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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1화 (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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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4장. 둘이 함께 길을 걷다(2)

한 달, 담호가 스스로의 힘으로 거동할 수 있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그동안 담호는 운공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새벽에 일어나면 운양단을 복용한 후 중천심결을 운용하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고 하루가 지나갔다.

현소 진인의 장담처럼 운양단과 중천심결은 절묘한 상호작용을 이뤘다. 늪처럼 끈적끈적하기 이를 데 없는 중천심결의 기운이 운양단만 복용하면 들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육신을 움직일 수 없기에 담호는 중천심결을 더욱 파고들었다. 집요하리만큼 파고들다 보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까지 보이게 되었다.

담호가 그렇게 중천심결에 몰입할 때 현소 진인은 운양단을 만들 약초를 얻기 위해 다시 삼공산에 들어갔다.

현소 진인이 다시 거처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산더미만 한 봇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현소 진인은 거처에 도착하자마자 쉬지도 않고 다시 운양단을 조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담호가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현소 진인은 수백 알의 운양단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몸은 좀 어떻느냐?”

“움직일 만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담호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다 보니 온몸이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돌덩이처럼 굳은 근육을 다시 원상태로 돌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특히 왼쪽 다리가 문제였다. 그동안 산을 오르내리며 그나마 완성시켰던 근육이 볼품없이 빠져 버렸다. 아예 원점에서부터 다시 근육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담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또 그보다 많은 것을 얻었다.

“사부님.”

“호야! 알다시피 기존의 화산파 무공은 너에게 맞지 않는다. 너에게 맞는 무공, 오직 너만을 위한 무공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담호의 눈이 빛났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난 오 년 동안 뼈가 저릴 만큼 절감했으니까.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바로 너만을 위한 보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너에겐 화려한 보법 따윈 필요 없다. 그 다리로는 화려한 보법을 익힐 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다른 무공을 익히는 데 방해가 될 것이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담호가 쉽게 수긍했다. 그 역시 현소 진인과 똑같은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변화가 없이 간결한 보법, 그러면서도 네 무공을 펼치기에 최적인 보법. 그런 보법이 뭐가 있을까?”

현소 진인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뒹굴고 있는 조그만 돌멩이들을 주워 평상에 배열하기 시작했다.

마치 성벽을 축소시켜 놓은 것처럼 쌓인 돌멩이들.

“이것이 너의 적이다.”

“…….”

“자신만의 무공을 완성해 철옹성 같은 굳건함을 완성한 자들. 이런 적을 상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보법을 펼쳐야 할까? 생각해 본 적 있느냐?”

“힘으로 눌러야 합니다. 저에겐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맞다. 힘으로 눌러야 하지. 그렇다면 어떻게 힘을 배가시킬 수 있을지는 생각해 봤느냐?”

“근력을 키워서…….”

“속도다.”

“네?”

“속도가 빠르면 힘도 증가한다.”

현소 진인이 바닥에서 조그만 나뭇가지를 들어 평상 위에 올려놓았다.

성벽과 나뭇가지가 대치하는 형국.

현소 진인이 갑자기 나뭇가지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나뭇가지는 돌멩이로 이뤄진 성벽을 우르르 무너트렸다.

“충차(衝車), 일격에 성벽을 무너트리는 공성 병기. 너의 보법 또한 이 충차와 같아야 한다.”

“충차?”

“그래! 충차처럼 무서운 속도로 일점에 모든 힘을 집중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단순함으로도 변화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해답이다.”

“…….”

담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끼었던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이전엔 보이지 않던 그 어떤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소 진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벽을 부수는 충차 같은 보법, 나는 충보(衝步)라고 부르겠다.”

“충보…….”

“이제부터 너와 내가 만들어야 할 보법이다.”

현소 진인의 목소리가 담호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

충보(衝步).

성벽을 향해 달려드는 충차 같은 보법을 만든다.

일단 화두가 정해지자 현소 진인과 담호는 무섭도록 몰두했다. 현소 진인은 그동안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던 지식들을 풀어놨다.

“강호에 이름난 절학 중에 혈천각(血天脚)이라는 무공이 있다.”

“혈천각?”

“백이십 년 전 홀로 강호를 주유했던 철혈패마(鐵血覇魔) 우경패의 독문절학이다. 발길질 한 번이면 피보라가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극악한 위력을 자랑하지.”

우경패는 혈천각 하나로 당시 십대고수의 반열에 들었었다. 하지만 포악한 성정과 정사를 가리지 않고 문제를 일으켰기에 강호의 공적이 되었었다.

당시 수백 명의 강호 고수들이 우경패를 척살하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우경패는 그들의 추적을 뿌리치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는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전설이 되었고, 이제는 잊혀져 우경패라는 존재를 기억하는 이조차 거의 없었다.

“세인들은 단순히 우경패가 강호에 염증을 느껴 은거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다르다. 당시 강호의 피해를 보다 못한 본문의 제일 고수이신 화산검선 상천자 어르신께서 나섰던 것이다.”

상천자는 우경패와 마찬가지로 천하 십대고수에 속해 있었고, 검으로는 능히 당대 제일을 다툴 만했다.

상천자와 우경패는 하루 밤낮을 싸웠다. 천지가 번복할 만한 싸움이 이어졌고, 결국은 상천자가 우경패를 반초 차이로 이길 수 있었다.

“만일 우경패가 강호 고수들의 추적을 뿌리치느라 공력을 소모하지 않았다면 상천자 어른께서도 결코 그를 제압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우경패는 강했다.”

상천자는 우경패를 죽인 후 독문절기인 혈천각이 적힌 비급을 불태워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혈천각을 살펴본 상천자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비록 우경패라는 주인을 만나 잘못 사용되었지만, 혈천각이라는 무공 자체는 정말 훌륭한 무공이었다. 그 때문에 상천자 어르신께서는 혈천각을 당시 학도사에게 기억하도록 했지. 공개적으로 보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혈천각은 학도사들의 구술을 통해 현재까지 이어졌다.

“소림의 무영각(無影脚)을 대성하면 몸을 허공에 띄운 채 무려 열여덟 번의 발길질을 할 수 있다고 하지. 절묘한 내공의 분배와 연환의 묘를 극대화시켰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혈천각은 다르다. 연환의 묘나 내공의 분배 따윈 생각하지 않고 단 일격에 상대를 분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담호가 현소 진인을 빤히 바라봤다.

이제까지 오 년을 함께했지만 현소 진인이 이만큼 열변을 토하는 것은 처음 봤다.

“혈천각에 현란한 보법 따윈 필요하지 않다. 기둥이 되어 줄 만한 튼튼한 다리만 있으면 된다. 혈천각을 익히고 궁구하다 보면 분명 충보 또한 완성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부를 믿었다. 그가 하는 말이라면 분명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현소 진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담호에게 혈천각을 알려 주는 것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장문인 현천 진인은 담호에게 화산파 무공을 전수해 주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혈천각은 화산파의 무공이 아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혈천각의 초식과 내공 운용을 모두 들은 담호는 그제야 왜 그렇게 현소 진인이 열변을 토했는지 알 수 있었다.

혈천각에 정묘한 움직임 따윈 필요 없었다. 필요한 것은 파괴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예비 동작뿐. 다리가 불편한 담호도 충분히 펼칠 수 있는 무공이었다.

문제는 혈천각을 펼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다리 근력과 폭발적인 폐활량, 그리고 정묘한 내공의 운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부님.’

담호는 현소 진인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샘솟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절학을 꺼내 놓고 익히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담호의 신체 조건과 그동안의 노력, 그리고 발전 방향까지 고려해서 내놓은 해결책이었다.

그를 위해서 현소 진인이 얼마나 많은 날을 고민했을지, 또 불면의 밤을 지새웠을지 눈에 훤했다.

그 후로도 현소 진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연신 토해 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담호는 현소 진인과 더불어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모든 것의 기본은 현소 진인이 처음 언급한 충보였다.

충차 같은 보법, 그리고 그와 어울리는 무공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두 사람의 지상 과제였다.

두 사람은 연일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밤을 지새우는 일이 다반사였고, 어떤 때는 며칠 동안이나 잠 한숨 자지도 못했다.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일대 종사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이론만 알고 있는 학도사와 무모함만 갖고 있는 애송이 무인이 무공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두 사람에겐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쉽게 포기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척이나 끈질겼다.

담호나 현소 진인 모두 화산파 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 관심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덕에 현소 진인과 담호는 훨씬 편하게 무공을 시험하고 만들어 갈 수 있었다.

현소 진인이 이론적인 방향을 제시한다면 그것을 몸으로 검증하는 것은 담호의 몫이었다.

만일 중천심결이라는 안정적인 심법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기도 했다.

담호는 화산을 오르내리던 일을 멈췄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 특별한 방법으로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현소 진인의 거처 뒤쪽에는 조그만 공터와 큰 바위가 있었다. 바위는 커다란 전각만큼이나 거대했다.

현소 진인은 바위 아래쪽, 담호의 눈높이와 비슷한 위치에 조그만 원을 그렸다.

담호는 담담히 현소 진인이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현소 진인은 원이 그려진 바위에서 공터를 향해 똑바로 선을 그었다.

곧은 선이 바닥에 그어졌고, 담호를 그 끝에 세웠다.

“오늘부터 네가 해야 할 과제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곳에서 저 바위까지 단 한 걸음에 도약해 주먹으로 원을 때리는 수련을 한다.”

담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가 서 있는 곳과 바위까지의 거리는 무려 이 장(육 미터).

멀쩡한 사람, 무공을 익힌 무인도 한 번의 도약으로 단축하기엔 너무 먼 거리였다.

현소 진인이 바닥에 그어진 선을 가리켰다.

“반드시 왼발로 도약을 해야 하며, 절대로 이 선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사부님.”

“너의 다리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해내야 한다.”

현소 진인의 말에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왼쪽 다리는 살짝 휘어지고 뒤틀렸다. 그 때문에 제대로 된 힘을 줄 수도 없고, 정확한 방향을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지금의 수련은 단순히 왼발을 강화하는 것만이 아니다.

다리가 틀어졌기에 담호의 몸 균형은 많이 어긋나 있었다. 이 수련을 무사히 마칠 수 있다면 담호의 균형 감각은 최고조로 발달할 것이다.

“시작하거라.”

“예!”

담호는 군말 없이 현소 진인의 지시에 따랐다.

탓!

바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큭!”

담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위에 주먹이 닿기는커녕 삼분의 일도 채 도약하지 못했다. 최악인 것은 현소 진인이 그은 선에서 왼쪽으로 많이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곧 담호의 몸이 왼쪽으로 틀어져 있다는 증거였다.

현소 진인의 추상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담호는 군말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바위를 향해 도약했다.

“헉헉!”

담호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져 갔다.

대지를 박차고, 바닥을 나뒹굴면서 그의 몸이 흙투성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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