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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2장. 변하는 것이 있으면,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1)
담호가 새벽 일찍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현소 진인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쌀을 씻고, 나물 몇 가지를 조물조물 무쳤다.
꽤나 오래전부터 해 온 일이었기에 담호의 동작은 무척이나 능숙했다.
현소 진인은 식사량이 많지도, 입맛이 까다롭지도 않았다. 그는 도사의 본분을 철저히 지켜서 향이 강하거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음식은 먹지 않았다. 그 덕에 담호가 준비할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담호는 뚝딱 한상을 차려 현소 진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현소 진인은 이미 일어나 도경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사부님, 식사하시지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느냐?”
현소 진인이 도경을 덮으며 미소를 지었다.
담호는 현소 진인 앞에 상을 내려놨다. 쌀밥에 나물로 된 찬 몇 가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맛있겠구나. 아침부터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어서 식사하시지요.”
“그래!”
현소 진인이 먼저 수저를 들고 나서야 담호도 식사를 시작했다.
사부도 말이 없었고, 제자도 침묵을 지켰다.
방 안에는 오직 두 사람이 음식을 먹는 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현소 진인이 입을 연 것은 식사를 모두 끝낸 후였다. 그는 입가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호야.”
“예!”
“잘 먹었다. 네 덕분에 사부가 호강을 하는구나.”
“아닙니다, 사부님. 제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사부님이 안 계셨으면 지금의 저도 없습니다.”
오 년 전에 현소 진인이 살려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담호는 존재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화산파의 많은 이들이 담호를 배척하거나 은근히 조롱할 때도 오직 현소 진인만큼은 진실 된 마음으로 그를 대했다.
담호에게 현소 진인은 사부를 넘어서 부모 같은 존재였다. 그 때문에 현소 진인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항상 극진할 수밖에 없었다.
“호야.”
“예?”
“그렇게 무공을 익히고 싶으냐?”
“예!”
담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런 담호를 보며 현소 진인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부가 무능해 네가 고생이구나.”
“아닙니다.”
“미안하다.”
“사부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사부가 학도사라는 것은 알고 있지?”
“예!”
“그럼 학도사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
“그야 도가의 경전을 연구하는…….”
“다들 그렇게 알고 있지.”
“그럼 아니란 말씀입니까?”
“이 사부의 사부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
“천궁자 어르신 아닙니까?”
“맞다. 화산파 제일의 고수라 불렸던 천궁자께서 내 사부였느니라.”
천궁자(天穹子), 지금은 전설이 된 화산파의 전대 고수였다. 천궁자가 있기에 화산파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사제인 일궁자(一穹子)에게 장문인 직위를 넘겨주고 무공에 몰두했을 만큼 지독한 무광(武狂)이기도 했다.
“처음 내가 사부의 제자가 되었을 때 모두가 큰 기대를 했었지. 다들 내가 엄청난 기재인 줄 알았던 게야. 당연하지. 천하에 명성이 높은 천궁자의 제자가 기재가 아니면 말이 안 되지. 그런데 그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게야.”
현소 진인의 얼굴에 고졸한 미소가 떠올랐다. 씁쓸한 것 같기도 하고, 달관한 것 같기도 한 그런 미소였다.
“천재라 불렸던 사부와 달리 난 무공에 큰 재능이 없단다. 머리로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겠는데, 몸은 영 따라 주지 않더란 말이지. 사부의 무공을 전수받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불가능했지.”
담호는 숨을 죽였다.
이제까지 오 년을 함께했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사부는 하늘의 태양과 같은 존재인데 반해 제자는 형편없는 재능의 소유자. 당연히 화산파 내에서도 그를 두고 말이 많았지. 나 역시 사부가 나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물었다. 왜 나를 제자로 받아들였느냐고? 그랬더니 사부가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
“…….”
“‘지금 화산에 필요한 것은 무공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강한 사람이니라. 화산의 정신을 보존하고 기치를 후대에까지 전해 줄 사람. 현소야, 네가 그 역할을 해 줘야 한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학도사의 길을 권하셨지. 너는 그분의 말이 이해가 되느냐?”
담호는 고개를 저었다.
화산파는 도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엄연히 무파(武派)였다. 구대문파 중 하나였었고, 지금도 예전의 성세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화산파가 단순한 도문에 불과했다면 어떻게 천하 구대문파 중 하나로 손꼽혔을까? 그런 화산파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화산 제일의 고수인 천궁자가 어찌 제자에게 학도사의 길을 권한단 말인가?
학도사는 말 그대로 도경을 통해 도인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진리를 탐구하지만 이젠 도문이라기보다는 무파로서 자리를 잡은 작금의 화산파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이기도 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의 화산파에서 학도사는 거의 쓸모없는 자리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나마 현소 진인이 천궁자의 제자이기에 이만큼이나 대접을 받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제대로 된 거처 하나 받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엔 그분을 참으로 많이 원망했단다. 화산제일인 천궁자의 제자가 학도사라니.”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었다.
화산파의 무인들은 천궁자의 처사에 실망을 했고, 현소 진인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그렇게 현소 진인은 학도사의 길을 걷게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동안 숱한 밤을 불면으로 지새웠느니라. 경전을 읽으면서도 분노를 삭일 수 없었지. 그런데 말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내 가슴속에서 타오르던 분노의 불길이 조금씩 사그라들더구나. 그리고 깨달았다. 꼭 검을 익혀야만 도에 이르는 것이 아니란 것을. 도를 깨닫는 길은 말고도 많다는 것을. 그제야 사부님이 무엇 때문에 나를 학도사의 길로 이끌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담호는 말없이 현소 진인을 바라봤다. 존경하는 사부에게 이런 비사가 있다는 것은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도사가 단순히 경전만 연구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사실이다. 화산의 학도사에게는 화산의 무공을 후대에게 온전히 전할 책임이 있다.”
“그게 무슨?”
담호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생전 처음 듣는 말이기 때문이다.
“학도사는 경전을 연구하기도 하지만 화산파의 무공을 온전히 기록하고 체계적으로 분류해 후대에 전할 책임이 있다. 최악의 경우 화산의 무공을 보관한 영보궁이 불타거나, 희귀한 절학이 단절될 때를 대비해 모든 무공을 외우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학도사의 진정한 의무이다.”
담호의 눈빛이 변했다.
학도사라는 직책이 그런 것인지 오늘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전 학도사의 진정한 본분이 그런 것인지 몰랐습니다.”
“현 장문인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다. 전대 장문인이 그런 사실을 말해 주기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왜 장문인께 그런 사실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사실을 장문인께서 알고 계신다면 더 제대로 된 대접을 받으셨을 텐데.”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제대로 된 후인을 찾아 내 지식을 물려주면 그만인데. 지식은 그렇게 조용히 전수하는 법이란다.”
“사부님.”
현소 진인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보다 호야.”
“예!”
“꼭 한 가지 길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학도사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란다.”
현소 진인의 말에 담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본능적으로 학도사의 길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소 진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 성정에 앉아서 경전이나 파고 머릿속으로 무공서나 정리할 리가 없지.”
“죄송합니다.”
“아니다. 네 뜻이 그리 확고하니 내가 뜻을 바꾸마.”
“사부님.”
“화산파의 무공이 너와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화산파의 무공은 변화가 막측 해서 온전한 다리를 가진 사람들도 쉽게 익힐 수가 없지. 하물며 너는 다리가 무척이나 불편하다. 그 상태로는 결코 대성을 할 수 없다. 알고 있느냐?”
“하지만 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너는 절대로 포기할 아이가 아니지. 그럴 아이였다면 오 년 전에 진즉 죽었겠지. 호야!”
“예!”
갑자기 현소 진인이 손을 뻗어 담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의외의 행동이었지만 담호는 현소 진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머리를 어루만지는 사부의 손길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나는 너를 믿는다.”
“…….”
순간 담호의 어깨가 경련을 일으켰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 울컥 올라왔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담호가 당혹해했다.
현소 진인이 담호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호는 멍하니 현소 진인을 바라봤다.
현소 진인이 뒤쪽에 있는 벽장에서 낡은 서책을 꺼냈다.
“받거라.”
“이건?”
“오래전 영보궁 내의 도경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담호가 서책을 받아 들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표지가 걸레쪽처럼 너덜너덜했고,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것처럼 위태해 보였다.
“중천심결(重天心決)이라고 한다.”
“중천심결?”
담호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듣겠지? 나도 처음 발견했을 때 그랬으니까. 기록을 찾아보니 화산파가 화산에 자리를 잡던 초창기에 만들어진 심법이더구나.”
“헌데 이름이 왜 중천심결입니까?”
담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단 표정으로 물었다.
무공명은 무공의 특징을 담기 마련이다.
중천심결이란 이름에서 느껴지는 특징은 무거움이다. 다변과 표홀함을 표방하는 화산파의 무공과는 다른 이질감이 느껴졌다.
“화산의 검이 매섭고 변화무쌍하다고 천하에 소문이 자자하지만 처음부터 그랬겠느냐? 화산파의 초창기 무공은 분명 장중했을 것이다. 저 화산의 거암처럼. 하지만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며 많은 변화가 있었고,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을 했을 것이다.”
현소 진인은 직접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하지만 학도사로 수많은 무공서들을 정리하고 기억하다 보니 무공에 대한 식견이 적잖았다.
“세상엔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도 하지만, 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들도 존재한다. 화산파의 무공 또한 굳이 보자면 후자라고 할 수 있겠지. 필요에 의해서 더 가다듬어지고, 변화되고, 진보하고……. 그래서 지금의 화산파 무공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누구나 새로운 것을 원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옛것이 반드시 쓸모가 없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현소 진인은 사부 천궁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천궁자는 천재였다.
그는 화산의 무공을 진일보시켰고, 화산파 무인들은 그를 닮길 원했다. 지금 화산파의 모습은 천궁자라는 걸출한 존재의 잔영에 갇혀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천궁자는 화산파의 제자들이 자신과는 다른 무언가를 찾길 원했다. 그래서 유일한 제자인 현소 진인에게 학도사의 길을 걷게 한 것일지도 몰랐다.
“호야, 이 중천심결 안에는 화산파의 옛 가르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속에서 무엇을 찾을지는 모르지만, 너라면 분명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부님.”
“지금의 화산에서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옛 화산에서 네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거라.”
“예…….”
담호가 중천심결을 품에 꼭 안았다.
정말 이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진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현소 진인의 따스한 배려 하나만으로도 담호는 세상을 모두 얻은 듯했다.
그런 담호를 보며 현소 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걸로 된 거다.’
***
담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낡은 서책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겉장을 넘기자 속지에 중천심결이라는 희미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담호는 잠시 손끝으로 글자를 어루만졌다.
‘중천심결.’
담호가 조심스럽게 다음 장을 넘겼다.
화산은 높고도 곧다.
그 모습이 곧 검과 같으나, 경계하거라 사람들이여.
화산은 검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암산(巖山)임을.
억겁의 무게를 가지고 있기에 그 올곧음을 유지할 수 있음을.
무거움이 우선이고, 가벼움이 그다음이다.
마음은 항상 무거워야 하고, 쉬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하늘은 비어 있는 듯하지만, 가득 차 있고, 그 무거움은 능히 대지를 아우른다.
사람의 마음 또한 하늘 같으니, 그 무거움을 담을 수 있다면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담호는 자구 하나하나를 가슴에 담으며 책장을 넘겼다.
심상상천(心上像天)―마음에 하늘의 형상을 담고,
심중중천(心中重天)―마음 가운데 하늘의 무거움을 담는다.
동심이천(動心理天)―마음이 움직이면 하늘을 다스릴 수 있다.
중심동천(重心動天)―무거운 마음이 하늘을 움직이게 한다.
옛 화산의 잊혀진 무공이 그의 앞에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