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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82화 (281/293)

282화. 은혜 ― 한천이라고 불러 (2)

적화신루를 통해 날아든 비밀스러운 서찰이 무림맹주 추자후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연락.

그리고 이어지는 놀라운 부탁까지.

그렇지만 추자후는 당황하지 않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걸 알았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백아린이 보낸 서찰이었지만, 결국 이건 천룡성의 부탁이라고 봐야 했다.

서찰의 내용은 간단했다.

십천야를 토벌하기 위해 무인들을 내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십천야와 손을 잡은 것으로 의심되는 이들의 명단도 함께 있었다.

다 읽어 내린 서찰을 손에 꼭 쥔 채로 추자후가 중얼거렸다.

“호남이라…….”

천무진이 지원을 요청한 지역은 다름 아닌 호남.

그리고 호남에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호남 지역에 정파 소속의 중소문파들이 잔뜩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런 이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상대는 십천야고,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무림맹 또한 정예들을 내보내야만 했다.

무림맹 맹주인 추자후에게 무인들을 움직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무인들이 움직이는 이유가 십천야를 상대하기 위함이라는 게 노출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이 정도의 대규모 병력이 움직인다면 제아무리 정보력이 약해진 십천야라고 할지라도 모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처음부터 십천야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무인들을 움직여서는 안 됐다.

그랬다가는 그들 또한 충분한 시간을 갖고 반격을 준비할 테니까.

지금으로선 어떻게 십천야의 눈을 속이고 호남까지 무인들을 보낼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부분에 있어 추자후는 길게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서찰 끝자락에 남겨진 문구 때문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병력을 보내게 될지는 곧 알게 될 거라고?’

서찰을 보내기 전에 이미 천무진 쪽에서는 그에 맞는 대책도 준비했을 것이고, 추자후의 입장에서는 그에 맞춰 병력을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이었다.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으며 그 많은 인원들을 움직일 만한 일이라니…….

그게 무엇일지 궁금해하던 그때 바깥에서 총군사 위지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주님! 급한 전보입니다!”

“들어오게.”

승낙이 떨어지자 위지겸이 서둘러 맹주의 집무실로 걸어 들어왔다. 다소 긴장한 얼굴의 그를 보며 추자후가 물었다.

“급한 전보라니? 갑자기 무슨 일인가?”

“마교의 정예 무인 삼천가량이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위지겸의 보고에 추자후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무인도 아닌 정예 무인 삼천이라면 결코 좌시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추자후가 서둘러 물었다.

“무슨 연유로 말인가?”

“그것이 신월파(新月派)와 은영곡(隱影谷)의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월파는 정파 쪽의 문파고, 은영곡은 마교 휘하에 있는 이들이다.

이 두 세력 간의 문제로 아주 오래전 무림맹과 마교는 일촉즉발의 상태까지 간 적이 있었다.

허나 그 직전에 마교 교주의 몸 상태가 조금씩 안 좋아지기도 했고, 다행히 대화로 어느 정도 상황을 매듭지을 수 있어 휴전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마교가 움직였다.

추자후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중얼거렸다.

“긴 시간 동안 가만히 있던 그들이 왜 이제 와서 그 두 세력의 일을 다시 들쑤시…….”

말을 이어 가던 추자후가 갑자기 움찔했다.

신월파와 은영곡?

‘……호남!’

추자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랬다. 그 두 세력이 위치한 곳은 현재 천무진이 지원을 요청한 호남이었다.

갑작스러운 마교의 도발, 그런데 그곳이 하필이면 호남이라니…….

이게 우연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제야 추자후는 천무진 쪽에서 보내온 서찰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허허, 천 공자가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었군요.’

지금 마교가 움직인 것 또한 천무진이 부탁한 일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다툼. 그것으로 인해 마교가 움직였다면 무림맹의 무인들이 움직이는 명분으론 너무도 충분했다.

천무진이 먼저 이런 방식으로 해답을 주었으니…… 남은 건 자신의 대답뿐이었다.

“총군사.”

“예, 맹주님.”

명령을 기다리는 위지겸을 향해 추자후가 답했다.

“무인들을 모으게. 마교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 * *

자신의 발로 십천야의 비밀 거점에 돌아온 천무진은 그저 평범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원을 요청한 무림맹과 마교의 무인들이 이곳까지 도착하려면 열흘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 전까지 천무진은 계속해서 조종을 당하는 척 연기를 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천무진이 내부에서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니었다.

그는 십천야와 관련된 이들을 알아내기 위해 나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십천야 거점 내부를 오가는 이들을 살폈고, 그들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비밀리에 움직였다.

뒤를 캐며 그들이 만나는 이들을 확인할 수 있도록 백아린에게 정보를 주기도 했고, 직접 누군가를 만나 주고받는 대화를 엿듣기도 했다.

덕분에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십천야와 관련 있는 이들을 꽤나 많이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나름 이름 있는 무인들도 제법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닌 십천야의 거점.

그런 장소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정보를 구해 내는 경로도 다양해지고, 구해 내는 것 또한 쉬울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이제 천무진은 천지광을 만나게 되는 게 두렵지 않았다.

예전엔 그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모충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지금은 그에게 조종당했던 부분이 천무진에게 무기가 되어 줬다.

오히려 반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천무진이 말하는 것이라면 모두 믿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오늘도 연무장과 외부에서 보내는 시간을 적절하게 분배하여 티 나지 않도록 움직이던 천무진은 남윤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남윤은 천무진과 외부를 이어 주는 연결책이었다.

천무진이 물었다.

“영감,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원하시는 방향대로 잘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이미 양쪽 모두 움직였으니 곧 호남에 도착할 수 있을 걸로 파악됩니다.”

무림맹과 마교의 병력들이 예정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확인한 천무진은 곧장 물었다.

“부총관의 상태는 좀 어떻대?”

“그때보다 조금 더 나아졌다고 합니다. 백 소저께서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 달라 하시더군요.”

“…….”

고개를 끄덕거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외부에 드나들다가는 천지광이 수상쩍게 볼 위험이 있기에 천무진은 최대한 나가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한천의 상태를 알고는 꽤나 걱정이 되었지만 이렇게 남윤을 통해 전해 듣고만 있을 뿐, 직접 찾아가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아쉽지만 지금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을 위해 천무진이 할 수 있는 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

천무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밀히 십천야와 손을 잡은 이들의 정체를 알아내긴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런 연기를 하는 거 자체가 십천야에 몸담은 이들을 발본색원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리고 더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자들까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막 걸음을 움직여 연무장을 벗어나려는 천무진을 향해 남윤이 서둘러 물었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마지막 목표물이 하나 남았거든.”

천무진이 노리는 마지막 표적.

그건 바로…… 십천야 중 하나인 주란이었다.

주란은 자신의 거처에 찾아온 손님을 보고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십천야 전원이 모이는 자리에서만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했던 사이인 천무진이 직접 자신을 만나기 위해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놀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천무진 네가 왜 여기에…….”

“원래 손님을 이렇게 맞이하나?”

자리에 선 채로 이야기해야 되냐는 듯 물어 오는 천무진의 모습에 주란은 표정을 찡그렸다가 이내 가볍게 손짓했다.

그제야 방 안으로 들어온 천무진은 중앙 부분에 위치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런 그와 맞은편에 자리하긴 했지만…… 주란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한 기분이었다.

결코 좋은 사이가 아니었고, 이렇게 마주 앉아 주고받을 대화도 없었다.

그랬기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왜 천무진이 이런 늦은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말이다.

주란은 최대한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상무기가 죽은 이후 십천야의 정보를 관리하던 게 너라고 들었다. 맞나?”

“맞아.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사실은…… 갑자기 백아린과 연락이 안 돼서.”

천무진의 말에 주란은 속으로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백아린이 죽은 줄로 알고 있었고, 이 사실이 천무진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천지광의 명을 받았다.

그랬기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그래? 그런데 그게 왜?”

“왜 갑자기 연락이 안 되는지 신경이 쓰여서. 백아린에게 연락을 넣고 싶은데 아무래도 정보 단체의 힘이 필요할 것 같다.”

천무진의 말을 듣고서야 주란은 왜 그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그 백아린을 찾아 달라?”

“맞아.”

천무진의 말을 들으며 주란은 비웃음을 삼켰다.

죽은 사람을 찾아 달라는 의뢰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하지만 이내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 하지. 찾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그냥 찾는 시늉만 하면 되는 일이라 생각한 주란이 선뜻 천무진의 부탁을 승낙했다.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면서 물어보면 아직 찾은 게 없다고 둘러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주란이 생각하는 척하다 승낙의 뜻을 내비치는 사이 천무진의 눈과 감각이 빠르게 그녀의 거처 내부를 살폈다.

바로 뭔가를 찾기 위해서였다.

천무진이 주란을 통해 얻고자 하는 건 바로 그녀가 지니고 있는 비밀 장부였다.

주란은 홍화루의 주인이다.

그리고 그곳은 보통의 수십 곱절은 될 정도로 치명적인 중독성을 지닌 아편을 유통하는 곳이기도 했다. 수많은 무인들과 고관대작들조차 얽혀 있는 장소.

홍화루는 십천야의 힘의 원천이기도 한 곳이었다.

그곳을 통해 아편에 중독당한 이들은 자연스레 십천야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렇게 당한 이들이 꽤나 많다는 사실을 천무진은 이곳 비밀 거점에 있으면서 알게 됐다.

그리고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명단이 적혀 있는 비밀 장부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십천야들과 어쩔 수 없이 동석한 자리에서 스치듯 들었던 이야기들이었지만 결코 잊을 리가 없었다.

그 비밀 장부만 찾는다면 은밀하게 숨어 있어, 아직까지도 알아내지 못한 십천야 세력들의 상당 부분을 파악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무척이나 중요한 장부이니 외부에 놔두는 것보다 십천야의 비밀 거점 중 하나에 감춰져 있을 확률이 높다 여겼고, 한곳에 오래 있었던 만큼, 현재 자신이 있는 곳에 지니고 있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찾아와 본 것이긴 했지만……

방 안엔 딱히 서책이랄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천무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분명 여기에 숨겨 놨을 확률이 큰데.’

비밀 거점이다 보니 가장 안전할 것이고,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긴다고 들었으니 옆에서 떼어 놓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슬쩍 방을 둘러보던 천무진의 시선이 어느 지점에 이르러 멈칫했다.

주란은 참으로 화려한 여인이다.

옷부터 시작해서 장신구까지.

마찬가지로 방 내부도 비슷했다.

화려한 내부의 장식들이 곳곳에 가득했다. 그런데 그런 화려함과 동떨어진 족자 하나가 방 한편에 걸려 있었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천무진은 주란이 눈치채지 못하게 무형의 기운을 그쪽으로 가볍게 흘려보냈다. 그리고 이내 그 기운이 족자를 관통하며 사라졌다.

덕분에 족자와 벽 사이에 자그맣게 텅 빈 공간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걸 느낀 순간 천무진의 눈초리가 가볍게 씰룩였다.

잠시 후 천무진이 벌떡 일어났다.

“그럼 할 이야기는 끝냈으니 이만 가지. 들어오는 정보 있으면 연락 주도록 하고.”

“그렇게 하지. 그리고 앞으로 찾아올 거면 미리 연락은 좀 주고 오면 좋겠는데.”

“뭐 이런 일이 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지.”

짧은 대답을 마친 천무진은 곧장 몸을 돌렸다.

사실 저 안에 그 비밀 장부가 있을지 없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빈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

그렇지만 저곳에 비밀 장부가 없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는 건 아니다. 일을 처리하는 것이 보다 번거로워질 뿐이지, 그 결과는 같을 테니까.

허나 가능성을 보았으니 이후의 일에 대해 빠른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주란의 거처를 빠져나온 천무진은 연무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열흘.’

천무진이 걸음을 멈춘 채로 십천야의 비밀 거점 내부를 스윽 둘러봤다.

저번 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지독한 싸움.

그 싸움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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