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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85화 (284/293)

285화. 최종전 ― 그들이 있었다 (1)

형산으로 향하는 삼천에 달하는 무림맹 무인들을 이끄는 수장은 분광참혼검(分光斬魂劍) 사하봉(査夏逢)이었다.

오십 대 중반의 나이.

큰 키에 한겨울 서릿발을 연상시킬 정도의 차가운 외모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상대방을 위축시킬 정도다.

다소 마른 체구에 옷으로 가려진 몸 곳곳에는 수많은 싸움으로 인해 꽤 많은 상처가 있었고, 그런 그에게선 자연스레 맹수 같은 느낌이 풍겼다.

그렇지만 그 차가운 눈빛 속에는 언제나 흔들림 없는 강고함과 우직함이 있었다.

무림맹주 추자후의 최측근이자 얼마 전까지 새외 세력과 잦은 다툼이 있던 변방을 지켜 온 인물로 우내이십일성의 한 자리를 맡고 있는 이름난 고수였다.

그리고 사하봉의 옆을 지키고 있는 건 바로 무림맹의 총군사 위지겸이었다.

십천야를 토벌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싸움.

무림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중요한 싸움인 걸 알지만 아쉽게도 무림맹주인 추자후는 직접 나서지 않았다.

사실 마음 같아서야 백번이라도 이들을 이끌고 움직이고 싶었다.

허나 대내외적으로 이번 일은 호남성에 위치한 신월파와 은영곡의 문제가 다시금 불거지며, 그에 따른 마교와의 마찰 때문에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이런 싸움에 무림맹주가 직접 움직인다는 건 정황상 맞지 않았다.

그랬기에 추자후는 믿을 수 있는 무인인 사하봉과, 십천야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유일한 측근인 총군사 위지겸을 함께 보내 이번 사건을 매듭짓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렇게 삼천 무인을 이끌며 움직이던 두 사람은 처음엔 대외적으로 알려진 목표가 있는 방향을 따라 나아갔다. 하지만 내내 마교 쪽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다 약속했던 장소에 이르자 곧바로 방향을 선회해 버렸다.

그렇게 무림맹의 무인들은 곧장 형산을 향해 빠르게 진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마교 쪽도 마찬가지였다.

마교에서는 교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가문인 전왕묵검가(戰王墨劍家)의 가주 채륜이 그들을 이끌고 십천야의 거점을 향해 진격 중이었다.

채륜은 천무진이 마교에 입성하자마자 그의 휘하로 들어간 인물이다. 당시 그는 천무진의 부탁대로 중립의 위치를 버리고 소교주를 위해 움직인 사내로, 마교에 있을 때도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줬던 자다.

당연히 십천야에 대해 알고 있었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소교주인 악준기는 그에게 전권을 일임했던 것이다.

그렇게 무려 육천이 넘는 정예 무인들이 형산을 향해 물밀 듯 밀려들고 있는 이때.

제아무리 적화신루에게 귀문곡이 흡수당한 이후 정보력이 약해진 십천야라고 해도 이쯤 되자 이들의 목적지를 모를 수가 없었다.

처음엔 그저 자신들이 있는 방향으로 향한다, 정도로 파악했었지만 이내 그들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들의 목적지가 형산이라는 것을.

이번에도 그 사실을 가장 빠르게 알아낸 건 주란이었다. 당연히 그걸 알아내자마자 천지광에게 달려가 이 같은 정보를 전달했지만, 이번에도 그는 별다른 말 없이 그저 물러가 있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무림맹과 마교가 형산 지척에 이르렀다는 정보가 날아들었다.

이제 무림맹, 마교의 무인들은 이 비밀 거점과 채 하루도 걸리지 않을 거리까지 근접해 있었다.

주란은 불안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설마 그 두 세력이 노리는 게 우리는 아니겠지?’

순간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과 마교가 합심하여 움직인다는 건 솔직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다.

두 세력은 아예 궤를 달리하는 이들이니까.

십천야가 지금 두드러지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면 힘을 합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까진 조용히 움츠린 채로 살아온 자신들이다.

물론 뒤편으로 무림맹과 마교의 상당 부분을 잡아 삼키긴 했지만 이건 지금으로선 그들이 확실하게 알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세력이 함께 힘을 합쳐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단 하나…… 천룡성의 부탁이 있을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무림맹과 마교.

절대 섞일 수 없는 그 둘을 아우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천룡성이다. 그런 힘을 지녔기에 십천야도 천룡성을 두려워했고, 긴 시간 천운백의 제거에 힘을 쓴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천운백은 이미 죽었고, 천무진이 십천야로 돌아온 이상 더는 그걸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전무했다.

물론 며칠 전 있었던 자리에서 주란은 정말로 천운백이 죽은 게 맞냐고 의심을 하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사실이었다.

엄청난 양의 벽력탄에 당하기도 했지만, 천운백이 이곳 비밀 거점에 대해 알 리 없을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주란이 천천히 방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며 형산에 점점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풍경.

그런데…… 왜 이리 두려운 걸까?

주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봤다.

그곳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수장인 천지광의 거처가 있는 방향이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어.’

천지광의 의중을 알 수 없었기에 너무도 답답했다.

상황이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아직 인근에 있는 병력들조차 불러들이지 않았다.

물론 이 비밀 거점에만 해도 엄청난 무인들이 자리하고 있다.

숫자만 해도 대략 천 명이 훌쩍 넘을 정도로 많고, 그들 대부분이 뛰어난 무공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리고 비밀 거점에 있다는 말 자체가 오래전부터 키워진 십천야의 진짜 무인들이라는 의미였다.

그만큼 실력 하나는 뛰어났다.

다만 문제는 지금 몰려들고 있는 이들 또한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거다. 무림맹과 마교의 정예 무인들, 거기다가 숫자는 다섯 배에 가깝다.

이대로 격돌하게 된다면 자신들의 패배는 너무도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사실 주란은 이 모든 불안이 그저 자신의 괜한 걱정일 확률이 높다 생각했다.

형산은 워낙 크고, 호남에서 알아주는 명산이니 무림맹과 마교 쪽에서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기 위해 이곳을 만남의 장소로 선택한 걸 수도 있으니까.

형산은 봉우리만 해도 수십여 개가 넘는 커다란 산이다.

한마디로 형산으로 온다 해도 자신들이 표적이라서가 아닐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형산은 하루에도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이들이 오가는 곳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애써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지금 이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보려고 했지만…….

알 수 없는 불안함.

이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주란은 직접 사람을 외부로 내보냈다. 두 세력의 표적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주란은 자신의 손바닥에 묻어 나오는 식은땀을 느끼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곧 알게 되겠지.’

* * *

형산은 무려 칠십이 개의 봉우리를 지닌 커다란 산이다. 가장 큰 봉우리인 축융봉조차 다른 오악에 비해 높은 산은 아니었으나, 많은 봉우리만큼 넓이 하나는 무척이나 컸다.

그런 형산의 초입에 무림맹의 무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다른 방향에서는 마찬가지로 마교의 무인들이 준비하고 있었다.

형산은 비가 자주 왔고, 안개가 자욱한 날이 많았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지고 어두운 시각. 거기다가 안개까지 산을 뒤덮고 있었으니 무인이 아니라면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스산한 주변 환경과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이곳까지 온 무림맹 무인들의 표정 또한 왠지 모르게 굳어져 있었다.

갑작스럽게 방향을 틀어 형산까지 달려왔다.

거기다가 마교의 무인들과 거리는 제법 있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형산을 끼고 서로 대치한 듯 자리한 두 세력.

마치 당장이라도 상대와의 싸움이 시작될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그때였다.

사하봉과 함께 무림맹 무인들을 이끌고 온 총군사 위지겸이 앞에 마련해 둔 높은 돌 위로 올라섰다.

삼천에 달하는 무인들이 숨죽이고 위지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위지겸이 소리쳤다.

“무림맹 무인들은 들어라!”

내공이 실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삼천 명 무인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모두의 집중을 받으며 위지겸이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는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나섰다.”

이미 목적지가 코앞이고, 이제 더는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을 숨길 이유도 없었다. 그랬기에 위지겸은 여태까지 감춰 온 비밀들을 수하들에게 말했다.

“잘 들어라! 모두 우리가 마교의 무인들을 막기 위해 이곳에 왔다 알고 있었겠지만, 우리의 적은 그들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 하루 그들은 우리의 아군이다!”

위지겸의 말에 무림맹 무인들 사이에서 작은 술렁거림이 느껴졌다. 특히나 어느 정도 연배가 있는 무인들의 안색은 급격하게 굳어졌다.

무림맹과 마교가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고 한들, 서로를 그리 좋게 보지 않는 건 당연했다. 특히나 나이가 있는 정파의 무인들은 마교에게 어느 정도 조금씩은 원한들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무림맹과 마교가 뭔가를 위해 같이 움직이는 경우 또한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아군이라고 하니 놀라는 건 당연했다. 무림맹 무인들의 혼란을 느끼며 위지겸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 산에는 오래전부터 무림을 집어삼키려던 악인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마교와 함께 그들을 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다.”

진짜 목적을 말한 위지겸은 잠시 아래에 있는 무인들을 바라봤다.

위지겸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무림 곳곳에 숨어서 우리를 속여 왔고,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약한 이들을 억압했고, 강자들을 약이나 돈으로 매수하였다. 그리하여 무림맹을 비롯한 수많은 정파에 소속된 무인들이 죽거나 다쳤다. 오늘 우리는…… 그들을 섬멸하고자 한다.”

정확한 상황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 무림맹의 무인들은 대충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쥔 위지겸이 말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그들과 싸우던 영웅들이 있었다!”

말을 내뱉은 위지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 자리엔 없지만 그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천룡성의 무인인 천무진, 대홍련의 단엽과 적화신루의 백아린, 한천까지.

사실 무림맹은 이들에게 너무도 큰 은혜를 입었다.

아니…… 무림맹이 아닌 무림이 이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말해야 옳을 게다.

이들이 없었다면 이미 무림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테니까.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실로 외로운 싸움.

그런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서 해 왔고, 결국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 이 자리가 있을 수 있었고, 무림맹과 마교는 십천야라는 썩은 뿌리를 제거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위지겸이 재차 말을 이었다.

“오늘 우리는 그들의 의지를 받들어 이곳에 숨어 있는 사특한 이들을 모두 몰아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맹주님의 명이다!”

말과 함께 위지겸이 손에 들고 있었던 커다란 족자를 위로 치켜들었다.

펄럭!

둘둘 말려 있던 족자가 펼쳐지며 추자후가 직접 쓴 글씨들과, 무림맹주의 인장이 드러났다.

쏟아져 나오는 위지겸의 말에 당황스러운 듯 듣고 있던 무림맹의 무인들이었다.

하지만 바람에 흩날리는 무림맹주의 직인을 보는 순간 그들의 눈동자에서는 흔들림이 사라졌다.

무림맹이라는 이름 아래에 똘똘 뭉친 그들이었다.

정도 무림을 대표하는 무인들.

그들의 자부심이 움직이고 있었다.

위지겸이 소리쳤다.

“선두 앞으로!”

무림맹(武林盟)이라는 글자가 적힌 깃발을 들고 있던 무인들이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바람을 타고 펄럭이는 깃발로 다가간 위지겸이 대기하고 있던 사하봉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하봉이 곧장 수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마교보다 우리가 먼저 적들을 섬멸한다!”

와와와와와!

커다란 외침과 함께 앞장서서 달려 나가는 사하봉과 위지겸의 등 뒤로 삼천 명의 무인들이 맹렬한 기세로 따라붙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무림맹 무인들이 움직이는 걸 눈으로 확인한 마교의 본대를 이끄는 채륜이 입을 열었다.

“움직이는군.”

몸을 돌린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우리 마교가 무림맹보다 늦을 수는 없지.”

채륜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뒤편으로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가자.”

스스스슥.

그의 뒤편으로 삼천 명이 넘는 무인들이 귀신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는 무인들.

바로 마교의 정예 무인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채륜의 뒤를 따라 어둠과 안개에 휩싸인 형산 속으로 사라졌다.

무림맹과 마교의 무인 육천 명.

그들이 형산에 들어섰다.

같은 시각.

철컹.

커다란 대검을 등 뒤에 건 백아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옆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한천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정말 제가 안 가도 됩니까? 그냥 저도 같이…….”

“됐다니까. 부총관은 빠져.”

백아린이 딱 잘라 말했다.

이제는 걷는 것도 문제가 없고, 일상생활엔 큰 무리가 없을 만큼 어느 정도 회복한 한천이었지만 아직은 무공을 사용하는 건 다소 무리였다.

그랬기에 이번 싸움에서 한천은 제외하기로 했다.

그렇게 정해 놨음에도 불구하고 한천은 여전히 백아린이 걱정되는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단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백아린 말대로 해. 어차피 그 몸으로 가 봤자 도움도 안 된다고.”

“으윽! 이 자식이 사람 할 말 없게 만들어 버리네.”

한천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으로 다가온 단엽이 한천 어깨에 손을 두르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나도 있고, 우리 주인도 있으니까. 거기다가 네 대장이 호락호락 당할 사람으로 보이냐?”

말과 함께 단엽이 백아린을 향해 슬쩍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한천이 장난스러운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긴 하지. 저런 무식한 대검을 번쩍번쩍 드는 사람은 아마 우리 대장밖에…….”

“뭐? 무식?”

눈을 부라리는 백아린의 모습에 한천이 서둘러 헛기침을 하며 거리를 벌렸다. 평소 같은 모습에 백아린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을 걱정하는 한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손이 모자라지도 않은 상황에 굳이 환자인 한천을 나서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괜히 무리를 했다가는 상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백아린이 걱정 말라는 듯 한천을 근처 자리에 앉히며 입을 열었다.

“푹 쉬고 있어 부총관. 어차피 이 싸움…….”

백아린이 형산의 한곳을 바라보며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질 수가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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