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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86화 (285/293)

286화. 최종전 ― 그들이 있었다 (2)

늦은 밤.

언제나처럼 천무진을 제외한 십천야 전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주란은 그들의 움직임이 이상하게 신경이 쓰여 수하들을 외부로 내보냈고, 그들을 통해 무림맹과 마교의 목표가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주란은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무림맹과 마교의 무인들이 거의 지척에 도달했고, 그들의 목표가 자신들이라는 것도.

그 사실을 전해 듣고 가장 먼저 표정의 변화를 보인 건 자운이었다.

“뭐? 무림맹이 우리를?”

자운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하는 건 당연했다.

그는 화산파의 인물이다. 거기다가 맹주 자리를 노릴 정도로 무림맹 내에서도 힘이 있고, 뛰어난 무공 실력으로 인지도 또한 지녔다.

그런 자운이 이곳에 있다가 십천야라는 사실이 들통난다면?

여태 쌓아 온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야 말 게다.

이 난감한 상황에 자운이 당황하고 있을 때 주란이 서둘러 휘장 안쪽에 있는 천지광을 향해 말했다.

“어르신! 더는 여유가 없어요. 지금이라도 서둘러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호남에 있는 모든 십천야 휘하의 병력들을 불러 모아 이곳에 온 무림맹과 마교에 자신들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드러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포위를 당해 바깥으로 연락을 넣는 것도 그리 녹록지는 않은 상황.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차라리 도망쳐서 다른 거점으로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주란은 뭐가 되어도 상관없으니 천지광이 이 두 가지 중 하나의 결단을 내리길 원했다.

외부에 있는 부하들을 긁어모아 싸우거나, 아니면 우선 도망치거나.

그런데…….

“천무진을 불러와라.”

천지광은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수하에게 천무진을 이곳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 그의 행동에 주란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지금 천무진은 왜 부르시는 거죠? 시간이 없어요. 어서 외부에 있는 이들을 불러오거나, 아니면 포위망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 빠져나가야 해요.”

“기다리거라.”

“어르신 지금은 기다릴 여유가…….”

“다시 말하지 않는다. 난 분명 기다리라고 했다, 주란.”

낮지만 소름 돋는 목소리.

주란은 움찔하며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지광의 말에 승복한 것은 아니었다.

‘망할! 노망이라도 났나. 저 노인네가 요즘 왜 이러는 거야?’

더는 못 참겠는지 주란은 속으로 천지광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힘에 매료되어 진심으로 천지광을 따랐던 주란이다.

하지만 요즘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대체 뭘 하자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결국 주란은 입을 꾹 닫은 채로 천무진을 기다렸고, 이내 천지광의 부름을 받은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천무진은 들어서자마자 짧게 천지광을 향해 예를 갖췄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인사를 건네는 천무진의 귓가로 기다렸다는 듯 전음이 날아들었다.

『천룡혼의 상태는 어떠하냐.』

급한 듯 물어 오는 질문에는 천지광의 조급함이 느껴졌다. 그걸 알기에 천무진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준비해 둔 말을 건넸다.

『한 시진이면 완성 됩니다.』

『……확실하더냐?』

『물론입니다.』

천무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천지광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한 시진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겠군.’

사실 천지광은 주란과 달리 전혀 급하지 않았다.

무림맹과 마교의 무인들이 자신들의 비밀 거점을 포위한다 해도 전혀 위험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무진은 곧 천룡혼을 완성시킬 것이고 그 순간 현재의 모든 것은 그 의미가 없어질 테니까.

다만 문제는 그전까지 자신을 들들 볶아 댈 저 두 명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아예 죽여서 시끄러운 입을 막아 버릴까 싶은 생각도 없잖아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괜히 문제를 일으키기보다는 조용히 상황을 넘기는 쪽이 더 낫다 여긴 천지광이었기에 그는 자연스레 거짓말을 내뱉었다.

“다 모였으니 이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해야겠군. 내가 아무런 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 다들 걱정이 많았겠지만 사실 모두 준비해 두었다.”

천지광의 그 말에 자운과 주란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지금 이 상황에 잔뜩 걱정을 하던 두 사람이다.

그걸 알기에 천지광은 둘을 향해 걱정 말라는 듯 있지도 않은 사실을 꺼내어 거짓말을 이어 갔다.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사실 며칠 후 이곳으로 내가 명령을 내린 십천야의 무인들이 돌아올 것이다. 그때 그들과 함께 이곳으로 올 무림맹과 마교의 쓰레기들을 모두 쓸어버리도록 하지.”

“그, 그게 언제입니까. 어르신.”

지금 이 상황에 전전긍긍하던 자운이 급히 물었다. 그러자 천지광이 걱정 말라는 듯 그 질문에 답했다.

“놈들이 움직인다는 소식을 듣고 만약에 사태를 대비하여 바로 연락을 넣어 놓았으니…… 얼추 이틀 정도면 될 것 같구나.”

이미 무림맹과 마교의 무인들이 형산에서도 비밀 거점이 자리하고 있는 봉우리를 겹겹이 포위한 상태였다.

언제 들이닥쳐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란 의미다.

그런데 아군이 도착하는 데까지 필요한 시간은 이틀.

허나 이틀이라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에 걱정을 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바로 이 비밀 거점이 워낙 견고하게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억지로 진법을 열고 들어오려면 며칠의 시간이 있어도 모자랄 게다. 게다가 그 또한 숨겨진 진법의 위치를 찾은 이후의 이야기니, 그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충분히 열흘 이상을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아군 병력이 도착하는 데 이틀이 걸린다는 천지광의 말에 두 사람은 걱정하기보다는 안심했다.

이제야 걱정을 지운 채로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천지광이 말했다.

“오래들 기다렸구나. 이제 곧 우리 십천야가 세상에 나갈 때가 온다. 내 너희의 고생을 모두 보상해 주도록 하지.”

“고생은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걸요.”

주란이 밝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자운이 빠르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르신, 오랜 기간 참아 왔던 십천야가 세상에 나갈 날이 왔는데 축배라도 들어야 하는 것 아닌지요.”

“축배?”

“예, 오랜 대업이 진정으로 시작되는 날 아니겠습니까. 이런 날은 당연히 기념해야지요.”

자운의 말에 휘장 안에 홀로 자리하고 있던 천지광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대업? 뭐 맞는 소리다.

서로 생각하는 그 대업이라는 것이 너무도 다른 게 문제였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이 고작 한 시진도 남지 않은지금, 천지광 또한 무척이나 떨렸고 설레었다. 그러던 차에 제안해 온 축배를 들자는 자운의 이야기는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천지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이런 좋은 날에 술이 빠질 수는 없는 법이지. 여봐라! 술상을 준비하라!”

천지광의 명령에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수하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몇몇 이들이 술상을 든 채로 천지광의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각자의 자리에 앉은 채로 십천야들 모두가 술상을 마주했다.

휘장 안쪽에서 천지광이 술잔을 높게 들어 올렸다.

“……오랜 염원을 위하여.”

그 말과 함께 천지광은 곧장 술을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뜨거운 열기가 순간적으로 몸 안에 가득 찼다.

참으로 오래 기다려 왔던 일이다.

과거로 돌아갈 것이고, 이번 생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게다. 그 무엇 하나 빼앗기지 않고 모든 걸 가지고야 말 것이다.

천룡성마저 발아래 두는 진정한 무림의 주인!

그리고 그렇게 될 시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는지 술잔을 쥔 그의 입가가 미소로 번들거렸다.

그렇게 휘장 안쪽에서 천지광이 혼자만의 기쁨에 젖어 있는 사이.

술잔을 쥔 천무진이 천천히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제법 술자리가 길어지며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른 무렵이었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천지광의 집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기대와 술기운에 한껏 기분이 좋아졌던 그가 집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와 무릎을 꿇는 수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어, 어르신 진법이 뚫렸습니다!”

그 한마디에 여태까지 기분 좋게 올라 있던 술기운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뭐라고?”

벌떡.

놀란 듯 휘장 안에 앉아 있던 천지광이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웠다.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웃으며 즐기고 있던 자운과 주란의 표정 또한 순식간에 굳어졌다.

진법이 뚫리다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겨우 이 정도 시간이라면 찾아내는 것조차 불가능한 게 정상이거늘, 거처를 숨겨 놓은 진법을 찾은 것뿐만이 아니라 그걸 파훼하고 안으로 들어왔다니. 당연히 믿기 어려웠다.

자운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헛소리! 이곳을 지키는 진법을 외부에서 이리 빠르게 부수는 건 불가능하다! 네놈이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제, 제가 직접 봤습니다! 진법이 깨졌고, 그곳을 통해 무림맹과 마교의 무인들이…….”

“헛소리하지 말래도! 내 이놈을…….”

자운이 화를 못 참고 검을 뽑아 들려는 그때였다.

갑작스러운 수하의 보고에 멍하니 서 있던 주란이 입을 열었다.

“설마…… 내부?”

주란의 그 중얼거림에 자운이 움찔했다.

아까 그의 말대로 외부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진법을 파훼하려 했다면 꽤나 긴 시간이 소요되었을 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빠르게 내부로 진입했다는 건…… 진법을 파훼한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열어 주었다는 의미였다.

자운이 손으로 술상을 내려쳤다.

쾅!

술병이 넘어지며 그의 손은 술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상황 파악을 끝낸 자운이 이를 악문 채로 말했다.

“내부에 간자가 숨어 있었구나!”

“서둘러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최대한 입구에서 막고는 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곧 수비벽이 뚫리고 뒤쪽에 있는 나머지 무인들 모두가 진법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겁니다.”

수하의 다급한 보고.

그렇지만 지금 천지광은 그것보다 다른 부분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적들이 침입했다는 말에 그는 서둘러 천무진을 향해 전음을 날리는 중이었다.

『천룡혼은 얼마나 남은 게냐?』

『이 각 반 정도 남았습니다.』

대답을 들은 천지광은 곧장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로 돌아가기 전에 진법이 뚫리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상관없겠군. 어차피 나에겐 이 각 반 정도의 시간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지금 이곳 비밀 거점에 자리하고 있는 무인들과 눈앞에 있는 십천야의 생존자인 자운과 주란까지.

이들이 있다면 필요한 시간 이상을 버는 건 충분했다.

천지광은 자신에게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자운! 주란! 두 사람은 당장 움직여 적들을 막아라!”

“그렇지만 지금 병력으로는…….”

적의 숫자는 육천이고, 자신들은 기껏해야 천이삼백 명 수준에 불과하다. 이대로 싸운다는 건 결국 패배를 하게 될 거라는 의미였다.

주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천지광이 말을 자르며 답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곧바로 연락을 취해서 근방에 도착해 있던 무인들을 불러 모을 생각이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 보다 많은 수하들이 온 다음에 싸우려 했거늘,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다소 피해를 감수하는 수밖에. 대기시켜 놓은 무인들에게 연락하고 나도 움직이도록 하지. 그러니 두 사람은 그때까지 어떻게든 적들의 진입을 막도록!”

천지광이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내뱉었다.

애초에 연락을 한 적이 없거늘, 근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무인들이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저 이 두 사람이 시간을 끌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뿐이었다.

천지광의 명령이 떨어지자 자운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읏! 그럼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적의 침입을 보고한 수하와 함께 서둘러 나서는 자운의 뒤로 주란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런 그녀를 향해 천지광이 말했다.

“서두르거라! 나도 곧장 갈 테니.”

“……네 어르신.”

말과 함께 주란이 몸을 돌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이 나서자 서둘러 연락을 취할 것처럼 굴던 천지광이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앞에 놓여 있던 술잔을 들어 올려 다시금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런 그를 향해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급히 연락을 취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 방금 전에 상황을 보고하러 왔던 녀석에게 전음으로 모든 명령을 내려 두었으니까. 내가 다 생각한 바가 있어서 이러는 것이니 너는 신경 쓰지 말고 천룡혼의 완성에 더욱 집중하도록 하거라.”

천지광의 검은 속내를 모두 알고 있는 천무진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어르신.”

* * *

밖으로 나선 주란은 슬쩍 뒤편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있었던 천지광의 집무실이었다. 그런데 그 집무실을 바라보는 주란의 표정이 뭔가 묘했다.

‘인근에 병력을 대기시켜 놨다고?’

천무진에게 당해 귀문곡이 무너진 이후 십천야의 정보력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그 이후로 그나마 십천야의 정보를 도맡고 있던 건 주란과 그녀가 이끄는 홍화루였다.

그들의 정보력이 여타 손꼽히는 정보 단체에 비해 많이 모자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귀머거리에 장님은 아니었다.

홍화루는 적당한 정보력을 지닌 정보 단체였다.

그랬기에 알고 있었다.

최소한 이 인근에…… 복귀한 십천야의 부대는 아무도 없다는 걸.

그걸 알기에 방금 전 방에서 나서기 직전에도 머뭇거렸던 거다.

‘대체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천지광이 자신들을 속인 이유를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부터 그는 십천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마치 모든 게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랬기에 이해가 안 됐다.

수십 년을 키워 온 십천야가 망가지는데 대체 왜 천지광은 이토록 덤덤한 것일까?

잠시 머리를 쥐어짜 봤지만 주란으로서는 딱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고민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곳에 가면…… 무조건 죽어.’

어차피 지원 병력은 없다. 그렇다면 반의 반도 안 되는 숫자로 적들과 싸워 봐야 장렬하게 죽는 것 외에 다른 미래는 도저히 그려지지가 않았다.

진법에 감춰진 공간이라 안전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형편은 완전히 달라졌다.

오히려 자신들이 진법 안에 갇혀 버린 꼴이 된 것 아닌가.

주란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그녀의 선택은…….

‘이곳에서 빠져나가야겠어.’

천지광이 무슨 생각인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모두가 죽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진법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와 한창 싸우고 있는 지금이 그나마 포위망이 느슨할 것이다.

시기를 놓치면 이내 포위망은 천라지망처럼 견고해질 것이고, 그때는 제아무리 주란이라고 해도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우선은 도망쳤다가 상황을 보고 혹시라도 천지광이 뭔가 준비해 둔 것이 있다 여겨지면 돌아오고, 아니면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만 했다.

마음을 정한 순간 주란은 몸을 돌렸다.

서둘러 도망쳐야 하는 순간이지만 그 전에 하나 챙겨야 할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홍화루에 연관된 이들을 명단으로 작성해 둔 비밀 장부였다.

홍화루는 십천야에게 커다란 힘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그 힘을 계속해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장부가 필요했다.

오늘을 기점으로 십천야가 무너진다면 주란 또한 자신이 지닌 힘의 많은 걸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비밀 장부만 손에 쥐고 있다면 다시금 재기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정파나 사파, 마교의 많은 이들이 지금처럼 자신의 말에 쩔쩔매게 될 테니까.

거기다가 홍화루에서 사용되는 강렬한 아편의 제조법을 아는 이들 또한 그녀가 관리하고 있으니 더더욱 문제가 적었다.

주란은 서둘러 자신의 거처로 달려갔다.

시간이 없었다.

달리는 와중에도 주란은 지금 이 비밀 거점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변에서 많은 이들이 몰려드는 무림맹과 마교의 연합군을 막아 내기 위해 서둘러 진법의 입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을 헤치며 빠르게 걸음을 옮긴 주란은 이내 자신의 거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가 곧장 비밀 장부를 숨겨 두었던 방으로 향했다.

벌컥!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벽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이내 주란의 손이 며칠 전 이 방에 왔었던 천무진이 의심스럽게 눈여겨보았던 족자를 향해 뻗어졌다.

그녀는 거침없이 벽에 걸려 있던 족자를 팽개치듯 뜯어냈다.

족자를 치우자 뒤편에는 자그마한 구멍이 있었고, 그곳에는 목함(木函)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주란이 황급히 그 목함을 옆구리에 끼며 막 몸을 돌릴 때였다.

“어이.”

“……!”

들려오는 목소리에 주란이 움찔했다.

방을 나서기 위해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던 그녀다. 그런데…… 자신의 등 뒤에서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상대는 자신과 한 방에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란은 지금까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상대가 고수라는 의미였다.

주란의 이마로 식은땀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상태로 애써 그녀가 태연한 척 몸을 돌릴 때였다.

상대의 모습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고, 그 순간 주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벌어졌으니까.

“네, 네가 어떻게 살아…….”

주란은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곳에 백아린이 있었으니까.

얼마 전 천지광의 계획에 빠져 죽었을 거라 믿었던 그녀다. 그런데 그 당사자가 살아 있었다.

허나 놀랄 일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

말과 함께 백아린이 손에 쥐고 있는 뭔가를 들어 올리며 가볍게 흔들었다.

그제야 백아린의 손에 들린 물건을 확인한 주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건 아주 익숙한 서책이었다.

놀란 주란이 황급히 옆구리에 끼고 있던 목함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어, 없어?’

주란의 시선이 곧바로 백아린의 손에 들린 서책으로 향했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저건 바로 지금 주란이 가지고 도망치려 했던 홍화루의 비밀 장부가 분명했다.

주란이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그건 내 거야! 어서 내놔!”

그녀의 고함에 백아린은 들고 있던 비밀 장부를 바로 옆에 있는 탁자에 내려놨다.

그러고는 이내 손을 등 뒤로 뻗어 자신의 대검을 움켜쥔 채로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가져가. 단…… 가져갈 수 있다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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