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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3장. 제자는 스승을 바라보고, 스승은 제자를 위로한다(3)
취운궁(翠云宮).
화산 연화봉 정상에 있는 도관의 이름이었다.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띄는 이 도관이 특별한 것은 바로 화산파의 수장인 장문인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취운궁에서는 화산파의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높다란 봉우리는 물론이고 저 멀리 화음현까지 보였다. 특히 일품인 것은 밤이 되면 펼쳐지는 수많은 별들의 향연과 아침이 되면 찾아오는 일출이었다.
화산파의 현 장문인은 현천 진인이었다. 그는 구대문파 중 하나인 대화산파의 수장치고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오십 대 초반이었다.
현천 진인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화산파의 장문인을 떠맡은 게 삼십 대였으니 벌써 이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화산파를 누구보다 잘 이끌어 왔다는 평가를 듣고 있었다.
현천 진인과 조그만 탁자를 사이에 두고 중년의 도사가 앉아 있었다. 마치 칼날 같은 기운을 발산하는 도사는 바로 현검 진인이었다.
현천 진인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사제의 성취가 대단하군. 이제야 화산파도 남부럽지 않은 고수를 갖게 되었음이야. 이 사형은 안심할 수 있겠네.”
“아직 멀었습니다. 화산파의 옛 영광을 다시 구현하려면 더욱 정진해야 합니다.”
“믿음직스럽네.”
현천 진인이 무뚝뚝한 현검 진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제의 성취가 실로 예사롭지 않구나. 화산의 영화를 찾는 것이 그리 멀지 않았어.’
무력이 곧 문파의 성세를 말해 준다.
문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백 명의 어중간한 고수보다 한 명의 절대고수가 필요했다. 지금 화산파에 필요한 것도 한 명의 절대고수였다.
“고생이 많았네. 자네가 걷는 길이 곧 화산이 걷는 길이 될 것이야. 이 사형이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잊지 말게.”
“사형의 희생 덕분입니다. 사형이 아니었으면 폐허가 된 화산파를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일으켜 세우지 못했을 겁니다.”
“자네나 나나 고생이 많았지.”
현천 진인의 눈가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십 년 전 화산파의 장문인이 되었을 때는 모든 것이 암담했다. 후대를 이끌어 줘야 할 전대의 고수들은 모조리 죽고 문파의 맥이 끊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무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다. 가슴은 먹먹했고, 눈물만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무어라도 해야 했다. 현천 진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화산파의 부흥을 위해 쏟아부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자신은 무공을 익힐 시간조차 없었다.
현천 진인은 결국 선택해야 했다. 그래서 무공을 포기했다. 대신 사형제들 중 가장 재능이 뛰어난 현검 진인에게 모든 것을 밀어줬다. 화산파의 비급, 얼마 남지 않은 영약까지도.
비록 장문인만이 익힐 수 있다는 제약 때문에 자하신공은 전수해 주지 못했지만, 현검 진인은 그 못지않은 심득을 얻었다.
현검 진인이 무공을 익히는 시간 동안 현천 진인은 화산파 부흥을 위해 발로 뛰었다. 속가제자들을 만나 지원을 요청하고, 다른 문파들을 찾아 협조를 얻었다.
그렇게 이십 년을 미친 듯이 살아왔고, 결국 지금의 화산파를 만들 수 있었다. 그 사실을 현검 진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현천 진인을 누구보다 존경했다.
“자네가 이렇게 폐관을 깨고 나왔으니 무어라도 해 볼 여력이 생겼어.”
“이젠 제가 사형을 돕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든든하이. 이제 자네의 성취를 이어받을 제자만 키우면 되네. 제이의 화산제일검이 나와야 내가 안심하고 화산파를 운영할 수 있네. 제자를 뽑는 일은 잘 진행되고 있겠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자네의 제자에겐 특별히 매화신단(梅花神丹)을 내릴 걸세.”
“감사합니다. 장문인.”
매화신단은 화산파 최고의 영약으로 오직 장문인이 될 자에게만 주는 기물이었다.
제조 비법조차 잃어버려 더는 만들 수 없는 물건, 남은 것도 두 알이 전부였다. 그렇게 귀한 물건을 현검 진인의 제자 될 이에게 주겠다는 것은 그만큼 기대가 크다는 뜻이었다.
현천 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화산제일검의 성취를 이어받을 자를 찾는 일이었다. 결코 허투루 다뤄서는 안될 중요한 사안이었다.
“일대제자들 중 눈에 띄는 아이가 있는가?”
순간 현검 진인의 미간에 살짝 골이 패였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강렬한 눈빛이 쉽게 잊혀질 것 같지 않았다.
현천 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일대제자들은 이미 어느 정도 완성이 된 상태입니다. 그 상태에서 제 무공을 이어받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럼 이대제자들과 속가제자들까지 볼 생각인가?”
“재능에 항렬의 구별 따윈 필요 없습니다. 명문 화산파를 대표하는 검이 되려면 그만큼 완벽한 재능과 피땀 어린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겠지.”
현천 진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이 미소를 지을 때였다.
콰앙!
취운궁의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현소 진인이었다.
“현검 사형.”
그가 현검 진인을 노려보았다.
현검 진인은 의외로 담담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천 진인의 반응은 달랐다.
“무슨 일인가? 현소 사제. 여기가 어딘 줄 몰라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아니겠지?”
“현검 사형이 여기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장문인.”
현소 진인의 격렬한 반응에 현천 진인이 현검 진인을 바라봤다. 눈으로 영문을 묻는 것이다.
현검 진인이 입을 열었다.
“제자 때문에 왔는가?”
“그렇소! 대체 무엇 때문에 그 아이를 그렇게 망가트렸소? 그 아이가 사형에게 무슨 위해라도 가했소?”
“아니, 그런 것은 없었네.”
“그런데 왜 그랬소?”
현소 진인이 잡아먹을 듯 현검 진을 노려보았다.
이제까지 화산파에서 그 어떤 감정의 동요를 드러낸 적이 없던 현소 진인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격렬하게 감정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랑하는 제자의 상처에 현소 진인은 이성을 잃었다. 제자를 그렇게 만든 원흉을 찾아 이 자리에까지 왔다.
현소 진인의 분노에도 현검 진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게 그 아이를 위한 길이기 때문이네.”
“만신창이로 만드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하는 길이라는 거요?”
“아니, 무공을 포기하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하는 길이란 말일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현소 진인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 여파로 탁자 위에 있던 찻잔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제, 진정하게.”
현천 진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현소 진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현검 진인을 바라보았다.
“왜 무공을 포기하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하는 겁니까?”
“몰라서 묻는가?”
“나는 모르겠소. 정말이오. 모르겠소.”
“절름발이지 않은가? 발을 저는 아이가 화산파의 무공을 어찌 대성한단 말인가? 나도 그 아이의 재능이 아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네.”
“발을 절면 무공도 익히면 안 되는 것이오?”
“다른 문파라면 모르지만 적어도 화산파의 무공은 절름발이가 익힐 수 있을 만큼 녹록한 것이 아니네.”
“사형! 내, 정말 사형에게 실망했소. 다른 누구도 아닌 화산의 제일검이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이오?”
“왜 화산의 제일검은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면 안 된단 말인가?”
이제까지 아무런 표정이 없던 현검 진인의 얼굴에도 노기가 떠올랐다.
그가 현소 진인을 향해 다가왔다.
“난 말일세, 화산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네.”
“그게 내 제자를 망가트린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말했잖은가? 그 아이를 위해서라고. 쓸데없는 꿈을 꾸지 않는 것이 그 아이를 위해서도 좋다고.”
“궤변이오.”
“그게 왜 궤변인가? 자네도 알지 않은가? 무공을 익히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지난한 길인지. 오죽했으면 천궁자 사백께서도 자네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는 대신 학도사의 길을 걷게 했겠는가?”
순간 현소 진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형!”
“나는 지금도 천궁자 사백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겠네. 왜 무재가 모자라는 자네를 제자로 택했는지, 그로 인해 다른 재능 있는 제자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는지. 난 정말 이해를 못하겠네.”
“그건…….”
현검 진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현검 진인의 얼굴을 보며 현소 진인은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사형은 당시의 그 일을 아직도 가슴에 담아 두고 있었던가?’
사십 년도 더 전의 일이다.
당시 화산파 제일의 고수이자 천하에 이름 높은 검객인 천궁자가 제자를 뽑는 일은 화산파 초미의 관심사였다. 모든 제자가 당연히 천궁자의 자제가 되길 원했다.
당시 발군의 기재가 바로 현검 진인이었다. 현검 진인은 당연히 자신이 천궁자의 제자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천궁자가 뽑은 이는 바로 현소 진인이었고, 애써 뽑은 현소 진인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는 대신 학도사의 길을 걷게 했다.
천궁자의 제자가 되길 갈망했던 기재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사건이었고, 그중 누구보다 실망했던 이는 바로 현검 진인이었다.
‘만일 내가 천궁자 사백에게 사사를 받았더라면 화산파가 지금 같은 힘겨운 시기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현검 진인이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너무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분명 빠른 길이 눈앞에 있었는데도.
“나는 사제 제자가 굳이 먼 길을 돌아 현실을 확인하는 것을 원치 않았네. 무림이란 세계는 절름발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녹록한 세계가 아니란 것을 빨리 보여 주고 싶었네. 그래서 조금은 과격한 방법을 썼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네.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네.”
현검 진인의 단호한 눈빛과 말투는 현소 진인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다. 현소 진인의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현소 진인이 현천 진인을 바라보았다.
“장문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검 사형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제의 질문에 현천 진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양측의 이야기만 듣고도 얼마나 골치 아픈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화산파의 장문인은 결코 어느 한쪽에 치우친 결정을 내려서는 안됐다. 그만큼 난감한 상황이었다.
현천 진인이 현소 진인에게 물었다.
“현소 사제의 제자라면 오 년 전에 주워 온 그 아이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장문인께서도 그 아이를 들이는 것을 허락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 아이도 화산파의 당당한 일원, 그런 아이가 무공을 익히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일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
현천 진인이 장고에 들어갔다.
그는 선택의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지금 그가 어느 편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화산파의 앞날이 갈린다.
‘내가 원하는 화산은 완벽한 화산. 그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문파.’
그 순간 현천 진인은 결정을 내렸다.
“오 년 전 그 아이를 받아들인 것은 내 실수였네. 사제가 그렇게 부탁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아이를 결코 화산파의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걸세.”
“사형?”
현소 진인이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현천 진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천경이 깨어난 날 그 아이의 눈에 어려 있는 복수심과 살기를 보았네. 그것은 결코 어린아이가 가질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지.”
현천 진인은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살아났는지 몸을 살짝 떨었다.
사람을 죽여 본 자의 눈빛.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눈빛을 열두 살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었다.
“그 아이가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면 분명 화산파에 재앙을 가져올 것일세.”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는 현검 사제의 결정을 지지하네. 그러니 두 번 다시 이일을 거론하지 말게. 현소 사제.”
“장문인!”
“이미 결정을 내렸네. 그렇게 알고 있으시게.”
“어떻게?”
“자네가 제자를 돌보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지만, 이 이상 화산의 무공을 전수하는 것은 금하겠네.”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현소 진인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장문인!”
“대화산의 장문인으로서 내린 결정이네. 번복은 절대 없네.”
현소 진인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의 어깨가 잔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현검 진인의 눈빛은 냉정했고, 현천 진인의 눈에는 안쓰러운 빛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결정을 번복할 생각 따윈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현소 진인이 비칠거리며 일어섰다.
“네! 장문인의 뜻 잘 알겠습니다.”
현소 진인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번민을 겪었는지 급격히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그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고 보십시오. 천경은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사형들의 편견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 훗날 그 아이가 보여 줄 겁니다.”
“부디 그렇게 되길 빌지.”
“사제가 그 아이를 잘 인도해서 훌륭한 학도사가 되게 하게.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게 좋을 걸세.”
현소 진인은 대답대신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취운궁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천 진인과 현검 진인은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현소 진인의 신형이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는 꿋꿋이 버텼다.
절대 쓰러질 수 없는 이유가 생겼다.
‘호야, 나는 절대로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