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우연이 아닌 운명 ― 고마워 (2)
한동안 아예 외출을 자제하던 천무진이 오랜만에 비밀 거점을 빠져나와 바깥으로 나섰다.
무림맹과 마교의 병력이 빠르게 북상하고 있지만, 아직 인근에는 도착하기 전이었다.
아직까지는 십천야 내에서도 이 일에 대해 경계만 하고 있을 뿐 확신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때라 나올 만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천무진의 옆에는 자연스레 남윤이 따라붙어 있는 상태였다.
천지광은 외출을 하게 되더라도 언제나 남윤이 함께하길 원했고, 그는 그걸 충실히 이행 중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보고는 전혀 하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함께 나아가던 남윤이 입을 열었다.
“오늘 외출 일정은 백 소저가 머물던 거처를 찾아갔지만 흔적을 찾지 못하고 인근까지 뒤져 보다가 돌아온 정도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부탁할게, 영감.”
어차피 천무진이 외부에 나갔던 일은 발각되기 쉬웠다.
굳이 숨겨서 의심을 받을 바엔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가짜 정보를 흘려 천지광의 눈을 속이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간단하게 추후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은 이내 목적지 인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의선의 거처로 마련해 두었던 곳인데 지금은 백아린과 단엽, 그리고 한천까지 함께 몸을 숨기고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세 사람 모두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고, 그런 그들을 만나기 위해 천무진이 이곳까지 직접 찾아온 것이다.
거처에 도착한 천무진은 남윤과 헤어져서는 곧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천무진의 방문.
그리고 그런 그가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백아린이었다.
“어?”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천무진을 발견한 그녀가 일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밝아진 얼굴로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다.
코앞까지 빠르게 다가간 백아린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야, 언제 왔어요?”
“방금. 몸은 좀 어때?”
천무진의 질문에 백아린은 자신의 몸을 슬쩍 살펴보다 이내 손을 저으며 안심시켰다.
“보시다시피 전혀 문제없어요.”
천지광이 투입했던 어마어마한 무인들과 싸운 지도 다소 시간이 지났고, 그간 충분히 치료를 받은 덕분에 백아린의 외상은 깨끗하게 나아 있었다.
그리고 내상 또한 이미 완치된 상태였다.
그렇지만 말을 듣고도 천무진은 쉬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정말로 괜찮아?”
십천야를 일망타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긴 했지만, 옆에 있어 주지 못했다. 그것이 천무진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재차 물어 오는 그 목소리에서 자신에 대한 걱정이 느껴져서일까?
백아린이 씩 웃으며 등 뒤에 매고 있는 대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멀쩡하다니까요. 보여 줘요?”
당장이라도 대검을 뽑아 들 것처럼 기세등등한 모습에 천무진은 됐다는 듯 손사래 쳤다. 그러고는 이내 천무진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안쪽에 있어요. 당신이 오는 줄 몰랐으니 다들 깜짝 놀랄 거예요.”
말과 함께 백아린은 단엽과 한천이 있는 방으로 천무진을 안내했다.
당시 당했던 부상으로 인해 한천은 아직까지도 거의 하루의 대부분을 방 안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서 단엽은 말벗이 되어 주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방에서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던 두 사람은 모습을 드러낸 천무진을 발견하고 크게 반겼다.
“얼굴 까먹겠다. 왜 이리 얼굴 보기가 힘들어?”
단엽의 투덜거림에 천무진이 피식 웃으며 짧게 답했다.
“곧 일이 마무리되면 그때는 질리도록 볼 수 있을 거다.”
말과 함께 천무진의 시선이 침상 위에 앉아 있는 한천에게로 향했다. 주기적으로 남윤을 통해 상태를 전해 듣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보니 또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천무진이 한천에게 다가가 물었다.
“부총관, 몸은 좀 어때?”
“어휴,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다들 성화라서 이렇게 침상에 누워 있는 거지 당장이라도 일어나 달릴 수도 있다니까요?”
특유의 너스레와 함께 걱정 말라는 듯 말하는 한천의 모습을 보며 천무진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몸 관리에 신경 써.”
이제 곧 있을 십천야와의 마지막 결전.
사실 그 결전에 한천은 빠져야만 했다. 본인은 괜찮다고 말하고 있지만, 몸 상태가 아직도 좋지 못했기에 이번만큼은 그를 제외하는 걸로 정했다.
허나 상관없었다.
이번 작전은 최대한 피해 없이 마무리될 예정이니까.
그리고 그걸 위해 천무진이 굳이 비밀 거점으로 돌아가 아직까지 조종당하는 연기를 하는 번거로운 일까지 감수하며 이번 작전을 준비하지 않았던가.
천무진의 진심 어린 걱정에 한천은 괜히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하,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술 못 먹는 건 정말 죽겠습니다. 이거 강제로 금주 중이니 원…….”
“어차피 매일 먹던 거 한동안 참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매, 매일까지는 아니었죠! 하하.”
“그런가? 분명 내 기억은 좀 다른 거 같은데.”
말과 함께 천무진이 지그시 백아린을 바라봤고, 그녀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어 보이는 한천을 바라보며 천무진은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들어온 백아린 또한 그 옆에 나란히 자리했다.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 네 사람은 오랜만에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물론 그 대화의 대부분을 이끄는 건 언제나처럼 단엽과 한천이었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두 사람의 말에 천무진과 백아린은 웃거나, 간단한 대답을 하며 그렇게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천무진은 팔짱을 낀 채로 한자리에 모인 세 사람을 스리슬쩍 살폈다.
그들을 보고만 있었을 뿐이거늘…… 신기하게도 웃음이 났다. 그리고 덩달아 마음 또한 편안해졌다.
십천야들과 함께 있을 때와는 너무도 다른 기분이었다.
갑작스럽게 미소 짓는 천무진의 모습에 한천이 당황한 듯 말했다.
“어라. 제가 지금 한 말이 웃겼습니까? 이상하네, 웃긴 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 그냥…… 좋아서. 좋아서 그래.”
자모충이 사라지고 자기 자신의 의지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지금.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고, 또 그들이 옆에 있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게 됐다.
천무진의 그 말에 나머지 세 사람 모두 움찔했다가 이내 마찬가지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천무진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 것만 같았으니까.
천무진의 시선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생각해 보면 실로 재미있는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사파를 대표하는 단체 중 하나인 대홍련 련주의 자리에 오른 젊은 괴물 단엽.
황궁의 무공을 펼치며 십천야 두 명과 견줄 만한 비밀이 많은 무인 한천.
마지막으로 적화신루의 루주이자, 말도 안 되는 무력의 소유자인 백아린까지.
어쩌면 각 분야에서 최고인 고수들이 이렇게 모여 있다.
단엽을 제외하고는 어쩌다 보니 만나게 된 사람들.
처음엔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아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로 인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들을 만나게 된 것을 단순히 운이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제는 생각한다.
이들과 함께하게 된 건 운명이었다고.
천무진이 진심을 다해 입을 열었다.
“고마워. 모두.”
이 세 사람이 없었다면 자신은 결코 이곳까지 오지 못했을 게다.
천무진이 말을 이었다.
“세 사람에게 입은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
천무진의 말에 한천이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싼 술이나 한잔 사 주십쇼.”
“오, 그거 좋네. 각오하라고 주인. 엄청 비싼 걸로 먹을 테니까.”
단엽이 곧장 공감하고 나섰다.
천무진은 두 사람의 대답에 다시금 실소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마웠다.
진심으로.
천무진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든 사 주지. 그러니 몸이나 어서 나으라고.”
천무진의 말에 한천이 씩 웃으며 답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 *
이왕 이렇게 만났는데 단둘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한천의 호들갑에, 천무진과 백아린은 떠밀리다시피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이라고 해 봤자 장원 내부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는 있었다.
어느덧 추운 겨울이 가고 조금씩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쥔 채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다.
손을 쥔 채로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좋았는지 백아린이 풋 하고 웃었다.
천무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을 한 채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아뇨, 순간 지금이 꿈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게 무슨 소리야?”
“사실 당신을 다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손을 잡고 걷고 있잖아요. 생각해 보면 신기하고, 또 좋아서요.”
천지광이 쳐 놓았던 덫에 걸린 날.
백아린은 자신의 최후를 예상했었다. 그랬기에 다시는 천무진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물론 천무진이 나타나 자신을 구해 줬지만 말이다.
백아린이 덤덤하게 말했다.
“솔직히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날 조금 무서웠어요.”
“당연한 거야.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죽는 게 무섭지 않을 리가…….”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물론 죽는 것도 무서웠죠.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웠던 게 뭔지 알아요? 당신을……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는 것이었어요.”
백아린의 그 말에 천무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천무진도 백아린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죽게 돼서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까 봐 얼마나 두려웠던가.
백아린을 지키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천무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덕분에 몸 안에 있는 자모충을 없애는 것도 가능했다.
천무진이 말했다.
“나도, 나도 그랬어. 당신을 잃게 될까 봐 너무 무섭더군.”
천무진도 자신과 같았다는 사실에 백아린은 다시금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백아린은 지금 이 모든 순간이 좋았다.
천무진이 회복돼서, 자신이 살아서 다시 그와 함께할 수 있어서.
백아린이 물었다.
“안에서 하려는 일은 잘 진행되고 있어요?”
“응, 천지광은 날 끔찍할 정도로 믿으니까. 뭐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아닌 내 몸 안에 있을 자모충이라는 존재를 믿는 거겠지만.”
“잘됐네요. 이번 기회에 제대로 한 방 먹여 주자고요.”
“그래야지. 당한 것들이 있으니 이번에 고스란히 갚아 주려고.”
무림맹과 마교의 무인들이 곧 도착할 것이고, 그 이후 오랫동안 얽히고설킨 이 모든 일들을 매듭지을 생각이었다.
점점 종지부를 향해 가는 싸움.
그걸 상기한 천무진이 백아린을 향해 재차 고마운 감정을 표현했다.
“고마워, 여기까지 함께해 줘서. 당신이 없었다면 절대 이곳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어둠에 잠식되어 가던 자신을 구해 줬고, 천무진을 위해 밤낮으로 애써 줬던 백아린이다. 그녀가 없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만큼 백아린은 천무진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어 버렸다.
동료로서도, 또 사랑하는 여인으로도.
그의 고맙다는 말에 백아린이 아니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고맙긴요. 다 제가 좋아서 한 일인 걸요.”
처음엔 적화신루를 키우기 위해 천무진을 도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적화신루의 이득을 떠나 진심으로 천무진을 돕고 싶다 생각하게 된 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꽤나 오래된 듯싶었다.
백아린은 잡고 있던 천무진의 손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함께하고 싶은 게 너무도 많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이번 싸움이 끝난 이후에나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손을 꼭 쥔 채로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을 끝내고 따뜻한 봄이 오면…… 같이 나들이라도 갈래요?”
그녀의 말에 천무진이 웃으며 답했다.
“얼마든지.”
그렇게 두 사람의 시간이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