힘이 남아 있는 매유검도 있었다.

백아린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매유검 또한 자신의 검을 들고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이 정도 상황이면 그렇게 봐야겠지?”

매유검의 말에 백아린이 곧장 답했다.

적풍대 무인 중 삼분지 이를 쓰러트렸다. 거기다가 그들을 이끄는 수장인 추풍량도 이젠 죽어 버렸다.

그것은 곧 매유검을 제외한다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전력의 반조차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매유검 또한 분명히 알고 있을 터.

그런데…….

매유검의 장포 안에 감춰진 입이 비틀렸다.

“그런데 어쩌지? 네 생각이 틀렸거든.”

의미심장한 매유검의 말투에 백아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때였다.

매유검이 입을 내밀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이이익!

내공이 실린 휘파람 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갑작스러운 매유검의 신호에 백아린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내 백아린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그녀의 감각 안으로 다른 이들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스스스슥.

모습을 드러낸 무리의 숫자는 백 이십 명 정도였다. 거기다가 그들을 이끌고 나타난 수장까지.

수장을 확인하는 순간 백아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카랑카랑해 보이는 외모,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그가 차고 있는 검이었다. 검 손잡이에 새겨져 있는 번개 모양의 무늬.

그렇게 눈에 보이는 저 외양을 종합해 보고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뇌룡검대를 이끄는 수장이자 우내이십일성인 여명이 나타난 것이다.

애초에 뇌룡검대는 둘로 나뉘어 절반은 이 산을 포위하고 있고, 나머지 절반 가까이는 여명과 함께 인근에서 대기조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매유검의 신호를 받자 기다렸다는 듯 이 싸움터에 나타난 것이다.

백아린은 상당한 내력 소모와 부상을 입어 가며 지금까지 싸웠다. 덕분에 적풍대도 절반 이상을 해치웠고, 추풍량까지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뇌룡검대와 여명이 나타난 이상…… 이 상황은 처음으로 돌아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백아린의 몸 상태가 엉망이 된 점뿐이었다.

잔마폭멸류를 성장시켜 매유검과의 힘 싸움에서 이겨 내고, 추풍량까지 빠르게 꺾으며 백아린은 희망을 봤다.

자신이 이길 수 있다는 희망.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

그녀의 머리가 차갑게 식어 갔다.

딱딱하게 굳은 백아린의 표정을 보며 매유검은 그녀의 속내를 알았다는 듯 조롱했다.

“뭐야 그 침통한 표정은. 방금 전까지 자신만만했던 그 기세는 어디 가고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

엄연한 조롱에도 백아린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토록 힘들게 싸웠는데 도로 처음으로 돌아간 이 상황에 절로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차라리 처음이 지금보다는 나았다.

이제 백아린의 몸은 최상의 상태가 아니었고, 이런 몸으로 쌩쌩한 저 많은 무인들과 우내이십일성인 여명까지 감당하는 건 솔직히 말해 무리였다.

백아린은 직감했다.

지금 자신의 힘으론 이들 모두를 쓰러트리지 못할 거라는 걸.

대검을 쥔 채로 백아린이 슬쩍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직도 동이 트지 않은 시각.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밤이 참 기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많은 이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특히나 함께했던 동료들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백아린은 마음이 아팠다.

여자처럼 생긴 외모와는 다르게 화통하고, 언제나 난리 법석인 단엽.

그리고 단엽이 생각나자 어릴 때부터 자신과 함께해 온 한천도 떠올랐다.

그는 언제나 웃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 웃음 뒤에 얼마나 많은 슬픔이 감춰져 있는지. 그러던 한천이 단엽과 만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백아린은 참으로 기뻤다.

한천은 언제나 많은 이들과 어울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외로워 보였고, 그 안에 진짜 한천은 없었다.

그러던 한천을 끄집어내 준 것이 바로 단엽.

참으로 안 어울리는 두 사람인데…… 역설적으로 그리도 어울리는 이들 역시 없었다.

쓸데없이 주고받는 두 사람의 만담에 항상 뭐라고 했었는데 상황이 이리되니 그조차도 아쉬웠다. 다시는 그 둘의 말도 안 되는 대화를 들을 수 없게 될 줄이야…….

‘난 이렇게 됐지만, 부총관은 꼭 살아남아 줬으면 좋겠어. 반드시 살아서 꼭 행복해야 돼.’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지만 백아린은 한천이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이내 백아린의 머릿속에 천무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이상할 정도로 감정이 울컥하고 치솟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가장 먼저 나오는 건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미안해요. 더 도와주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여기가 제 마지막일 것 같아요.’

항상 천무진의 옆에서 싸워 왔다.

그의 옆이 자신의 자리라 생각했고, 그게 당연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침내 그 끝이 다가온 모양이다.

자신이 죽게 된다면 천무진이 얼마나 슬퍼할까?

백아린은 그를 슬프게 한다는 그 사실이 못내 미안했다.

그녀는 간절히 바랐다.

‘제가 죽었다고 너무 오래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마지막 바람이에요.’

천무진을 떠올리며 아주 잠시 눈을 감았던 백아린이 이내 대검을 고쳐 잡았다.

처음부터 어느 정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지 않았던가. 잠시 희망에 젖긴 했지만 어쩌면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각오한 백아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덤벼. 몇 명이라도 좋으니까.”

“뭐야. 혹시 아직까지도 희망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 사실 여기 대기하고 있는 부대는 이들을 제외하고도 몇 개는 더…….”

일부러 전의를 꺾기 위해 매유검이 거짓말을 내뱉는 바로 그때였다.

“어지간히 상대가 무서운 모양이네.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걸 보면. 안 그래, 칠 호?”

어딘가에서 들려온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매유검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놀란 건 자신의 거짓말이 밝혀져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칠 호라고 부를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어서였다.

그리고 그건…….

백아린과 매유검의 시선이 향한 곳.

그곳에서 한 명의 사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붉은 악귀가 새겨진 한 자루의 검을 든 채로 어둠 속에서 나타난 사내.

천무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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