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붕괴 ― 눈치챘나 보네 (2)
단엽이 낀 권갑에는 불꽃이 넘실거렸다.
피어오르는 열기, 곧 단엽과 자운 사이에서 매섭고 강인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천하를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고수들 간의 격돌.
그 싸움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파괴했다.
콰앙! 쾅!
둘이 움직이는 공간을 따라 땅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고, 인근에 있는 나무나 건물들은 버텨 내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단엽의 주먹이 공간을 파고들었다.
퍼엉!
열화폭뢰(熱火爆雷)의 초식이 펼쳐지며 근거리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자운 또한 그 폭발에 휘말리긴 했지만 재빠른 움직임으로 큰 피해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요동쳤다.
화산파의 무공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이 빠르게 단엽을 덮치고 들어갔다.
단엽은 물러서지 않고 밀려드는 검을 향해 주먹으로 맞섰다.
콰콰쾅!
주먹과 검이 충돌하며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서로를 죽일 듯이 쏟아 내는 둘의 공격은 무척이나 치명적이고, 빨랐다.
둘 사이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으로 인해 주변에 있던 다른 무인들마저 밀려 나갔다.
순간 뻗어져 나간 단엽의 주먹이 찔러 오는 검을 밀쳐 내며 자운에게 틀어박혔다. 하지만 그 공격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기회를 잡은 단엽의 주먹이 자운을 연달아 후려쳤다.
퍼버버버벅!
순식간에 파고드는 주먹에 자운은 서둘러 호신강기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달아 치고 들어오는 단엽의 공격을 아무런 피해도 없이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콰앙!
밀려 나간 그가 사정없이 바닥을 구르는 사이.
번쩍.
하늘로 치솟아 오른 단엽이 주먹을 있는 힘껏 뒤로 잡아당겼다.
열화낙뢰(熱火落雷)의 초식이 순식간에 쏟아졌다.
주먹에 맺힌 붉은 불꽃이 유성우처럼 떨어져 내리며 쓰러져 있는 자운을 덮쳤다.
콰쾅! 콰앙! 쾅!
쓰러져 있던 자리가 모두 산산조각 나는 그때 그 사이에서 자운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빠르게 휘몰아치는 공격에 타격을 입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그는 건재했다.
그의 검이 빠르게 단엽의 팔뚝을 베고 지나갔다.
투둑.
바닥에 착지한 단엽이 슬쩍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권갑이 있는 곳을 조금 지나서부터 어깨 직전까지. 제법 긴 검상이 생겨나 있었다.
자운은 십천야들 중에서도 강한 편에 속한 인물이다.
백아린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주란과는 실력 차가 무척이나 컸다.
다친 상처를 보며 단엽은 오히려 유쾌한 듯 웃음을 흘렸다. 슬쩍 몸을 돌려 바라본 뒤편에는 검을 든 채로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자운이 있었다.
그렇지만 자운 또한 완전히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연달아 쏟아지는 공격에 일차적으로 타격을 입었고, 이어서 팔을 베고 지나가는 순간 쏟아 낸 공격으로 인해 목 부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단엽의 손바닥에 맞은 흔적이었다.
자운은 손으로 목을 어루만졌다. 가볍게 스친 것 같았는데 마치 목에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화끈거렸다.
자운이 단엽을 바라보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를 만난 이후로 반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 봤을 때에 비해 단엽은 훨씬 더 강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저 착각일까 아니면…….
순간 상처 입은 성난 맹수처럼 단엽이 달려들었다. 그의 몸 주변으로 불꽃이 회오리쳤다.
콰콰콰쾅!
순식간에 가로로 땅이 박살 나며 모든 것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힘을 버텨 내기 위해 자운은 이를 악문 채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드드드드드!
자운의 몸이 뒤로 마구 밀려 나갔다.
동시에 주변으로 퍼진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태울 것처럼 밀려들었다.
연달아 수비에만 집중하던 자운이 빠르게 내력을 끌어올렸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화산파의 무공을 펼쳤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십천야를 통해 얻게 된 실전된 무공.
귀마삼도(鬼魔三道)였다.
번쩍!
허공으로 치솟은 검에 순간적으로 강기가 맺히더니, 이내 휘둘러지는 방향에 따라 세 갈래로 나뉘어져 날아갔다.
그 강기들은 지금 단엽이 있는 곳을 시작점으로 하여, 퇴로로 삼을 만한 곳까지 빠르게 조이고 있었다.
절묘한 순간 파고드는 공격에 단엽은 양손을 교차시킨 채 앞으로 몸을 내던졌다. 그의 권갑이 밀려드는 강기와 충돌했다.
콰아앗!
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땅이 사정없이 솟구쳤다.
그 모습을 보며 자운의 눈동자가 빛났다.
‘이번 건 제대로……!’
하지만 채 좋아하기도 전에 자운은 그 안쪽에서 꿈틀거리며 터져 나오는 힘을 막아 내야만 했다.
쿠콰콰콰쾅!
땅을 가르며 밀려드는 공격에 자운이 놀란 듯 몸을 비틀었을 때였다. 부서진 대지 사이에서 단엽의 몸이 화살처럼 날아들고 있었다.
카앙!
날아드는 주먹을 검으로 받아 냈다.
하지만 그 순간 빠르게 반대편 주먹이 얼굴에 틀어박혔다.
목이 홱 돌아가면서 비틀하는 와중에서도 자운의 검이 빠르게 단엽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그 순간 솟아오른 단엽의 발이 그대로 자운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빠각!
뼈가 부러지는 것만 같은 기괴한 소리와 함께 어깨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다.
“으으윽!”
서둘러 거리를 벌린 자운이 손으로 어깨를 감쌌다.
다행히 손을 움직여 상처를 입히긴 했지만, 이번 공격으로 인해 어깨가 부어올랐고, 그 때문에 움직임이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단엽이 자신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제법이네. 하지만 말이야…… 그때 그 녀석보다는 약해.”
정체 모를 누군가를 지칭하며 자신을 그보다 약하다고 말하는 단엽에 자운이 울컥하며 되물었다.
“그 녀석?”
단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얼마 전에 십천야들 중에 한 명이랑 싸웠거든.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반조라고 했던 거 같은데?”
반조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자운은 움찔했다.
그가 백아린과 한천을 제거하기 위해 나섰다가 죽었다는 사실은 전해 들었다. 당시엔 뒤늦게 나타난 대홍련으로 인해 죽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단엽이라는 사내는 결코 싸움을 피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아마도 반조는 단엽과 일대일로 붙었을 게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반조는 죽었고, 단엽이 이리도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는…….
‘반조보다 이놈이 더 강하다고?’
반조는 천지광이나 천무진을 제외한 나머지 십천야들 중에서 최고로 강하다고 해도 손색이 없는 사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운 또한 반조나 매유검에게는 한 수 접어 주지 않았던가.
그만큼 강했던 것이 반조였다.
그런 그를 단엽이 이겼다니…….
그 사실에 잠시 움츠러들었던 자운이었지만 이내 그는 실소를 흘렸다.
“큭큭, 고작 대홍련의 애송이 따위에게 이리도 골머리를 썩을 줄이야.”
“어라? 방금 전에 맞은 곳이 어깨인 줄 알았는데 머리였나? 정신이 좀 어떻게 된 것 같은데.”
대홍련을 우습게 보는 듯한 말투에 단엽이 곧바로 이죽거렸다.
그런 그의 말투에 자운은 잠시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단엽에게 뭔가 말을 쏘아 내려던 자운이었지만 순간 뭔가가 눈에 들어온 탓에 입을 닫았다. 그건 다름 아닌 열려 있는 진법의 통로였다.
무림맹과 마교의 무인들이 쏟아져 들어오게 만든 진법의 통로.
그런데 시간이 조금씩 지나며 결국 그 통로가 더욱 커져 버린 것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바깥에서 순간적으로 더욱 많은 인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주 찰나지만 자운은 기대를 걸었다.
무림맹과 마교의 무인들이 아닌 천지광이 말한 아군들이 나타나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건 헛된 바람에 불과했다.
지금 쏟아져 들어오는 이들은 모두 무림맹과 마교의 무인들이었으니까.
‘크으 우리 편은 대체 언제 온다는 거야?’
천지광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모르는 자운은 계속해서 희망의 끈을 잡고 있었다. 그것이 썩은 동아줄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로 말이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무인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진형이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겠군.’
자운은 빠르게 검에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몸 주변으로 스산한 기운이 조금씩 몰려들었다. 그 분위기가 실로 묘했는데 마치 죽은 시체 수십 구를 마주한 듯한 느낌이었다.
풍겨져 오는 분위기를 보며 단엽은 지금 자운이 펼치려는 무공이 화산파의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자운에게서는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 정도의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야…….’
꽉 쥔 단엽의 주먹에서 뜨거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동시에 모든 걸 태울 것만 같은 뜨거운 열기가 주변을 집어삼켰다.
열화신류구천아(熱火神流九川牙).
열화신공의 절초이자, 단엽이 펼칠 수 있는 최강의 초식.
반조를 무릎 꿇게 했던 초식 또한 바로 이것이었다.
순간 자운의 몸 주변으로 수십여 개의 해골 형상들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내 그 형상들이 매섭게 회전했다.
‘이번 공격으로 죽인다!’
자운이 이를 갈며 단엽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동시에 단엽이 앞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미친 듯 달려 나가던 단엽.
그의 주먹에서 아홉 개의 불기둥이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앙!
* * *
쪼르르.
천지광은 조용히 술잔에 술을 채우고 있었다. 그가 잔에 채운 술을 단번에 들이켜고는 이내 같은 장소에 있는 천무진을 향해 물었다.
“천룡혼은 얼마나 남았느냐.”
“일각이면 완성될 겁니다.”
천무진의 대답에 천지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목이 타는지 재차 술을 따라 한 모금 삼켰다. 물론 술이 갈증을 해결해 주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계속해서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지금 천지광은 천무진에게서 천룡혼을 받기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수천에 달하는 무인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지만 천지광에게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일각 후에 완성될 천룡혼을 건네받고 이번 생에서의 모든 일은 여기서 끝낼 생각이었으니까.
천지광은 이상할 정도로 떨렸다.
그렇지만 그는 최대한 담담한 척 술잔을 기울이며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금 물었다.
“슬슬 끝났느냐?”
“아직 조금 남았습니다.”
“…….”
조금 더 남았다는 말에 천지광은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졌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없던 버릇이었다.
그렇게 손톱을 잘근거리던 천지광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냐?”
“네, 아직입니다.”
“후우우!”
이어지는 천무진의 대답에 천지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는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겠는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휘장 바깥으로 걸어 나와 방 안을 서성이며 불안한 듯 손으로 얼굴을 만져 댔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른 후…….
“천룡혼은?”
“조금 더 기다리시죠.”
이번에도 아직이라는 천무진의 대답에 결국 천지광이 폭발했다.
“이런 망할! 아까 말한 일각이 지나도 한참은 지났다! 대체 언제 그 빌어먹을 천룡혼이 완성된단 말이냐!”
처음엔 그저 자신이 너무 조급해져서 자꾸 천무진에게 완성되었는지 확인을 한다 여겼다. 그랬기에 애써 꾹꾹 질문을 참으며 속으로 시간을 세기까지 하면서 상황을 확인했다.
그런데 일각이면 될 거라는 말과는 달리 그 시간이 지나고도 한참은 있었는데 아직도 기다리라고만 하니 부아가 치민 것이다.
그때 소리를 내지르며 격한 반응을 내보이는 천지광의 모습을 천무진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다.
지금처럼 이렇게 화를 참지 못할 정도로 잔뜩 기대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이미 무림맹과 마교의 무인들이 상당수 내부로 진입했을 터.
이제 더는 천지광에게 이용당하는 척 연극을 해 줄 필요가 없었다.
화를 쏟아 내는 천지광을 바라보던 천무진이 갑자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잠시 폭발했지만 애써 화를 눌러 담으며 천무진에게 말을 걸려고 하던 천지광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천천히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지광이 애써 아니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설마 너…….”
말을 내뱉는 천지광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알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나 나올 법한 좌절감이 가득 묻어 있는 그런 목소리. 그걸 듣는 순간 그제야 천무진은 자신의 모든 계획이 완성되었음을 느꼈다.
수십 년간 십천야의 조종을 받으며 지옥을 살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걸 되갚아 줄 순간이 온 지금…….
천무진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쩌지. 너한테 줄 천룡혼은…… 처음부터 없었는데.”
그 한마디에 천지광의 세상이 무너졌다.
천지광이 머리를 감싸 쥔 채로 소리를 내질렀다.
“으으! 으으으! 으으으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