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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2장. 변하는 것이 있으면,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3)
“지금 진무궁으로 들어오시랍니다.”
이제 겨우 열서너 살로 보이는 소년이 담호를 보고 있었다. 화산파의 이대제자인 원율이었다.
담호와는 겨우 두세 살 차이가 날뿐이었지만, 배분에서는 큰 차이가 났다. 담호는 일대제자였고, 원율은 이대제자였다. 담호에겐 사질이었다. 하지만 담호를 바라보는 원율의 눈빛엔 불량한 빛이 일렁였다.
원율의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
‘이런 절름발이가 내 사숙이라고? 난 절대 인정 못 해.’
담호는 모르지만 화산파 내에서 그의 별명은 불주견(不走犬), 즉 뛰지 못하는 개다. 절름발이인 그의 처지를 빗대서 하는 말이다.
일대제자들 중 상당수는 담호를 그저 그렇게 운이 좋아 자신들과 같은 항렬에 오른 것으로 안다. 이대제자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나이 대의 담호를 사숙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화산파는 강함을 추구하는 문파였다. 특히 검으로 천하에 이름이 드높았다. 그런 화산파에서 태생적인 이유로 검공 하나 제대로 펼칠 수 없는 담호를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담호는 화산파의 다른 제자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다. 보통 일대제자쯤 되면 이대제자들을 가르쳐야 했지만, 담호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이대제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많은 제자들이 담호가 자격도 없이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배분 때문에 윗사람으로 받들지만, 사숙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것이 원율을 비롯한 이대제자들의 자존심이었다.
담호는 잠시 원율을 빤히 바라봤다. 원율이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도발적으로 바라봤다.
순간 원율이 흠칫했다.
유난히 깊으면서도 새까만 눈동자, 그 속엔 원율을 향한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원율은 알 수 없는 오한을 느꼈다.
‘무슨?’
그가 이유를 찾으려 할 때였다.
“가지.”
담호가 그의 앞을 지나쳐 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오한이 싹 사라졌다.
‘착각이었나?’
원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사이 담호는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원율은 더 생각할 여유도 없이 담호를 급히 따랐다.
‘거의 한 달 만인가?’
한소유에게서 진무궁에 모이게 될 거란 이야기를 들은 게 거의 한 달 전이었다. 그동안 담호는 중천심결과 죽엽수 등을 익히느라 그런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현검 사숙이라.’
어떤 사람일지 궁금한 것이 사실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중천심결을 연마할 시간을 뺏기는 것이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사문의 존장이 모이라는데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담호가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산 전체를 하얗게 물들였던 매화꽃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은은한 매화향이 그리웠지만,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시간이 벌써 그만큼 흘러갔다는 것이 아까울 뿐이었다.
한편 담호를 뒤따르는 원율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초반엔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담호와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졌기 때문이다.
담호는 분명 살짝 절룩이면서 걷고 있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걸음을 빨리해도 담호와의 차이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원율은 경공을 펼쳐야 했다. 그제야 겨우 담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담호가 진무궁 정문에 거의 도착한 이후였다.
담호가 원율을 바라봤다.
“이대로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
“예? 그게…… 그렇습니다.”
“안내해 줘서 고마워. 다음에 보지.”
담호가 진무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원율이 중얼거렸다.
“특별한 경공이라도 익힌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불주견 취급을 하는 담호였지만 그래도 일대제자였으니까.
“그런 혜택을 받다니 역시 일대제자라는 건가?”
원율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진무궁 안에는 화산파의 일대제자들 오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화산파와 같은 거대 문파의 일대제자 정도가 되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일대제자들은 문파를 이끌어 가는 주축 전력, 각 도관이나 궁에 소속되어 제자들을 가르치거나 공적인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 때문에 일대제자들 대부분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최소한 담호가 알기로는 그랬다.
수많은 일대제자들이 모여 있었지만, 누구 한 명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엄숙한 분위기가 장내를 지배하고 있었다.
담호가 들어서자 대사형 무경이 살짝 미소를 지어 알은척을 했다.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담호는 묵묵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몇몇 사람들이 알은척을 했고, 어떤 이들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심기가 불편한 듯 인상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한소유는 달랐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담호를 바라보았다. 담호도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끼이익!
그때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진무궁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장년(長年)의 도사가 걸어 나왔다.
언뜻 평범한 듯 보였지만 도사는 잘 벼려진 명검과 같은 날카로운 기세를 발산하고 있었다.
도사의 시선이 일대제자들을 훑고 지나갔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일대제자들은 마치 알몸으로 설원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그것은 담호도 마찬가지였다.
손등과 척추를 따라 올라오는 소름과 오한. 절로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장년의 도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담호는 그가 진무궁주이자 화산파의 제일고수인 현검 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저와 같은 기세를 발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년의 도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반갑구나. 나는 현검이다.”
“현검 사숙을 뵙습니다.”
일대제자들의 목소리가 진무궁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들의 목소리엔 현검 진인을 향한 존경의 염이 담겨 있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 현검 진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너희들을 한자리에 모은 것은 바로 장문인의 명 때문이다. 장문인께서는 나의 심득을 최대한 너희들에게 많이 베풀기를 원한다.”
순간 일대제자들이 동요를 일으켰다.
많은 이들이 현검 진인의 심득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다면 엄청난 발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 들려온 현검 진인의 목소리는 그들의 열기를 싸늘하게 식게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나에겐 남들보다 조금 나은 여러 명이 필요 없다. 특출한 단 한 명이 필요할 뿐이다.”
현검 진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걸음마를 간신히 뗄 나이에 화산파에 입문해서 무려 오십 년 이상을 검의 길을 걸은 현검 진인이었다. 그와 같은 시기에 입문한 사형제들이 각각의 이유로 세상사에 관심을 갖거나, 무공을 등한시할 때도 그만큼은 오롯한 검의 길을 걸었다.
검에 살고, 검에 죽는 검객.
검으로 신선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최종 목적인 현검 진인에게 어중간한 기재들 따윈 필요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의 심득을 이어받을 뛰어난 기재였다.
“시험을 치를 것이다. 시험을 통과한 단 한 명이 나의 직전 제자가 될 것이다. 일대제자라도 상관없고, 이대제자라도 상관없다. 속가라 할지라도 특출한 재능을 보인다면 나의 제자가 되어 모든 것을 이어받을 것이다.”
우웅!
현검 진인의 선언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대부분의 문파에서 중요시 여기는 서열과 배분을 파괴하겠다는 뜻이었으니까.
만일 속가제자가 현검 진인의 제자가 되면 하루아침에 일대제자가 되는 셈이다. 엄청난 파격이었다.
이제까지 여유롭게 웃고 있던 이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중에는 일대제자들의 수장 격이라 할 수 있는 무경과 운경도 있었다.
그들 역시 설마 현검 진인이 이렇게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무경이 일대제자들을 대표해서 물었다.
“사숙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제자를 뽑으시려는 겁니까?”
“왜, 너도 욕심 있는 게냐? 무경. 너라면 이미 자하신공에 입문해서 나의 심득이 별 필요가 없을 텐데.”
무경은 화산파의 장문인인 현천 진인의 제자였다. 다음 대 장문인이 확실한 만큼 화산파 최고무공인 자하신공에 입문했을 터였다.
무경이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사숙의 심득이 욕심이 안 난다면 그게 이상하지요. 화산파 제일의 검객이신데. 하지만 사숙의 말씀처럼 저는 이미 자하신공에 입문했습니다. 아무래도 사숙의 무공과는 노선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잘 알고 있구나.”
“사숙의 심득을 이을 자, 곧 화산을 대표하는 검이 될 터. 그러니 제가 어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현검 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무경의 말이 타당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비무를 할 것이다.”
“비무의 최종 승자가 사숙의 심득을 이어받는 겁니까?”
“마음대로 생각하거라.”
현검 진인의 모호한 말에 무경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웃었다.
“전 사제들에게 망신을 당할 자신이 없으니 빠지겠습니다.”
“마음대로 하려무나.”
현검 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경을 원하지 않았다. 무경은 화산파의 장문제자로 많은 것을 받았다. 그는 자신과는 또 다른 길을 걸어 완성을 향해 다가가는 자였다. 제자가 되어도 골치만 아플 뿐이었다.
그 외 다른 제자들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물러나지 않았다. 이미 각자의 사부를 모시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현검 진인의 심득을 이어받는 것은 큰 영광이었다.
크게 보자면 다 같은 동문이니 기존의 사부들도 현검 진인의 심득을 이어받는 것을 반대치 않을 것이다.
“시간이 없다. 이대로 비무를 시작하겠다.”
현검 진인은 미리 준비한 듯 비무 할 상대들을 지목했다.
“우선 섬경과 운경. 준비하거라.”
“예? 예!”
지목을 받은 섬경과 운경이 당황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왔다. 설마 맨 처음으로 비무를 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의 얼굴엔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섬경은 금천궁에 소속되어 있었고, 운경은 태평궁에 소속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에 같이 무공을 익혔지만, 나이가 들고 소속이 달라지면서 아무래도 서로 비무를 할 기회가 없었다.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미 십 년이 지난 정보였다. 서로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직접 부딪쳐 봐야 알 듯싶었다.
‘반드시 이기겠다.’
‘현검 사백의 심득은 내가 잇겠다.’
그들은 전의를 불태웠다. 그들의 기백이 다른 일대제자들에게도 전해졌다.
진무궁 앞 연무장에 두 사람이 마주섰다. 다른 일대제자들은 둥글게 에워싼 채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시작하라.”
현검 진인의 명이 떨어지자 섬경과 운경이 서로를 노려보며 연무장을 돌기 시작했다.
다 같은 화산파의 무공을 이은 처지. 비록 직접적인 서로의 무력은 알 수 없었지만, 어떤 무공을 잘 사용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챠앗!”
먼저 움직인 이는 운경이었다. 그가 칠성검법(七星劍法)을 펼쳤다. 순식간에 목검이 섬경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섬경은 구궁보를 펼쳐 운경의 공세를 피했다. 목검이 헛되이 지나가자 매화권(梅花拳)을 펼쳤다.
쉬쉬쉭!
공터가 순식간에 그들의 그림자로 가득 찼다.
두 사람은 넓은 공터를 최대한 활용하며 서로를 제압하려 애를 썼다. 그들은 화산파의 절학을 연이어 펼쳐 냈고, 묘기에 가까운 그들의 움직임에 다른 제자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담호는 다른 일대제자들 사이에 섞여서 두 사람의 비무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기회다.’
단순히 홀로 연무를 하는 것과 상대를 두고 비무를 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이제까지 꼭꼭 숨겨 놓았던 자신들의 진짜 실력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매화권을 펼치는 섬경은 어떻게든 다가가려 했고, 칠성검법을 사용하는 운경은 어떻게든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권을 사용하는 무인과 검을 사용하는 무인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담호는 자신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있었다.
홀로 수련을 하던 담호에겐 쉽게 오기 힘든 절호의 기회였다. 담호는 두 사람의 대결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다.
현검 진인의 심득을 잇겠다는 생각 따윈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담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두 사람의 대결에 빠져들었다.
두 사람이 격돌할 때마다 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