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마무리 ― 무림을 부탁하마 (2)
천무진이 사부인 천운백을 만나기 위해 산동으로 향하는 사이.
한천은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천의 옆에는 단엽이 함께하는 중이었다.
십천야와의 싸움이 끝나고 한천은 어딘가로 가고자 했다. 그렇지만 아직 부상이 완치되지 않은 그를 혼자 보내는 것이 걱정되었는지 단엽이 손수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천무진과는 다른 곳으로 향한 두 사람은 어느 자그마한 산을 오르고 있었다.
한천의 뒤를 따라 오르는 단엽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야, 대체 이 밤에 어딜 가는 거야?”
물어보지도 않고 한천을 무작정 따라나섰던 단엽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며 객잔에 들어서기에 조금 쉴까 싶었거늘, 한천은 술을 한 병 사 들고 곧장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마을을 나와 근처에 있는 산길을 타고 오르던 한천은 뒤에서 투덜거리는 단엽을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객잔에서 쉬고 있으라니까.”
“다친 널 어떻게 혼자 보내냐?”
“허어, 아직까지 환자 취급이야?”
억울하다는 듯 말하는 한천을 향해 단엽이 그가 들고 있는 술병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술도 절대 금지다. 백아린이 너 술 먹은 거 알면 그냥 뒀냐고 날 들들 볶아 댈걸.”
둘이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목적지로 향할 때 백아린은 몇 차례고 단엽에게 신신당부했다. 한천은 환자니까 절대 술을 먹지 못하게 하라고 말이다.
한천이 술을 먹지 못하도록 관리하느라 단엽 또한 덩달아 반강제로 금주를 하고 있는 요즘이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산을 오르던 도중 한천이 점점 걸음을 늦췄다.
앞장서서 나아가던 한천이 멈추어 선 곳.
그의 앞에는 초라한 무덤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묘비 하나 없어 누구의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자그마한 무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한천이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부탁을 한 덕분에 종종 이 무덤을 관리해 주는 이가 있었고, 그래서인지 최소한의 구색은 갖춰져 있는 상태였다.
가만히 선 채로 무덤을 바라보는 한천의 옆으로 단엽이 천천히 다가왔다.
최대한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천이었지만, 단엽은 그 안에 담긴 슬픔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한없이 아련한 눈동자로 무덤을 바라보는 한천을 향해 단엽이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 무덤인데?”
“……내 가면을 짊어진 녀석.”
“가면?”
한천의 말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단엽이 중얼거렸다. 그러는 사이 한천이 들고 있던 술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는 무덤 위로 술병 안에 든 술을 가볍게 뿌렸다.
스윽, 슥.
무덤 위에 술을 흩뿌린 한천이 이내 손을 멈춘 채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임무열.”
한천이 찾아온 이 무덤의 주인은 바로 대장군 시절 그를 따랐던 임무열이라는 사내의 것이었다.
한천을 살리기 위해 가면을 뺏어 쓰고 스스로 목숨을 버렸던 그가 이곳에 잠들어 있었다.
한천을 위해 대장군인 척 흉내를 내며 죽어 간 탓에 그에겐 묘비 하나 세워 줄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지금 평화롭게 살고 있는 임무열의 가족들이 위험해질 테니까.
술을 뿌려 주고 가만히 무덤을 바라보던 한천이 힘겹게 손을 뻗었다.
무덤으로 향하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 차가운 흙이 한천의 손끝에 닿았다.
손을 가져다 댄 그가 무덤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십수 년 전 황궁에서 확인 후 버려 버린 임무열의 시신을 비밀리에 회수한 한천은 그를 묻어 준 이후 단 한 번도 이곳에 찾아오지 못했다.
자신을 대신해서 죽어 준 임무열과 마주할 용기가 채 나지 않아서였다.
꼭 살아남으라는 말과 함께 지어 보였던 그 마지막 얼굴이 아직까지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떠올리는 것이 괴로워서, 미안해서…….
하지만 이번에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며 한천은 후회했다.
임무열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랬기에 이토록 용기를 내서 임무열의 무덤을 찾아왔고, 지금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무덤을 어루만지던 한천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못난 대장이라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리고…… 고맙다. 나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줘서.”
말을 마친 한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내 무덤을 바라보며 손을 말아쥐더니 포권을 취했다.
그렇게 포권을 취한 채로 한천은 한참을 눈을 감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 상태로 굳은 듯 자리하고 있던 한천이 눈을 떴고, 이후로도 가만히 무덤과 마주하고 있을 때였다.
뒤편에서 한천의 행동을 보고만 있던 단엽이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한천은 옆에 선 그를 바라보며 픽 웃어 보였다.
“너무 기다리게 했나?”
“아니, 얼마든지 더 기다려 줄게. 그냥 나도 인사나 한 번 하려고.”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무덤.
하지만 한천의 몇 마디 중얼거림만으로도 이 무덤의 주인이 어떠한 사람인지 얼추 짐작이 갔다.
포권을 취한 단엽이 입을 열었다.
“나도 당신이 누군지 모르고, 당신도 내가 누군지 모를 테니 그건 그렇다 치고. 어찌 됐든 이놈을 살게 해 줘서 고마워. 이 녀석이 있어서 내 삶이 아주 조금 더 즐거워졌거든.”
“겨우 조금?”
“그럼 얼마나 많이를 바라냐.”
단엽의 말에 한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마치 이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무덤을 향해 말했다.
“봐라, 무열아. 내가 이러고 산다.”
“시끄러워 인마. 그럼 나도 인사 끝냈으니 조금 더 뒤로 가서 기다릴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 마저 하고 오라고.”
“아냐, 그럴 필요 없어. 할 말은 대충 다 했거든.”
말을 끝낸 한천이 임무열이 묻혀 있는 무덤을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앞으론…… 종종 찾아오마.”
옆에 서 있던 단엽이 몸을 돌리는 한천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씩 웃었다.
단엽이 말했다.
“그럼 가 볼까.”
그 말을 끝으로 막 두 사람이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 대장!
걸음을 옮기던 한천이 멈칫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울린 이 목소리는 분명 자신의 수하였던 임무열의 것이었다.
자신의 바람이 만들어 낸 환청일까?
아니면…….
놀란 듯 황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묘비조차 없는 조그마한 무덤이 자신을 마주하고 있을 뿐.
그 순간 한천의 머릿속에 다시금 환청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 꼭…… 행복하시길.
점점 멀어지는 그 목소리에 멍하니 서 있던 한천의 옆구리를 단엽이 쿡 치며 입을 열었다.
“뭐 해?”
자신을 향해 이상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는 단엽을 슬쩍 바라본 한천이 이내 픽 웃었다.
그래, 꼭 행복하게 살아 주마.
* * *
백아린은 천무진과 함께 나란히 걷고 있었다.
어느덧 찾아온 완연한 봄, 햇살은 따스했고 세상은 온통 초록빛을 머금었다. 그런 햇살 아래에서 백아린의 손을 꼭 쥔 채로 걷던 천무진이 슬쩍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연못 한가운데 위치한 정자가 있었는데, 그걸 확인한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저기서 잠깐 앉았다가 갈까?”
“그래요.”
천무진의 제안에 백아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엽과 한천이 용무를 마친 후 돌아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랬기에 지금 머무는 이 마을에서 두 사람과 만나기로 했다.
그녀는 내일 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까지 천무진과 오붓하게 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나 좋았다.
평화롭고 한가한 시간들이 바람처럼 흘러갔다.
어쩌면 심심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일 년 가까이 너무도 바쁘게 살아온 탓인지, 오랜만에 긴 휴가를 받은 느낌이었다.
천무진이 말한 정자에 도착한 두 사람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쏟아지는 햇살과 연못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마음을 무척이나 평온하게 만들어 줬다. 백아린이 연못 안쪽을 가리키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저기 봐요. 저 물고기 뭔가 부총관 닮지 않았어요?”
“큭!”
백아린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연못 안쪽을 바라봤던 천무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별거 아닐 수 있었지만 뭔가 묘하게 한천처럼 느긋해 보이는 물고기 하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런 농담에 웃었다는 사실이 민망했는지 천무진이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런 그를 곁눈질로 살피며 웃고 있던 백아린은 곧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뻥 뚫려 있는 장소였기에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보이는 풍경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렇게 백아린이 주변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천무진이 말없이 백아린의 옆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내 천무진의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봐요?”
“……주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예상치 못한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이 눈을 동그랗게 뜰 때였다. 천무진이 슬그머니 품 안으로 손을 넣더니 이내 뭔가를 꺼내어 들었다.
그가 꺼내어 든 물건을 확인한 백아린이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어?”
천무진의 손에 들린 건 당혜(唐鞋:꽃신)였다.
붉은색의 당혜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수놓아져 있었고, 무척이나 화려했다.
놀란 백아린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웬 당혜예요?”
백아린의 질문에 천무진이 쑥스러운 듯 답했다.
“그냥 하나 사 주고 싶었어. 당신, 날 위해 너무도 힘든 길을 걸어왔으니까.”
백아린을 알게 된 이후 지금까지.
그녀는 천무진을 위해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가야 하는 길이 아무리 더럽고, 힘들어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위해 걸어가 준 그녀, 그런 백아린에게 천무진은 당혜를 선물하고 싶었다.
당혜를 쥔 채로 천무진이 마음에 담아 두었던 진심을 이어 나갔다.
“나와 함께한 지금까지가 당신에게 흙탕물이었고, 고난의 길이었다면 이제부터 함께할 길은 꽃길이었으면 해서.”
“…….”
천무진의 진심이 절절히 느껴졌고, 그랬기에 백아린은 그저 그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혜를 앞으로 살짝 내밀며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받아 줄래?”
백아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천무진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백아린의 앞에 몸을 굽힌 채로 그녀의 발에 자신이 가져온 당혜를 신겨 줬다.
예상치 못한 천무진의 행동에 백아린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흔들렸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무진이라는 사내가 이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았으니까. 그가 직접 자신에게 신발을 신겨 주는 일 같은 건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지금 천무진은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서.
그리고 이내 당혜를 신겨 준 천무진이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려 백아린과 시선을 맞췄을 때였다. 그녀는 자신의 발에 곱게 신겨져 있는 당혜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백아린의 눈동자를 마주한 천무진이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왜 울려고 해. 별거 아닌 선물인데.”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이 고개를 크게 좌우로 저었다.
“……이게 별것이 아닐 리가 없잖아요.”
이 당혜에 담긴 마음이 그녀를 행복하게 했고, 또 이렇게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백아린이 상체를 숙여 천무진의 목을 꽉 감싸 안았다.
그런 백아린의 행동에 놀라 동그랗게 떠졌던 천무진의 눈이 이내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었다.
그렇게 천무진의 목을 꽉 감싸 안은 채로 백아린이 속삭였다.
“고마워요. 내 앞에 나타나 줘서.”
자신의 목을 감싸 안은 채로 고맙다고 말해 주는 백아린을 향해 천무진 또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자신의 앞에 나타나 줘서 고맙다는 백아린, 하지만…… 그건 자신이 해야 할 말이었다.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안으며 천무진이 답했다.
“큰일이네. 내가 할 말을 그대가 빼앗아 버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