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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3장. 제자는 스승을 바라보고, 스승은 제자를 위로한다(1)
첫 번째 대결의 승자는 섬경이었다.
섬경은 매화권 중 매화낙산(梅花落散)의 초식을 이용해 운경의 칠성검법을 무력화시켰다.
현검 진인은 두 사람의 대결이 끝난 후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다음 비무를 진행시켰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희비가 엇갈렸다.
승자는 현검 진인의 심득을 이어받을 가능성에 기뻐했고, 패자는 낙담했다. 기이한 열기가 진무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승리에 대한 갈망, 강해지기 위한 열망이 사람들의 이성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직접 비무에 참석하지 않는 무경의 눈에도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담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화산파에 오 년을 있으면서 이런 기이한 열기는 처음이었다. 화산파는 기본적으로 무파(武派)이지만, 도문(道門)이기도 했다. 때문에 항상 정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는데, 지금은 반대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의도하신 건가? 이런 분위기를.’
담호는 공터 한쪽에 있는 현검 진인을 바라보았다.
광기마저 느껴지는 분위기와 달리 현검 진인은 여전히 처음처럼 냉정함을 잃지 않고 서 있었다.
담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현검 진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현검 진인과 눈이 마주 친 순간 담호는 두 눈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충격을 받고 휘청였다. 하지만 현검 진인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런 담호의 반응에 현검 진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현검 진인 공터로 시선을 옮겼다.
공터에서는 한소유와 다른 일대제자가 싸우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梅花劍)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가 빙어처럼 하얀 손을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 매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반대로 그녀의 상대는 움찔하며 연신 뒤로 밀려났다.
매화검을 잘 모르는 담호가 보기에도 아름다우면서 효율적인 초식의 운용이었다.
“오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현검 진인은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소유의 대결에 정신이 팔려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걱!
마침내 한소유의 검이 일대제자의 옷자락을 베어내고 난 뒤에야 대결은 끝이 났다. 패배를 인정한 일대제자는 길게 베어져 나간 가슴팍 옷자락을 바라봤다.
두 치만 더 깊게 베어져 나갔어도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저, 손속에 사정을 봐주어서 감사합니다.”
“사제도 대단했어.”
두 사람은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후 제자리로 돌아갔다.
담호는 상기된 얼굴로 무경의 옆자리에 서는 한소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저의 이십사수매화검은 대단하구나. 저렇듯 현란하게 초식을 풀어낼 수 있다니.’
저런 식으로 이십사수매화검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한소유가 거의 유일했다. 여자다 보니 근력이 부족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같은 무공이라도 어떤 심득을 얻고, 어떤 방식으로 풀어 가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위력을 내기 나름이었다.
아직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소유는 자신만의 매화검을 찾아가고 있었다.
자신이 막연히 짐작하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한소유의 실력에 담호는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부럽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비록 느리긴 하지만 자신 역시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현검 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은 수경과 천경 차례다.”
자신을 호명하는 소리에 담호가 고개를 들었다.
수경은 일대제자들 중에서도 무공이 고강한 자였다. 성격이 무척이나 단호한 데다가 직설적이어서 이대제자들 중에서는 그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무척 많았다.
담호가 공터로 나갔다. 현검 진인이 그런 담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담호가 살짝이나마 다리를 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담호가 수경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사형.”
“하필 내 상대가 너라니.”
수경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 현검 진인에게 실력을 뽐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수경의 마음이었다. 절름발이를 이겨 봐야 자랑할 것도 못됐다.
수경이 현검 진인을 바라봤다. 담호와 싸워도 되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그의 눈빛에 담긴 뜻을 읽었는지 모르지만 현검 진인이 담호의 앞으로 걸어왔다.
“천경.”
“예!”
“네가 현소가 거둬들였다는 제자구나.”
“그렇습니다.”
“흠!”
현검 진인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담호의 눈빛도 착 가라앉았다. 더 이상 말이 없었지만, 그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너는 이만 돌아가도 좋다.”
“…….”
“내말 못 들었느냐? 돌아가거라.”
“왜……인지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정녕 몰라서 묻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담호의 대답이 당돌하다고 느꼈는지 현겸 진인의 눈빛에 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런 현검 진인의 눈빛이 무서웠지만 담호는 피하지 않았다.
담호를 잠시 빤히 바라보던 현검 진인이 혀를 찼다.
“제법 대가 세구나. 사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허나 너는 무인으로서 매우 커다란 결격 사유를 갖고 있다.”
“제 다리 때문입니까?”
“그렇다.”
예상했던 대답에 담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편으로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화산 제일의 고수라면 남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검은 절름발이가 익힐 수 있을 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현소 진인의 목소리엔 자신의 검에 대한 광오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담호의 가슴은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담호가 눈을 부릅떴다.
“저 역시 화산파의 일대제자입니다.”
“학도사의 제자라면 학도사의 길을 걷는 게 맞다. 학도사의 길을 걷는다면 너 역시 현소처럼 문인들의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 저보고 무공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까?”
“이미 스스로 한계를 경험하고 있지 않느냐? 그동안 어떻게든 신체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겠지?”
현검 진인의 시선이 담호의 다리를 향했다. 비록 옷에 가려져 있었지만 다른 제자들에 비해 훨씬 굵은 오른쪽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화산파의 어떤 제자들도 담호와 같은 오른 다리를 같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치열한 노력과 단련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담호의 왼쪽 다리는 빈약했다.
“하지만 아무리 단련하더라도 신체의 심각한 불균형은 절대 극복할 수 없다. 너는 절대로 상승의 경지에 들 수 없을 것이다. 이 이상 쓸데없는 노력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일찍 다른 길을 찾거라. 그게 내가 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이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담호의 단호한 대답에 현검 진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평범한 이라면 자신의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기 마련일 텐데 담호는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그런 철석 간담이 마음에 들었지만, 심득을 전수할 제자를 들이는 것은 그와는 차원이 다른 냉철함을 요구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이냐?”
“최소한 다른 이들과 똑같은 기회는 받고 싶습니다.”
“좋다. 네 의지가 정 그렇다면…….”
담호의 고집에 현검 진인이 노기를 피워 올렸다.
그가 뒤로 물러서며 수경에게 말했다.
“비무를 하거라.”
“하지만…….”
“저 아이에게 현실을 깨닫게 해 주거라. 그것이 저 아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니.”
“알……겠습니다.”
현검 진인의 단호한 음성에 수경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경이 담호를 향해 주먹을 겨눴다.
“사제, 나를 원망하지 말게.”
화산파의 절학 중 하나인 오행이형권(五行異形拳)의 기수식이었다.
오행의 이치에 따라 공력을 운용하기에 익히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대성하면 주먹질 한 방에 커다란 바위도 단숨에 분쇄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담호가 크게 숨을 들이쉬며 죽엽수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가 가장 오랫동안 익힌 무공이 바로 죽엽수였다. 위력은 오행이형권에 비할 수 없다지만 담호는 자신의 죽엽수를 믿었다.
두 사람의 모습에 한소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괜찮을까요? 말려야 하지 않나요? 죽엽수로는 결코 오행이형권을 당할 수 없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현검 사숙의 결정이다. 누구도 그분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
무경의 안색 또한 심각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현검 진인은 장문인인 현천 진인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물이었다. 그런 거물의 결정을 무경이 번복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운경이 거들었다.
“현검 사숙의 결정이 옳다. 지금이라도 천경을 위해서 현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
“사형?”
“언제까지 꿈을 꾸게 할 테냐? 무엇이 진정으로 천경을 위한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거라.”
냉정한 운경의 말에 한소유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 순간 수경과 담호가 격돌했다.
타다닥!
수경과 담호의 손이 격돌했다.
그 모습을 본 일대제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 일수에 담호가 나가떨어질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제법 오행이형권을 잘 막아 내기 때문이다.
“천경이 저 정도 수준이었나?”
“죽엽수가 오행이형권의 상대가 되다니.”
그들은 자못 놀랍다는 듯이 웅성거렸다.
가장 놀란 이는 담호와 직접 상대하는 수경이었다. 담호의 손에서 느껴지는 반진력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산파의 가장 기초적인 무공인 죽엽수를 가지고 자신의 오행이형권을 상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지만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감히!’
수경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타다다다다!
그의 손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허공이 온통 그의 주먹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오행이형권의 절초 중 하나인 목극토살(木剋土殺)의 초식이었다.
목의 기운이 토를 잡아먹어 죽인다는 의미처럼 목기(木氣)가 성한 초식이었다.
“큭!”
손에서 전해지는 충격에 담호가 나직한 신음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용케도 물러서지 않았다.
수경의 초식은 현란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비해 담호의 죽엽수는 매우 단순했다. 하지만 단단했다. 그의 굳은 의지만큼이나.
‘나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담호는 이를 악물었다.
다리가 불편해도 무공을 펼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퍼억!
그 순간 수경의 주먹이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충격에 담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담호는 죽엽수를 펼쳐 수경의 가슴을 밀어냈다.
터억!
수경의 안색이 변했다. 내공이 거의 실리지 않은 일격이라 충격은 없었지만, 설마 자신이 담호에게 일 권을 허용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쿠웅!
갑자기 담호의 기세가 변했다. 이전까지의 가벼움은 버리고 무거움이 느껴졌다. 죽엽수에서 복호권으로 전환한 것이다.
담호가 왼발을 축으로 힘차게 오른발을 내디디며 강렬하게 일 권을 내질렀다.
퍼억!
수경의 팔뚝 위로 담호의 일격이 작렬했다. 수경의 팔뚝이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일격에 손해를 본 것이다.
수경의 안색이 변했다. 그가 슬쩍 곁눈질을 했다. 현검 진인의 못마땅해 하는 얼굴이 보였다. 이대로 그의 눈에서 벗어났다가는 제자가 되는 것은 영영 물 건너간다.
‘제길!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수경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매화가 바람에 흩날리는 듯 종잡을 수 없는 걸음걸이, 매화보(梅花步)였다.
수경이 담호의 몸 주위를 맴돌았다. 담호는 왼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대지에 단단히 고정하고 방어에 신경 썼다. 하지만 수경의 매화보에 대응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물러났다가 다가가기를 반복했다. 종잡을 수 없는 수경의 움직임에 담호의 움직임이 크게 흔들렸다. 수경은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화기로 금기를 제압해 죽이는 화극금살(火剋金殺)의 초식이 담호의 가슴에 작렬했다.
콰아앙!
담호의 몸이 뒤로 훌훌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