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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화 (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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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1장. 화산(華山)에도 봄은 찾아온다(3)

담호가 영보궁을 나온 것은 해가 지고서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어둠이 찾아온 화산 곳곳에 등불이 걸렸다.

등불에 비친 매화가 마치 눈꽃처럼 반짝였다. 담호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그 광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와 매화 꽃잎이 날렸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머릿속 깊이 각인되었다.

밤이 되었다고 해서 화산파의 일과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화산 곳곳에 흩어져 있는 도관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고, 도사들은 여전히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일단의 무리가 담호 쪽으로 다가왔다.

득라의를 입은 도사들이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범상치 않은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담호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바로 화산파의 일대제자들이었다. 선두에 선 삼십 대 중반의 도사는 화산파 장문인인 현천 진인의 제자인 무경이었다.

무경은 어릴 적부터 무재가 남달라, 화산파 전체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기린아였다.

무공의 성취 또한 뛰어나서 장로급 이상만이 익힐 수 있다는 태청심결(太淸心決)에 벌써 입문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을 정도였다.

뛰어난 무공만큼이나 인품 또한 훌륭해서 화산파의 제자치고 그를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무경의 곁에는 그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운경과 한소유가 있었다.

운경은 무경의 사제이자 화산파의 자랑인 매화삼십육검수의 수장이기도 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 그의 성격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한소유는 화산파에서 보기 힘든 여제자였다. 그녀 역시 매화삼십육검수의 일인에 들었을 정도로 빼어난 성취를 자랑했다.

무경이 미소를 지었다.

“천경이구나.”

“사형.”

“거처로 돌아가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현소 사숙은 잘 지내시고?”

“정정하십니다.”

“다행이구나. 한번 찾아봬야지 하면서도 원체 일이 많다 보니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는구나.”

“사부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담호의 대답에 무경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지만 그의 곁에 있는 운경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담호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뱀처럼 차가우면서도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그의 눈빛이 담호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다리는 어떻느냐?”

“똑같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무공에 집착하는 것이냐? 한계가 명확한데도. 차라리 현소 사숙처럼 너 역시 무공 대신 도학에 열중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사제!”

운경의 독설에 무경이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운경의 표정엔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헛된 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내말 명심하거라.”

“사형의 충고 감사합니다. 뼛속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담호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운경은 담호를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런 운경의 태도에 무경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소유를 바라봤다.

한소유가 담호에게 사뿐히 다가갔다. 그러자 은은한 어떤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담호가 고개를 들어 한소유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화산의 매화를 닮은 듯한 한소유의 단아한 얼굴이 보였다.

“운경 사형의 말을 기분 나쁘게 듣지 마, 사제. 운경 사형이 나쁜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니까.”

“알고 있습니다.”

“무공이 막히면 언제든 찾아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까.”

“감사합니다.”

“난 사제를 믿어.”

한소유가 상큼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뭇 남성들의 심혼을 흔들 만큼 매력적인 미소였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담호가 세 사람에게 포권을 취한 후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은 멀어지는 담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절룩이는 담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무경의 얼굴엔 안쓰러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무경이 운경을 향해 고개를 팩 돌렸다.

“가끔 네 녀석이 하는 말을 들으면 정이 뚝 떨어진단 것을 알고 있느냐? 어떻게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다 천경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천경을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다리를 저는 아이가 얼마나 상심이 크겠어.”

“천경에게 필요한 것은 헛된 위로와 격려가 아니라 냉철한 충고입니다.”

“너?”

“솔직히 천경이 화산파의 무공을 제대로 익힐 확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보법을 익힐 수 없는 무인은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현재 화산에는 반쪽짜리 무인이 필요 없습니다.”

“우와! 정말 너 진짜 냉정하구나.”

“어쩔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제 역할이니까요.”

“진짜…….”

무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전혀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무경이 화산파의 대제자로서 무력을 상징한다면 운경은 냉철한 이성으로 그에게 끝없이 조언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애초에 그렇게 키워졌고, 그것이 화산을 위해서 최선이라 생각됐다.

한소유가 웃으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 자! 천경 이야기는 그만하시지요. 그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하기는…….”

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화산파는 매우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다.

속가제자들 중에서 쓸 만한 이들을 추려내 본산제자로 받아들여야 했다. 본산제자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들을 제대로 된 무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작금의 화산은 새로운 전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를 위해서는 무경이나 운경 같은 일대제자들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자, 가자.”

무경이 앞장서 걸어갔다. 그의 머릿속에 담호의 모습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담호는 달빛에 의지해 밤길을 걸었다. 그가 향한 곳은 운대봉 아래 위치한 조그만 계곡이었다.

계곡 아래 제법 커다란 소(沼)가 있었다. 찾아오는 길이 쉽지 않기에 화산파의 도사들도 거의 찾지 않는 곳이었다. 가슴이 답답할 때면 담호가 찾는 은신처였다.

담호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소에 들어갔다.

봄이라곤 하지만 아직은 한기를 머금고 있는 계곡물이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괜찮아, 이 정도쯤은…….’

담호가 이를 꽉 물었다.

지독한 한기에 피부뿐 아니라 뼈까지 시려 왔다. 그래도 담호는 물 밖으로 나오지 않고 오히려 머리까지 물속에 푹 담갔다.

담호는 물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수많은 상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평화롭던 일상, 한순간 도적들의 습격으로 무너진 일상의 평화. 그리고 뜻하지 않은 구원과 화산에서의 생활.

사지가 부러져서 처음 몇 달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보살피고 치료해 준 이가 바로 사부 현소 진인이었다.

현소 진인의 극진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이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걸어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다리 한쪽을 절게 되었지만 그래도 살아 있었다.

담호에겐 살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목숨이 붙어 있어야 훗날을 기약할 수 있으니까.

‘아버지, 어머니, 가령아.’

담호의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르는 그들의 모습.

담호는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

열두 살 어린 나이, 힘이 없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은 살아 있었다.

살아 있기에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푸확!

담호가 일어나며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후욱! 후욱!”

담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시선이 왼쪽 다리로 향했다. 건강하고 튼튼한 오른쪽 다리에 비할 수 없이 초라했다. 그렇게 수없이 산을 오르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근육이 그렇게 많이 붙지가 않았다.

이런 다리로는 화산파의 현란한 보법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화산파의 보법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나에겐 다른 게 필요해.”

지난 오 년 동안 담호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문제는 해결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길을 인도해 줄 좋은 스승이 있었다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그의 주위엔 현소 진인 한 명뿐이었다.

결국 그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일단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담호가 왼발을 물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물속이라서 그런지 제법 묵직한 저항이 느껴졌다.

허벅지까지는 정상이다. 문제는 무릎이다.

연골과 근육이 짓이겨져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영약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였다.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전설의 환골탈태를 경험하는 것. 하지만 그것은 꿈에서나 기대해 볼 만한 불가능한 일이다.

“왼쪽 다리의 근력을 더 키우고 단련한다. 다음 일은 그 후에 생각하자.”

담호는 물 밖으로 나왔다.

물기를 대충 말리고 옷을 입었다.

한기가 느껴졌지만, 그래도 머릿속은 맑아졌다. 사형제들에게 무시를 당했던 기억 따윈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음 날부터 산을 오르내리는 담호의 왼쪽 발목엔 모래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훅훅!”

담호의 입술을 비집고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무게가 조금 늘었을 뿐인데 그가 느끼는 무게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치 발목에 커다란 쇳덩이를 채운 듯한 느낌이었다.

담호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줄기를 따라 굵은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휴!”

그런 담호의 모습을 보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는 이가 있었다. 담호의 사부인 현소 진인이었다.

“무공을 향한 저 아이의 집념은 끝이 없구나. 이를 어찌하누?”

현소 진인의 한숨이 바람에 흩어졌다.

오래전 등선한 사부 천궁자(天穹子)가 보고 싶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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