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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2화 (1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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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4장. 둘이 함께 길을 걷다(3)

무릎을 꿇은 담호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폐는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이기 위해 한껏 확장됐고,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있었다. 담호는 부들부들 떨리는 두 다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양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되자 담호가 고개를 들어 전방을 바라봤다. 원이 그려진 바위가 보였다.

매일같이 바위를 향해 뛰고, 또 뛰었다.

목표는 바위에 그려진 조그만 원. 그 안에 주먹을 찔러 넣기 위해 수도 없이 뛰었다.

처음엔 바위의 원에 주먹이 닿기는커녕, 밑바닥에 그어진 선에서 한참이나 옆으로 벗어나기 일쑤였다.

제대로 뛰는 것, 똑바로 뛰는 것.

그를 위해선 자신의 몸 상태를 확실하게 파악해야 했다. 다리의 휘어진 각도, 그리고 대지를 박찰 때 근육의 움직임과 견딜 수 있는 하중까지 알아야 했다.

제대로 방향을 잡는 데만 거의 한 달이 걸렸다. 그 후부터는 거리를 조금씩 늘려 갔다.

진정한 지옥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뒤틀린 다리로 대지를 힘껏 박차려니 고통이 장난이 아니었다. 다리 전체가 뒤틀리고 근육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뛰었다. 고통에 무감각해지려고 했다. 그러자 정말 어느 순간부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고통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일 장(3미터)까지 늘리는 데 한 달이 걸렸고, 그 두 배로 늘리는 데 두 달이 더 걸렸다. 그리고 오늘 담호는 마침내 바위에 그려진 원에 주먹을 찔러 넣을 수 있었다.

그 증거로 담호의 주먹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바위와 부딪치면서 살갗이 찢겨져 나간 것이다.

“휴!”

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겨우 원하는 첫 계단을 오른 셈이었다. 아직도 올라야 할 계단이 수도 없이 남아 있었다. 겨우 한 단계 올랐다고 주저앉아 쉴 수는 없었다.

담호는 바위에서 이어진 선을 더 그었다. 거리가 일 장여가 더 늘어났다.

‘더 빨리, 더 강렬하게.’

단순하게 바위에 닿아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저 거대한 바위를 일격에 부술 수 있을 만큼 강렬한 힘과 내공을 실어야 했다.

팟!

담호가 다시 바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허공에 그가 흘린 땀방울이 흩어졌다.

밤이 되었어도 담호는 쉴 수가 없었다.

운양단을 복용하고 중천심결을 운공 했다. 그의 단전에는 내기가 하루가 다르게 쌓이고 있었다.

운공을 하는 담호의 곁에는 현소 진인이 있었다.

현소 진인의 앞에는 서책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책자였다.

현소 진인은 빈 책자 위에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백지 위에 사람의 형상이 그려지고, 글이 써졌다.

지난 넉 달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담호와 무공을 의논했다. 그 결과 뚜렷한 방향성과 개념을 잡을 수 있었다.

이제까지의 결과물을 기록하는 과정이었다. 단 한 글자라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담호를 위한 책자였다. 아무리 머리로 알고, 몸으로 체득하고 있어도 글자로 보는 것은 또 달랐다.

“휴!”

마침내 현소 진인이 붓을 내려놓았다.

방금 전까지 비어 있던 책자에는 사람이 무공을 펼치는 그림과 조그만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현소 진인은 한참 동안이나 자신이 만든 서책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서책 안에 적혀 있는 무공은 너무나 살기가 짙었다. 도문인 화산파에서 만들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담호의 성향이 그랬고, 무공을 처음 만들 때 현소 진인의 마음 또한 격앙되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담호를 무시한 장문인과 현검 진인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감춰 뒀던 혈천각을 꺼냈고, 그 외에도 자잘한 무공들을 융합하고자 노력했다.

화산파와는 상관없는 무공들이었고, 그래서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어느 정도 차분해지자 모든 것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서책 안의 무공이 완성되면 분명 엄청난 위력을 갖게 될 것이다. 서책 안에 적힌 무공엔 도문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자비심이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래도 분노에 눈이 멀었던 모양이구나. 제자가 익힐 무공에 이렇게 강한 살기를 담다니.”

현소 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제 겨우 개념만 잡은 무공이다. 초식이라고는 몇 가지 되지 않았고, 언제 완성될지 기약조차 할 수 없었다.

짧게 잡아도 수십 년이고, 자칫하면 세대를 넘겨야 할 수도 있다. 새로운 무공을 만드는 것은 그렇게 지난한 일이었다.

아마 담호가 새로운 무공을 완성했을 때는 무척이나 나이가 든 상태일 것이고, 그때쯤이면 담호의 핏속에 들끓는 분노와 살기도 어느 정도 사그라질 것이다.

“휴우!”

그때였다. 이제가지 운공만 하던 담호가 마침내 눈을 떴다. 그런 그의 눈에 기광이 일렁이다가 사라졌다.

이제야 중천심결의 진정한 모용을 알 듯싶었다.

중천심결로 쌓은 내기는 한없이 무거웠다. 단순하지만 묵직했고, 묵직하지만 느리지 않았다.

운양단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중천심결의 모용을 깨닫지도 못했을 것이다.

담호는 이제야 사부가 왜 중천심결과 혈천각을 익히게 했는지 확실히 알았다.

두 가지 무공은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두 가지 무공을 대성해 지금 만들고 있는 무공에 융합시킨다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현소 진인이 담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무거운 기운을 네 주먹에 담을 수 있게 되면 그 누구도 네 앞을 가로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담호가 고개를 숙였다.

현소 진인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의 어둠 속에 비친 한 줄기 횃불이었다. 그의 인도가 있었기에 방향을 가늠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 서책을 받거라.”

“이건?”

“너와 함께 잡은 개념을 기록해 놓았다. 막히는 것이 있으면 이 서책을 보고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감사합니다.”

담호는 두 손으로 현소 진인이 내미는 서책을 받았다. 아직 채워진 곳보다 빈 곳이 훨씬 많았다.

“시작은 함께했지만, 완성시키는 것은 너의 몫이다. 어떤 식으로 발전시킬지는 전적으로 너에게 달렸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그 후로도 담호와 현소 진인은 서책에 적힌 무공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를 나눴다.

담호는 무공을 익히면서 느꼈던 점을 이야기했고, 현소 진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무공 지식을 총동원해서 담호의 의문을 풀어 주려 노력했다.

담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제 개념만 잡은 무공, 얼마나 더 험난한 길이 기다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담호는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웠다.

사부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

“휴!”

북로표국(北路鏢局)의 대표두 막굉이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소매로 닦았다.

아직은 바람이 차가운데도 땀이 적잖게 흐르고 있었다. 그만큼 햇볕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이제 봄이 머지않은 모양이구나. 중원엔 벌써 봄꽃이 피었겠군.”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젊은 표두 한 명이 말을 몰아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제 삼십 대 초반의 표두 임호령은 막굉이 아끼는 동생이었다.

“형수님이 벌써 그리우신 모양입니다, 형님.”

“너 같으면 그렇지 않겠느냐? 표행을 떠나온 지 벌써 일곱 달째야. 마누라 살냄새 맡고 싶어서 죽겠다.”

“저도 그렇습니다. 어서 빨리 집에 가서 마누라와 아이들을 보고 싶습니다.”

임호령의 얼굴에 그리운 빛이 떠올랐다.

무려 서역을 다녀오는 상행이었다. 북로상단은 최고 서역 상로를 개척하고, 명운을 건 상행에 나섰다.

사실 일곱 달도 길다고 볼 수 없었다. 보통 서역에 다녀오려면 일 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만큼 서둘렀고,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서역과의 거래 선을 뚫었으니 이젠 더욱 높이 비상하는 일만 남았다.

두 사람이 뒤를 돌아봤다.

수백 명의 사람과 수많은 마차들이 그들을 따르고 있었다. 북로상단에 속한 상인들과 표국에 속한 표사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원하는 만큼 결실을 얻었기에 중원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현재 그들의 위치는 신강성 나포박호(羅布泊湖), 중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감숙성 옥문관(玉門關)이 그리 멀지 않았다.

부지런히 이동하면 열흘이면 충분히 감숙성에 들어갈 것이다. 감숙성에서 북로상단의 본단이 있는 호북성까진 다시 한 달의 여정이 더 남아 있지만, 그래도 중원에 거의 도착했기에 발걸음이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막굉이 물었다.

“단주님은?”

“마차 안에서 잠드셨습니다.”

“피곤하실 만도 하지. 그동안 얼마나 노심초사하셨는가?”

“그래도 원하는 결과를 얻었기에 마음 편히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북로상단의 단주 오승경은 호북성의 명문인 무당파의 속가제자였다.

무당파에서 배운 무공과 검 한 자루만을 믿고 상행을 시작한지 어언 삼십 년. 그동안 북로상단은 호북 제일의 상단이 되었다.

북로상단을 지키기 위해 북로표국을 설립했고, 대표두 막굉이 총 책임자가 되었다.

“형님, 미리 축하드립니다.”

“뭘 말이냐?”

“이제 호북성으로 돌아가면 북로표국의 국주가 되실 것 아닙니까? 미리 축하드립니다.”

“인석아. 그것도 무사히 돌아갔을 때 이야기야.”

단주 오승경은 이번 상행만 무사히 마치면 막굉에게 북로표국의 국주 자리를 줄 거라고 천명했었다. 일개 표사로 시작한 막굉에게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

“이제 중원에 다 왔습니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임호령이 싱글싱글 웃었다. 그에 막굉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였다.

쉬익!

갑자기 허공에 매서운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크악!”

뒤이어 표두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막굉과 임호령의 안색이 싹 변했다.

“무슨?”

그들이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진 표두가 보였다.

“습격? 대체 누가…….”

그 순간 언덕 위로 검은 피풍의로 전신을 가린 이들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무려 백여 명이 넘었다.

“웬 놈들이냐?”

막굉과 임호령이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그들의 얼굴엔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습격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기도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마차에서 잠자고 있던 오승경이 밖으로 나왔다. 그가 습격자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나는 무당의 속가제자이자 북로상단의 상단주인 오승경이라고 한다. 그대들은 누구기에 감히 북로상단을 습격하는 것인가?”

오승경은 무당파를 내세웠다.

구대문파 중 하나이자 오악검파(五嶽劍派)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무당파를 내세워 적들에게 위협을 주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런 오승경의 기대를 철저히 짓밟았다.

습격자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

“무당이 대수던가?”

“감히 무당을 업신여기다니.”

오승경이 노기를 피워 올렸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사문인 무당파를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우두머리가 오승경 등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무당파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군.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무당파도 우리가 활동할 때는 감히 크게 숨도 쉬지 못했다.”

“무슨?”

오승경과 막굉 등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오를 때 우두머리 남자가 피풍의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그의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진 문양이 드러났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단순하게 형상화한 문양.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오승경 등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그 문양은 서, 성화? 설마 마교인가?”

이십 년 전 멸망했다고 알려진 단체, 세상 모든 마(魔)의 원류라고 알려진 곳.

그곳이 마교였다.

당시 마교를 몰아내기 위해 전 중원이 힘을 모았었다.

삼 년여의 처절한 전투 끝에 중원은 결국 마교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중원이 입은 피해도 엄청났다. 수많은 문파들이 전력을 잃거나 멸문을 당했고, 아직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해 몰락한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우두머리 남자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제 알겠지? 우리가 왜 무당파를 두려워하지 않는지.”

“저, 정말 마교인가?”

“직접 확인하도록.”

우두머리 남자가 손짓을 했다.

그 순간 그의 뒤에 도열해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북로상단과 표국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오승경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와 막굉이 눈빛을 교환했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막굉이 임호령을 바라봤다.

“호령.”

“예! 대표두.”

“너는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살아남아라.”

“무슨 말입니까? 저는 끝까지 함께 싸울 겁니다.”

“저들이 정말 마교라면 우리는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저들의 존재를 중원에 알려야 한다. 우리 중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자는 너 하나뿐이다. 부탁한다, 호령.”

“크윽! 대표두.”

임호령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오승경과 막굉이 임호령을 뒤로하고 전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가득했다.

그날 북로상단과 표국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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