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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2장. 변하는 것이 있으면,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2)
담호가 밖으로 나왔다.
그의 얼굴은 며칠 새 꽤나 창백해져 있었다. 중천심결에 빠져 두문불출했기 때문이다.
두어 번 읽는 것만으로 중천심결을 완벽하게 외웠다. 하지만 담호는 그에 그치지 않고 중천심결을 반복해서 읽었다.
담호가 중천심결에 몰두하는 동안 현소 도장은 단 한 번도 방문을 열어 보지 않았다. 담호가 삼매경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온 담호의 표정은 한결 개운해 보였다. 중천심결에서 그토록 자신이 원하던 어떤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은 명확한 것이 하나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룬단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후!”
담호가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쉴 때였다.
“사제!”
갑자기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는 단아한 분위기의 여인이 보였다. 화산에 저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를 여인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사저.”
한소유였다.
그녀가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거야?”
“네?”
“매일같이 화산을 오르내리던 사람이 요 며칠 보이지 않아서 걱정했잖아.”
“아,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이야? 아픈 것은 아니지?”
“아닙니다.”
한소유가 담호의 두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담호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소유가 미소를 지었다.
“정말인가 보네? 다행이다.”
“그 때문에 오신 겁니까?”
“전해 줄 이야기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왔어. 아직 못 들었지?”
“뭘 말입니까?”
“역시 아무도 전해 주지 않은 모양이네.”
한소유의 미간에 살짝 골이 패였다. 그녀가 약간은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연화봉을 바라봤다.
“사저.”
“아, 미안. 조만간에 일대제자들 전부 진무궁에 모이게 될 거야.”
“진무궁?”
진무궁은 화산파의 무력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화산파에 적을 둔 제자들이라면 당연히 진무궁에 들기 소원했다. 하지만 진무궁의 문턱은 높고도 좁아 아무나 들이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일대제자들 중에서도 진무궁에 드나들 수 있는 이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당연히 담호는 아직 들어갈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진무궁엔 왜?”
“현검 사숙께서 드디어 출관하셨어. 그분께서 일대제자들 모두 모으라고 명하셨어.”
한소유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만큼 흥분한 것이다.
현검 진인은 진무궁의 궁주였다. 그리고 모두가 인정한 현 시대의 화산제일인이기도 했다.
그는 육 년 전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해 폐관에 들었다. 담호가 화산파에 들어오기도 전이었다. 그 때문에 담호는 현검 진인에 대해 이야기만 들었을 뿐 직접 본 적이 없었다.
화산 검의 극의를 깨달은 자.
그의 손에서 검이 펼쳐지면 매화가 만개한다고 했다.
혹자들은 말했다.
지금의 현검 진인이라면 석년의 천궁자에 비견될 만한 무력을 갖췄을 거라고.
그만큼 높은 평가를 받는 현검 진인이었다.
“그분이 제자들을 모으라고 한 겁니까?”
“그래!”
“왜?”
“아무래도 자신의 심득을 제자들에게 베풀려는 것이 아닐까?”
한소유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화산제일검인 현검 진인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큰 기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지금 화산파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일대제자뿐만이 아니야. 나중엔 이대제자, 그리고 속가제자들까지도 따로 봐줄 생각이신 모양이야.”
“음!”
“그러니까 사제도 잘 준비해. 혹시 알아? 그분의 눈에 들면 사제에게 맞는 심득을 전해 줄지.”
많은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담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담호의 모습에 한소유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 무뚝뚝하기는……. 그럼 나 간다. 나중에 사람을 보내 부를 테니 그때 보자구.”
“감사합니다, 사저.”
한소유가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담호는 한참 동안이나 한소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소유는 화산파에 있는 수많은 이들 중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눈빛엔 동정의 빛도, 연민의 기색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자신과 똑같은 화산파의 제자로 바라봐 주고 있었다. 그래서 고마웠다.
“현검 사숙이라…….”
담호가 운대봉 정상을 바라봤다. 수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정상 어딘가 진무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현검 진인이 있을 것이다.
현검 진인이 어떤 가르침을 내려 줄지 모르지만 당장 그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담호에겐 없었다.
현검 진인과의 만남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괜히 벌써부터 들뜰 필요는 없었다.
담호는 우선 왼쪽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찼다. 뜻하지 않게 중천심결을 얻으면서 중단했던 일, 다시 화산을 오르내리려는 것이다.
모래주머니를 찬 채 화산을 내려갔다. 깎아지른 화산의 협곡을 내려가는 것은 오르는 것보다 힘들었다. 발을 잘못 헛디디는 순간 그대로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정상인들도 힘겨워하는 그 길을 담호는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다리에 장애가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오 년간의 피나는 노력은 담호의 균형 감각을 극도로 발달시켰다. 덕분에 담호는 무사히 화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담호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호흡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그는 다시 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내려올 때는 고도의 균형 감각이 필요했고,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강인한 각력과 심폐 능력이 필요했다. 담호는 이를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올랐다.
시간은 흘러갔고, 담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왼쪽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아 더욱 힘들었지만, 담호는 산을 오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거처에 도착했을 때 담호는 탈진 상태였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입에서 단내가 났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전신의 근육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담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잠시 호흡을 고른 담호가 곧 몸을 이리저리 틀며 풀었다. 녹초가 된 상태 그대로 연무를 하려는 것이다.
그가 제일 먼저 펼친 것은 죽엽수였다. 화산파의 무공에 뜻을 둔 자들이라면 누구나 처음 익히게 되는 무공이었다.
제일 먼저 죽엽단공(竹葉斷空)의 초식을 펼쳤다.
쉬쉭!
담호가 펼치는 죽엽수는 날카로웠다. 수도가 허공을 가르고 허리가 팽이처럼 팩 돌아갔다.
이어 이 초식인 비엽천리(飛葉千里)가 펼쳐졌다.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담호의 수도, 하지만 풍겨져 나오는 기세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후웅!
다음 초식은 죽엽수의 마지막 초식인 엽적관일(葉嚁貫日)이었다. 담호의 손이 섬전처럼 허공을 갈랐다.
죽엽수를 펼치는 담호의 몸짓은 유려했다.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기세가 칼날처럼 뻗쳐 나왔다.
담호의 몸짓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첫 초식인 죽엽단공을 다시 한 번 펼치는 것이다.
공기가 일렁이며 두 번째 초식인 비엽천리, 세 번째 초식인 엽적관일까지 순식간에 이어졌다.
담호는 시간이 가는 것도 잊고 죽엽수를 반복해서 펼쳤다.
죽엽수의 가장 큰 특징은 특별한 보법이 없어도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담호는 처음엔 두 다리를 바닥에 붙인 채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죽엽수를 펼쳤다.
한참 죽엽수가 절정에 달했을 때 담호는 다리를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일보 전진, 그리고 뒤로 일보 후퇴.
앞뒤를 오가는 단조로운 움직임, 결코 세련된 보법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성치 않은 왼발을 지지대 삼아 오른발을 내딛는다. 화산파의 장로들이 봤다면 불호령을 내릴 만한 형편없는 보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담호에겐 이것이 최선이었다.
쿵!
왼발을 내디딜 때마다 담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다 나았는지 모르지만, 아직도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담호는 무릎 아래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애써 무시했다.
‘이 정도의 통증으로 나를 막을 수는 없다.’
담호는 더욱 강렬하게 왼발을 밟았다.
쿵!
순간 그의 기세가 변했다.
죽엽수가 복호권으로 변했다. 날카롭던 기세가 육중하게 변했다.
복호권은 호랑이의 움직임을 본떠서 만든 무공이었다. 지금이야 속가제자들이 주로 익히는 그저 그런 무공으로 알려졌지만, 기실 복호권은 무척이나 잘 만들어진 권공이었다.
담호는 의문을 가졌다.
‘과연 호랑이의 무기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뿐인가? 물어뜯고 할퀴는 것만이 과연 호랑이 최선의 공격 방법인가?’
담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거대한 육체가 호랑이의 가장 큰 무기다. 그 육중한 무게가 날아올 때의 아찔함과 위압감 때문에 먹이가 되는 동물들은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호권 역시 단순히 손발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신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쉬쉭!
담호의 주먹이 공기를 갈랐다.
복호권의 강렬한 기세를 살리기 위해서는 강인한 다리 근력이 필요했다. 그만큼 강렬한 반동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담호의 보법엔 변화가 없었다. 앞으로 전진, 그리고 뒤로 빠르게 후퇴.
복호권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담호의 움직임이 갑자기 변했다. 천지사방으로 그의 주먹이 뻗어 나갔다.
육합권(六合拳).
죽엽수, 복호권과 함께 화산파의 가장 기본이 되는 권공이었다. 다른 권공들처럼 변화는 단조로웠지만, 대신 맹렬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담호는 힘들다는 것도 잊고 무아지경에 빠져 세 가지 권공을 연달아 펼쳤다.
화산파의 수많은 무공들 중 담호가 가장 빠져 있는 것은 기본이 되는 이 세 가지 권공이었다.
지난 오 년 동안 매일같이 연무했기에 이젠 눈을 감고도 펼칠 수 있는 세 가지 권공을 담호는 심혈을 기울여 펼쳤다.
화산파 내에서도 담호처럼 기본적인 권공만 가지고 이렇게 열심히 익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욱 높은 수준의 무공을 원하기 마련이고, 화산파에는 그런 절학들이 꽤 많았다.
“후욱!”
공터엔 담호의 거친 숨소리와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담호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밤이 되어 거처로 돌아온 현소 진인이 거의 기절하다시피 평상 위에 잠들어 있는 담호를 보았다.
현소 진인은 놀라지 않았다. 지난 오 년 동안 매일같이 봐 왔던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바닥에 남아 있는 흔적을 바라봤다.
공터엔 담호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일직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담호의 발자국.
현소 진인이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담호의 곁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일상은 지루함을 줄 수도 있지만, 지루함을 이기고 반복되는 수련은 인간을 단단하게 만들기 마련이란다, 호야.”
현소 진인은 담호의 다리를 정성스럽게 주물렀다.
지난 오 년 동안 반복하다 보니 이젠 그의 추궁과혈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단단하게 뭉친 부분을 풀어 주고, 뼈마디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특히 그가 가장 신경을 쓴 부위는 담호의 왼쪽 발이었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기에 더욱 심하게 뭉쳐 있었다.
담호의 왼쪽 발을 주무르는 현소 진인의 손엔 온기가 담겨 있었다. 그의 온기를 느꼈는지 기절하듯 잠들어 있는 담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현소 진인은 담호의 뭉친 근육이 부드럽게 풀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뗐다.
“휴!”
현소 진인이 크게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밤이 깊었지만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품에서 서책 하나를 꺼냈다.
천음연단서(天陰煉丹書).
화산파의 영보궁에 처박혀 있던 서책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그 책을 담호를 위해서 다시 꺼내 들었다.
현소 진인은 새벽까지 천음연단서를 탐독했다. 그의 곁에서 담호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
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으음!”
마치 수욕을 한 것처럼 온몸이 개운했다. 잠시 기지개를 켜던 담호는 곁에 잠들어 있는 현소 진인을 발견했다.
“사부님께서 또…….”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현소 진인이 자신을 위해서 추궁과혈을 해 주었다는 사실을.
현소 진인의 곁에는 처음 보는 서책이 펼쳐져 있었다. 담호는 서책을 덮은 후 현소 진인과 함께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옮겼다.
현소 진인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한 후에야 담호는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밤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매화향이 실려 왔다. 담호는 매화향이 가득한 평상 위에서 운공을 시작했다. 지난 며칠 동안 중천심결에 빠져서 연구를 했지만, 실제 운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 운공하는 거라 불안할 만도 하건만, 담호는 망설이지 않고 운공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누구도 가 보지 않은 미지의 길이 그의 앞에 열려 있었다.
과연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담호도 알 수 없었다.
매화향 가득한 바람이 그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지만, 담호는 그와 같은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중천심결은 결코 빠르게 내공을 쌓을 수 있는 심법이 아니다. 본산제자들이 익히는 소청심결처럼 변화가 무쌍한 것도 아니었다.
이름 그대로 중천심결은 무거웠다. 소청심결로 운용하는 내기가 바람처럼 가볍고 표홀하다면, 중천심결로 운용하는 내기는 마치 늪지처럼 끈적끈적하면서 느렸다. 그래서 운용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담호의 이마에 땀방울이 어느새 촉촉이 맺혔다. 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금세 식혀 주었다.
담호는 시간의 흐름도 잊고 중천심결에 빠져들었다.
담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해가 연화봉에 걸렸을 때였다. 이른 새벽에 운공을 시작했는데 벌써 아침이 된 것이다.
운공을 마친 담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쉽지 않겠군.”
다른 심법이었다면 최소 삼 주천은 했을 시간이다. 하지만 담호는 그 시간 동안 일 주천밖에 하지 못했다. 다른 심법들보다 내공을 쌓는 것이 세 배는 느리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밀도가 높기에 같은 수준의 내공을 쌓으면 더욱 강렬한 위력을 낼 수 있을 듯싶었다.
문제는 어떻게 남들과 같은 수준, 혹은 그 이상의 내공을 쌓느냐 하는 거였다.
담호가 고개를 저었다.
“잠을 더 줄여야겠구나.”
남들보다 잠을 덜 자고, 더 열심히 운공 한다. 그것이 담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날 이후 담호는 잠을 더 줄였다.
딱 한 시진만 자고 일어나 새벽 내내 운공에 몰두하고, 오전에는 화산을 오르내리며 육체를 단련했다. 그리고 오후와 밤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화산파의 무공을 연마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담호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