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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화 (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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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장. 화산(華山)에도 봄은 찾아온다(2)

칼날처럼 날카로운 산세를 자랑하는 화산의 봄은 향기로웠다. 바람에 실려 오는 진한 매화향. 지금 화산에는 매화가 일제히 꽃망울을 피우고 있었다.

담호는 매화향 속을 걷고 있었다. 그의 보보마다 매화꽃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담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이 온통 매화로 가득했다. 꽃망울을 피운 매화들은 저마다 화려한 자태를 자랑했다.

담호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매화 꽃잎이 바람에 실려와 그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담호는 한참 동안이나 매화 꽃잎을 바라봤다.

봄의 화산은 매화가 절정을 이룬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산파 하면 매화를 떠올렸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화산파에는 매화가 들어가는 무공들이 많이 존재했다.

매화권, 이십사수매화검이 대표적인 예였다.

그 때문인지 화산파의 무공은 가벼우면서도 표홀하다는 선입견이 생겨났다. 실제로도 화산파의 무공 중 상당수는 그런 무공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바람이 다시 불어와 담호의 손바닥에 있는 매화 꽃잎을 날렸다. 담호가 손을 뻗어 매화 꽃잎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매화 꽃잎은 그런 담호의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담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에게 화산파의 무공은 저 매화 같았다.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담호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태평궁이었다.

칼날 같은 지형적 특성을 가진 화산에서 그나마 가장 넓은 평지에 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태평궁이었다.

천상계의 삼십육천(三十六天)을 본떠서 만든 태평궁은 무척이나 거대했다. 화산파의 대소사가 이곳에서 이뤄졌고, 화산파의 제자들이 무공을 수련하는 곳도 이곳 태평궁이었다.

연무장에서는 많은 이들이 연무를 하고 있었다. 용모도 각양각색이었고, 나이도 천차만별이었다.

가장 어려 보이는 이가 열두어 살 정도로 보였고, 많아 보이는 이가 이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합! 합!”

연신 기합을 내뱉는 그들의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화산파 무공의 가장 기초가 되는 복호권을 펼치는 이들은 바로 속가제자들이었다. 그런 속가제자들을 향해 노호성을 내뱉는 인물이 있었다.

“주먹을 내지를 때는 힘을 확실하게 실어야 한다. 엎드려 있던 호랑이가 튀어나가는 것처럼 전신의 근육을 최대한 활용하거라.”

“예!”

호랑이 같은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연무를 하던 제자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복호출동(伏虎出洞)에서 대호출세(大虎出世)로 전환하라.”

“예!”

대답과 함께 속가제자들의 초식이 변했다. 동굴을 나선 호랑이가 세상을 향해 뛰쳐나가는 것처럼 사나우면서도 맹렬한 기세가 발산됐다.

담호는 잠시 멈춰 서서 그들의 연무 장면을 바라봤다.

속가제자들을 가르치는 교두는 진경, 화산파의 일대제자이자 매화권의 달인이라 불리는 자였다.

평소엔 유쾌한 성격이지만, 무공을 가르칠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되기 때문에 속가제자들은 그를 독심수라(毒心修羅)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으로 불렀다.

한창 속가제자들을 지도하던 진경이 갑자기 담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천경 사제.”

방금 전까지 서릿발 같은 기세를 풍기던 무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에 담호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천경, 화산파에서 그가 받은 도명이었다.

도명을 받은 지 삼 년째였지만, 아직도 익숙하지가 않았다. 마치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하지만 담호는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진경을 향해 다가갔다.

“네가 여기엔 어쩐 일이냐? 이 사형을 보러 온 것이냐?”

“영보궁을 가는 중이었습니다.”

“영보궁?”

진경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영보궁은 화산파의 무공을 정리해 둔 서적들이 있는 곳이었다. 화산파의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였기에 경계가 삼엄할뿐더러 출입할 수 있는 자격 또한 엄격했다.

속가제자들은 당연히 출입이 금지됐고, 본산제자들 중에서도 일대제자 이상만이 출입 가능했다.

비록 진경의 막내 동생뻘이긴 하지만 담호 역시 화산파의 일대제자였다. 당연히 출입이 허락되었다. 하지만 막상 영보궁엔 쓸 만한 무공 서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서적은 도가와 관련된 도경들이었다.

화산파의 진정한 절학은 서책으로 익힐 수 없었다. 몇 줄의 글로는 전할 수 없는 경험과 깨달음은 오직 직접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이어진다.

구대문파의 하나로 한창 성세를 떨치던 화산파가 한때나마 크게 위축되었던 것도 자신의 깨달음을 전수해 줄 전대의 고수들을 한꺼번에 잃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조금씩 예전의 성세를 회복해 가는 화산파였지만, 그래도 전성기에 비하면 많이 모자랐다. 제대로 된 가르침을 줄 만한 고수들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담호를 제자로 거둬들인 현소 진인은 어떤 이유에선지 무공을 익히질 않았다. 그는 화산에서도 유일한 학도사(學道士)였다.

그가 담호를 제자로 거둬들인다고 했을 때 모두가 반대했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지금의 화산에 필요한 것은 강력한 무인. 경전이나 공부하는 학도사가 제자를 들여 봐야 제대로 된 무공을 전수해 줄 턱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장로들이 현소 진인의 제자에게 신경 쓸 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담호는 무공을 익히기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다.

현소 진인은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담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화산파의 장로인 현소 진인의 항렬 덕분에 담호 역시 본산의 일대제자가 되었지만, 그완 반대로 무공을 전수받는 덴 큰 걸림돌이 되었다. 반대를 했던 장로들이 담호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는 것을 꺼려 하기 때문이다.

“너도 참 열심이구나.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간 분명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진경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담호의 왼쪽 다리를 향했다.

무인으로서 치명적인 약점. 화산파에 몸담은 제자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경은 담호가 약점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절름발이가 익힐 수 있을 정도로 화산파의 무공은 녹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호는 진경의 눈에 담긴 동정의 빛을 읽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전 이만 영보궁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거라.”

담호는 진경을 지나쳐 태평궁 뒤쪽으로 향했다.

“저 절름발이가 화산파의 일대제자란 말이야?”

“저런 몸으로 무공이나 제대로 펼칠 수 있을까?”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속가제자들이 수군거렸다.

“감히 어떤 놈들이 연무 중에 떠드는 것이냐?”

진경의 불호령에 속가제자들이 조개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이미 담호의 귀에 들어간 이후였다.

그래도 담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숱하게 들어 본 이야기였고, 익숙한 시선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 흔들릴 만큼 그의 마음은 약하지 않았다.

태평궁을 지나 영보궁에 도착했다.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영보궁의 출입구엔 정묘한 기관이 존재했다. 영보궁을 지키는 무인들이 기관을 해제하지 않으면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영보궁주는 현무 진인으로 현소 진인의 사형이자 화산파 장로 중의 한 명이었다. 영보궁을 지키는 무인들은 현무 진인의 가르침을 받은 일대, 이대제자들이었다.

일대제자인 종경이 담호를 알아봤다.

“오늘도 왔구나.”

“사형.”

“영보궁에 들어가려느냐?”

“예!”

“너도 어지간하구나. 들어가 보거라.”

“감사합니다.”

담호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영보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종경이 직접 기관을 해제했다.

영보궁 안에는 서책이 꽂힌 서가가 늘어서 있었다. 화산파의 무공이 적힌 서책뿐만 아니라 일반 잡서들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사방이 콱 막힌 영보궁이었지만 어디선가 은은한 빛이 들어왔기에 서책을 읽는 덴 문제가 없었다.

담호의 손가락이 서가에 꽂힌 서책들을 훑었다. 화산파의 무공서들을 모두 모아 놓았다는 영보궁이지만 생각보다 그 양은 적었다. 수십 년 전 큰 참화를 겪으며 상당수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이곳에 드나들었다. 때문에 눈을 감고도 어느 위치에 어느 서책이 꽂혀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턱!

담호의 손가락에 낡은 서책 하나가 걸렸다. 담호는 망설이지 않고 서책을 꺼내 들었다.

죽엽수(竹葉手).

낡은 서책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죽엽수는 복호권, 육합권과 함께 화산파의 가장 기본적인 수공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주로 속가제자들에게 전수했다. 일대제자인 담호가 익힐 만한 무공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담호는 죽엽수가 적힌 서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죽엽수는 크게 세 가지 초식으로 이뤄졌다.

죽엽단공(竹葉斷空).

비엽천리(飛葉千里).

엽적관일(葉嚁貫日).

거창한 초식명과 달리 하나같이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인 초식들이었다.

담호는 서책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서책을 들지 않은 손으로 죽엽수의 초식을 따라 펼쳤다.

쉬쉭!

찌르고, 후리고, 퉁기고, 당기는 일련의 동작들이 쉼 없이 이어졌다. 담호의 움직임에 영보궁의 공기가 일렁였다.

담호는 좁은 서가 사이에서도 자유롭게 적엽수를 펼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초식을 펼치고 난 후 담호는 다시 서책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죽엽수는 분명 쾌속하다. 하지만 무게감이 거의 없어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위력을 낼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물론 죽엽수도 경지에 오르면 쇠망치로 후리는 것 못지않은 위력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예전 화산파의 도사들 중에는 죽엽수만으로 커다란 바위를 두 조각 낸 이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이야기다. 지금 화산파의 제자들은 죽엽수를 그저 스쳐 지나가는 공부로만 생각할 뿐 깊게 익히지 않는다.

만일 담호도 다리만 멀쩡했다면 죽엽수에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엽수는 따로 보법을 익힐 필요가 없는 몇 안 되는 화산파의 무공 중 하나였다.

제대로 된 각법이나 보법을 익힐 수 없는 담호에겐 그나마 최적의 무공이었다.

이미 머릿속에 각인된 초식과 자구를 담호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빛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그나마 많이 순화된 눈빛이 이 정도였다. 맨 처음 화산에 왔을 때 그의 눈빛엔 독기만이 가득했었다. 어찌나 독기가 지독하던지 화산파의 장로들조차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정도였다.

오 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사이 담호도 나이가 들었다. 그리고 눈빛 역시 예전에 비할 수 없이 차분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담호가 많이 순화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었다. 담호는 결코 순화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눈빛을 감출 수 있을 정도로 인내심이 늘었을 뿐이다.

담호는 자신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짐승을 느꼈다.

한없이 포악하고, 잔인한 짐승이 그와 호흡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 짐승은 언젠가 담호가 꺼내 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담호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짐승을 억누르며 다른 서책을 꺼내 들었다.

복호권(伏虎拳).

지금 태평궁 연무장에서 무공을 익히고 있는 속가제자들이 펼치는 권공이었다. 화산파의 기본 무공 중 하나로 죽엽수처럼 초식이 단순하고 매우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담호는 이번에도 한쪽 손에 서책을 든 채 다른 손으로 복호권을 펼쳤다.

퍼벅!

내공을 싣지 않은 주먹질에 공기가 터져 나갔다.

빠르고, 간결하면서 상당한 무게감이 있는 주먹질이었다.

화산파와 시작을 함께한 무공 중 하나가 바로 복호권이었다. 아주 먼 옛날 화산파가 이곳 화산에 자리를 잡았을 때도 복호권은 있었고, 화산파와 역사를 함께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복호권을 월등히 능가하는 위력을 가진 절학들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창안되었다.

결국 죽엽수처럼 복호권은 화산파의 속가제자들이나 익히는 기본공으로 전락했다. 다들 복호권을 다른 상승 무공으로 넘어가는 디딤돌 정도로만 생각할 뿐 깊이 익히지 않았다. 심지어는 화산파의 장로들조차도 말이다.

하지만 담호는 집요할 정도로 복호권을 파고들었다. 성취가 깊어질수록 그는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소요심공(逍遙心功)은 복호권을 익히기엔 어울리지 않는 심법이야.’

소요심공은 죽엽수, 복호권, 육합권 등과 함께 익히는 기본 심공이었다. 속가제자들은 먼저 소요심공을 익히고 난 후에야 복호권 등에 입문할 수 있었다.

소요심공은 분명 훌륭한 내공심법이었다. 꽤나 안정적이면서도 다른 상승의 심법을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 때문에 성취가 낮은 제자들이나 입문자들이 익히기에 적합하지만 복호권이나 죽엽수 등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도대체 왜?’

모두가 당연한 수순처럼 소요심공을 익힌 후 죽엽수와 복호권 등을 익혔다. 하지만 담호는 의문을 가졌다.

얼마 전부터 가지기 시작한 의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담호는 시간도 잊고 복호권에 빠져들었다.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복호권을 펼치는 그의 손속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담호의 시간은 그렇게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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