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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5장. 때론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오기도 한다(2)
대사형 무경이 담호를 알아보고 말을 더듬었다.
“사, 사제. 괜찮은 거야?”
“많이 좋아졌습니다.”
담호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담호의 차가운 대답에 무경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무경뿐만이 아니었다. 취운궁 앞에 모여 있는 화산파 제자들 대부분이 그와 같은 표정이었다.
지난 일 년 동안 누구 한 명 담호를 찾지 않았다. 물론 그 안에는 말 못 할 사정이란 것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담호에 대한 미안함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상처를 치료하며 지냈습니다.”
담호는 간단히 대답했다. 무경은 그의 담담한 말투 속에서 더 이상 말을 섞기 싫다는 느낌을 받았다.
“으음!”
무경은 더 이상 뭐라 말 할 건더기를 찾지 못하고 머리만 긁적거렸다.
그때였다.
“그쪽분도 화산파의 제자이신가 보군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담호와 무경을 향해 다가왔다. 담호와 무경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을 향했다.
담호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소녀였다. 단아한 이목구비와 굴곡진 몸매, 그리고 깊은 눈매와 그윽한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옷을 입고 있어서 단아한 미모가 더욱 돋보였다.
담호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화산파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새로 받아들인 제자인가?’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담호의 추측과는 전혀 달랐다.
“저는 무당파의 제자인 연소하라고 해요.”
“무당파?”
“이번에 사부님과 함께 화산을 방문하게 되었어요. 그쪽은요?”
“천경.”
“그쪽도 화산파의 제자신가요?”
“그는 화산파의 일대제자 맞습니다.”
대답을 한 이는 무경이었다.
무경의 대답에 연소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반가워요, 천경 소협.”
담호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순간 연소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제까지 봐 온 화산파의 도사들과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담호가 무경을 바라봤다. 연소하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묻는 것이다.
무경이 설명했다.
“보다시피 무당파에서 사람이 왔다.”
“무슨 일입니까?”
“글쎄다. 갑자기 찾아와서…….”
무경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담호의 시선이 연소하를 향했다. 그러자 연소하가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제가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네요.”
그녀의 시선이 취운궁을 향했다.
취운궁 안쪽에는 현천 진인이 비슷한 연배의 도사와 마주 앉아 있었다. 화산파의 도사들과는 여러모로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도사였다. 머리엔 도관을 쓰고 팔괘 문양이 그려진 도사복을 입은 도사에게서 범상치 않은 위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천 진인과 도사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때 현소 진인이 들어왔다.
“장문인, 부르셨습니까?”
“어서 오게, 사제.”
현천 진인이 그제야 경직된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선 인사부터 하게. 이쪽은 무당파의 청허 진인이시라네.”
“무당파?”
현소 진인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의문을 푸는 것보다 인사를 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포권을 취했다.
“화산파의 현소라고 합니다. 청허 진인.”
“반갑습니다, 현소 도우. 노도는 무당파의 청허입니다.”
청허 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포권을 취했다.
“무당파에서 본문에는 어인 일로?”
“일단 자리에 앉게. 청허 진인께서 설명해 주실 것이네.”
현천 진인의 말에 현소 진인이 자리에 앉았다.
현소 진인은 무림 정세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만일 그가 무림 정세에 조금만 더 밝았더라면 청허 진인을 보고도 이렇게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진 못했을 것이다.
청허 진인은 무당파가 수십 년 내 배출한 가장 걸출한 무인이었다. 그는 특히 무당파의 검술에 능통했는데, 그 성취가 가히 호북제일검(湖北第一劍)을 노려볼 만하다고 했다.
청허 진인이 현소 진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현소 진인은 피하지 않았다.
문득 청허 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무량수불! 장문인의 사제라고 하시더니 느껴지는 도력이 정말 대단하시군요.”
“저 같은 말코 도사에게 도력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현소 진인이 손사래를 쳤다. 그의 청수한 얼굴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그런 모습이 꼭 어린아이가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함덕지후(含德之厚)는 비어적자(比於赤子)라. 원래 덕을 깊이 쌓아 둔 사람은 어린아이 같은 법이지요.”
청허 진인의 말에 현천 진인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무당파의 청허가 사제를 그렇게 높이 평가한단 말인가?’
청허 진인은 무당파 내에서도 명망이 높기로 소문이 난 도인이었다. 단순히 검술뿐 아니라 도경에도 능통해 명망이 두텁다고 했다.
그런 이가 현소 진인을 극찬하니 현천 진인도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벌게진 현소 진인이 허둥지둥 말했다.
“그런데 무당파에서 본문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이런 제가 결례를 범했군요. 사실은 화산파의 도움이 필요해 찾아왔습니다.”
“본문의 도움이 필요하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것도 아주 절실히.”
현소 진인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무당파와 화산파 모두 같은 구대 문파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현재 누리고 있는 성세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났다.
무당파가 최고의 성세를 누리고 있는 반면, 화산파는 이제 겨우 쇠락기에서 벗어나 웅비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호에서의 영향력이나 지닌 바 힘은 화산파가 결코 무당파에 비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강대한 무당파가 화산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게…….”
청허 진인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를 대신해 대답을 한 이는 현천 진인이었다.
“마교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구나.”
“마교?”
현소 진인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청허 진인을 바라보았다.
“사실……입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들의 흔적이 발견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본문의 속가제자가 운영하는 북로표국이 원행길에 괴인들의 습격을 받아 전멸했습니다.”
“그런…….”
“모두 죽고 단 한 명, 임호령이라는 표두만 겨우 살아남아 전서구를 날렸습니다. ‘마교(魔敎)의 습격을 받았다.’라고…….”
“마교…….”
현소 진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교’라는 단순한 한마디에 담겨 있는 그 수많은 의미, 그리고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공포라는 감정이 다시 그의 뇌리를 잠식해 왔다.
어떻게 잊을 것인가? 그 이름을.
수십 년 전 무림이 그 이름 하나 때문에 피로 물들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유수의 문파들이 멸문했다.
마교를 몰아내기 위해 강호의 문파들이 힘을 모았고, 십 년이 넘는 싸움 끝에 결국은 마교를 전멸시킬 수 있었다. 그렇기까지 흘린 피, 희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정말 마교 맞습니까?”
“그걸 확인해야 합니다.”
“무슨?”
“달랑 전서 한 장에 마교가 다시 나타났다고 천하에 공표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직접 진위를 확인해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본문엔 왜?”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나마 표국이 전멸했다는 곳에서 이곳 섬서성이 가장 가깝습니다.”
“그래서…….”
“종남파에도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쪽에서도 분명 사람이 합류할 겁니다.”
“음!”
현소 진인은 그제야 청허 진인이 친히 화산파에 오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정말 마교가 습격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당파 단독으로 확인하기엔 감당해야 할 무게가 너무 버거웠을 것이다.
현천 진인이 입을 열었다.
“본문은 무당파의 요청을 받아들여 제자들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네.”
“그런데 저는 왜?”
현소 진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문인이 결정했다면 그것을 끝이다. 화산파에는 무공이 강한 자들이 많고, 그들이라면 무당파의 행보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자신은 무공을 모르는 학도사라는 것이다. 장문인이 왜 학도사인 자신을 불렀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자네가 가 줘야겠네.”
“무슨?”
“아시다시피 마교와의 싸움은 이십 년도 전에 끝이 났네. 당금 무림에서 당시의 기억을 간직한 이는 그리 많지 않는 게 현실이지. 그들이 남긴 흔적을 봐도 마교의 무공인지 알아볼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네.”
“그래서 저보고 가라는 겁니까?”
“그렇다네. 비록 무공을 익히진 않았지만, 식견만큼은 자네가 최고가 아니던가? 아직 구별할 수 있겠지?”
“그렇……습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사부 천궁자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각인시켜 두었는데.
마교의 무공이 남긴 상처는 지금도 눈을 감고도 구별할 수 있었다.
현천 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청허 진인을 바라봤다.
“현소 사제는 본문의 학도사, 모든 것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그의 임무입니다. 현소 사제의 식견이라면 그들이 정말 마교인지 구별할 수 있을 겁니다.”
“다행이군요. 마교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화산파인지라 그들에 대해서도 가장 잘 알 거라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십니다.”
순간 현천 진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청허 진인은 아차 싶었다.
현천 진인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귀 문파의 어르신들은 잘 계신지 모르겠군요?”
“잘…… 계십니다.”
“생존해 계실 때 잘해 주십시오. 저희처럼 한꺼번에 잃고 후회하지 마시고.”
청허 진인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가 원래의 표정을 회복했다.
“장문인의 조언 꼭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쓸데없는 늙은이의 말을 고깝게 듣지 않아 주셔서.”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 본문을 위한 조언일진대.”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시면 되실 겁니다. 그때까지 파견 나갈 제자들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혹여 싸울 일이 생긴다면 저희 무당파가 앞장설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현천 진인의 시선이 이번에 현소 진인을 향했다.
“무경과 운경이 같이 갈 걸세.”
“화산파의 장문제자와 이제자입니다. 그들을 한꺼번에 보낸단 말씀이십니까? 혹여라도 그들이 잘못되면 화산파의 미래도 없습니다.”
“그래서 보내는 걸세. 화산파를 이끌어 나가려면 그만한 위험 정도는 스스로 헤쳐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으음!”
현천 진인의 단호한 대답에 현소 진인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현천 진인의 눈에 어린 단호함과 독심을 보았다. 그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현천 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게. 무당파와 종남파가 함께하는 일일세. 위험은 없을 걸세.”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산을 내려가겠습니다. 그리고…….”
현소 진인이 잠시 말을 끊고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현천 진인과 청허 진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주저하던 현소 진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번 행렬에 제 제자도 데려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