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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3화 (1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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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5장. 때론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오기도 한다(1)

담호는 감았던 눈을 떴다. 향긋한 매화향이 바람에 실려 오고 있었지만, 담호는 그런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온 정신은 눈앞에 있는 거대한 바위를 향해 열려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바위 위에 그려진 조그만 원만이 보였다.

“후우!”

담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단전에 웅크리고 있던 묵직한 기운이 그의 혈도를 타고 전신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담호의 뒤틀린 왼쪽 다리가 바닥을 깊이 파고들어 갔다. 종아리 근육이 살짝 부풀어 오른다 싶은 순간 대지를 튕겨 냈다.

투웅!

마치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담호의 신형은 한 줄기 선을 그으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성문을 부수는 충차처럼 일직선으로 돌진하는 보법인 충보였다.

거대한 바위가 공간을 단축해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났다. 담호의 주먹이 바위를 향해 채찍처럼 뻗어 나갔다.

파성추(破城錐).

충보와 함께 만들어진 주먹질. 성벽을 부수는 일격이었다.

퍼억!

나직한 소성과 함께 담호의 주먹이 손목 어림까지 바위에 파고들었다. 두부처럼 부서진 바위 부스러기가 흘러내렸다.

담호가 바위에 파고들었던 주먹을 꺼냈다.

온통 깨지고 흉터와 굳은살로 뒤덮인 주먹에 지난 일 년의 노력과 피눈물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제야 겨우…….”

담호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일 년의 노력과 눈물이 결실을 걷는 순간이었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사부님.”

현소 진인이었다. 그의 얼굴에도 담호처럼 감격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지난 일 년 동안 담호의 노력을 지켜봐 온 현소 진인이었다. 때문에 담호가 얼마나 피땀 어린 노력을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겨우 삼 장의 거리일지 모르지만, 담호에겐 중원을 가로지르는 장강의 광활한 넓이만큼이나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매일 수도 없이 넘어지고 구르면서 충보를 익혔다. 담호의 왼쪽 다리는 이제 충보를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단련됐고, 그의 주먹은 바위를 파고들 정도로 단단해졌다.

현소 진인이 담호의 어깨를 두들겼다.

“허나 자만하지 말거라. 이제 겨우 남들과 동일 선상에 선 것뿐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남들과 똑같은 위치에 서기 위해 저 밑바닥에서 악착같이 기어 오른 담호였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담호의 독기는 더 강해졌고, 인내심은 더 질겨졌다.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고, 그 긴 시간 동안 전력으로 질주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두 번 다시 그렇게 힘없이 짓밟히지 않을 것이다.’

담호가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의 눈에 절로 살기가 일렁였다.

현소 진인이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호의 살기는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구나.’

이러다가 자신이 괴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현소 진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담호는 그의 하나밖에 없는 제자였다. 그런 제자를 위해 한 일이이었다.

이제 와서 후회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과 노력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일이었다. 최소한 자신의 제자와 관한 일만큼은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계절이 네 번을 바뀌는 동안 누구 한 명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다. 장로들은 물론이고, 일대제자들조차도.

담호의 상처가 궁금해 찾아올 만도 한데 단 한 명도 이곳에 발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물론 그 안에 저만의 사정이 있겠지만, 현소 진인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담호는 그렇게 없는 사람 취급받을 만큼 값어치가 없는 아이가 아니다. 이 아이는 분명 화산파의 보물이 될 것이다.’

현소 진인은 그렇게 확신했다.

담호가 흘린 피와 땀은 결코 거짓된 것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현소 진인이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현소 진인의 시선이 진무궁이 있는 운대봉을 향했다. 진무궁주 현검 진인이 기거하고 있는 곳이다.

현검 진인은 최근 다시 폐관에 들었다. 이번에 그 혼자만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최근에 얻은 제자와 함께 폐관 수련에 들어간 것이다.

그가 새로이 얻은 제자의 도호는 명경, 뜻밖에도 속가제자 출신이었다.

현검 진인은 일대제자들과 이대제자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인재를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은 본산에서 수련을 하던 속가제자들 중 마음에 드는 기재를 찾아내어 제자로 받아들였다.

명경의 신상 내력 아는 사람은 화산파 내에서도 거의 없었다. 그만큼 주목받지 못하던 존재였던 것이다.

현검 진인이 무엇을 보고 명경을 제자로 받아들였는지 몰랐다. 하지만 현검 진인의 제자가 된 명경에게 기대가 쏠리는 것이 당연했다.

폐관 수련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현검 진인이 ‘명경이 만족스러운 성취를 얻기 전까지 나오지 않겠다’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현검 사형, 부디 당신이 거둔 명경이 화산을 부흥시킬 수 있는 기재이길 빌겠소.’

처음엔 명경이란 존재에 분노도 했었다. 단순히 현검 진인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분노도 많이 희석되었다.

현검 진인은 미웠지만, 명경까지 미워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명경이 잘되어 화산파의 든든한 우산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현소 진인이 담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이 좁은 곳에서 충보를 익히느라 고생이 많았다. 오랜만에 바람이나 쐬자꾸나. 화산 곳곳에 매화꽃이 만발한 것이 아주 보기가 좋단다.”

“예, 사부님.”

담호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현소 진인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담호가 그 뒤를 따랐다.

그동안 무공을 익히느라 몰랐는데, 화산 곳곳에 매화가 피어 있었다. 날카로운 암릉(巖陵) 사이 곳곳으로 보이는 매화의 모습이 수려하기 그지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화산은 눈에 뒤덮여 있었다. 만물은 숨을 죽였고, 자신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봄이 되니 다시금 제 모습을 드러내며 만천하에 자신의 존재감을 흩뿌리고 있었다.

현소 진인이 느끼는 바가 있어 중얼거렸다.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아서 비어 있어도 다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욱 나오는구나. 만물의 이치와 같으니 굳이 도경 속에서 도를 찾을 이유가 더 있을까?”

현소 진인은 멍하니 멈춰 서서 매화가 만개한 화산을 바라보았다. 담호는 그런 사부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바람이 불어와 매화 잎이 흩날렸다.

***

담호는 품속에서 서책을 꺼내 들었다. 현소 진인이 건네준 그 책자였다. 그동안 얼마나 서책을 만졌는지 누런 표지가 벌써 닳아 너덜거리고 있었다.

서책을 펼치자 이제껏 정리해 놓은 글들이 보였다. 사부가 만들어 놓은 토대 위에 담호의 심득이 더해졌다.

‘아직 멀었어.’

이제 겨우 충보와 파성추를 펼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원래 생각했던 진정한 위력을 내려면 아직도 멀었다.

혈천각도 요원하고, 다른 것들도 형태만 잡아 놨을 뿐 실제로 펼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름조차 짓지 못한 채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미완성의 공부.

담호는 낡은 서책에 오늘 느낀 심득을 적은 후 품에 넣었다.

볕이 좋았다. 담호는 평상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흘러가는 구름이 보였다. 담호는 멍하니 구름을 바라보았다.

현소 진인은 아까 낮에 산책을 할 때 무슨 깨달음을 얻은 것인지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담호는 그런 현소 진인을 방해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지금 이 현소 진인에게 무척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무인이 부단한 연마를 통해 성취를 높인다면, 도사는 깨달음을 통해 도력을 높인다. 담호는 현소 진인이 그런 과정을 겪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았다.

담호가 현소 진인이 스스로 방문을 열고 나오길 기다릴 때였다. 갑자기 수풀 저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담호가 팔베개를 풀고 급히 평상에서 일어섰다. 수풀 너머를 바라보는 담호의 눈에 섬뜩한 빛이 떠올랐다.

그 순간 수풀을 헤치고 누군가 나타났다.

이제 겨우 열네댓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 도사였다. 담호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너는?”

이대제자인 원율이었다.

“사……숙께 원율이 인사드립니다.”

원율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담호에게 포권을 취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 공경의 빛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장문인께서 급히 사숙조를 모셔 오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담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난 일 년간 기별조차 없었던 장문인이었다. 그런 장문인이 이제 와서 사부를 찾는다고 하니 무언가 이상했다.

“기다리거라.”

“허나 장문인께서는 급히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기다리거라.”

“사숙! 장문인께서는…….”

“기다리라 말했다.”

담호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순간 원율은 가슴이 진탕되는 것을 느끼고 경악했다.

‘무슨?’

비록 이대제자이긴 하지만 그 역시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을 만큼 고련을 했다. 그런 그가 겨우 타인의 말 한마디에 동요를 일으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율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담호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원율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착 가라앉은 담호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껄끄러웠다. 감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원율은 입을 꾹 다문 채 바닥을 바라봤다. 굴욕적이었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은 흘러갔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원율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미 담호에게 기를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사숙은 거의 폐인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일대제자들은 진무궁에서 있었던 일을 쉬쉬하려고 했지만, 수많은 목격자들의 입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화산파의 전 제자가 담호가 폐인이 되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율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담호의 모습 어디에서도 폐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숙?”

원율이 용기를 내서 담호에게 질문을 던지려 할 때였다.

“밖에 누가 온 것이냐?”

현소 진인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잠깐 사이 현소 진인의 눈빛은 더 깊어져 있었다. 담호는 단번에 현소 진인의 변화를 눈치챘다.

“이대제자 원율이 사숙조를 뵙습니다.”

“네가 이곳에 어인 일이냐?”

“장문인께서 사숙조를 불러오라 하셨습니다.”

“장문인께서?”

현소 진인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무슨 일로 장문인이 나를 찾는 게냐?”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그저 모시고 오라는 명만 받았습니다.”

“으음!”

의문이 들긴 했지만 고민을 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화산파의 장문인이 부르고 있었다. 화산파의 제자가 되어서 장문인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가겠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담호가 현소 진인에게 다가왔다. 현소 진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원율을 앞세워 거처를 나섰다.

근 일 년 만의 외출이었다. 평생을 화산에서 지낸 현소 진인이었지만, 왠지 오늘 따라 주변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용의 등뼈 같은 창룡령을 지나 오운봉에 도착했다. 오 년 만에 와 보는 오운봉이지만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는 현소 진인의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다.

‘무량수불! 세상은 변한 것이 없는데, 오직 나의 마음만이 변했구나.’

현소 진인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연화봉이 가까워지면서 취운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취운궁 앞에 서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담호의 인상이 살짝 굳었다.

“사형?”

“천경 사제?”

담호를 보며 놀라는 이는 담호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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