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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5화 (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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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5장. 때론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오기도 한다(3)

현소 진인과 청허 진인이 함께 취운궁을 나왔다. 제일 먼저 무경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사숙!”

“장문인께서 부르신다. 어서 들어가 보거라.”

“알겠습니다.”

무경이 대답과 함께 취운궁으로 뛰어 들어갔다.

현소 진인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가자.”

“예! 사부님.”

“저희도 함께 갈 수 있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청허 진인의 말에 현소 진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지객원에 머무시지 않고요?”

“그런 틀에 박힌 곳보다는 현소 도우님의 거처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안 되겠습니까?”

“안 될 것은 없지만…….”

“그럼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누추해도 상관이 없으시다면…….”

“감사합니다. 소하야, 너도 따라오너라.”

“예!”

연소하가 당연하다는 듯이 청허 진인의 뒤에 따라붙었다.

청허 진인이 현소 진인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제 제자입니다.”

“그러시군요. 이 아이는 제 제자입니다. 인사드리거라.”

현소 진인이 담호를 소개했다.

담호가 청허 진인에게 포권을 취했다.

“화산파의 천경입니다.”

“반갑네. 스승을 닮아서 그런지 인물이 훤하구먼.”

“어서 가시지요.”

현소 진인이 앞장섰다. 담호가 당연하다는 듯이 뒤를 따르고, 청허 진인과 연소하가 그 뒤를 따랐다.

청허 진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화산의 풍경이 참으로 수려합니다. 이렇게 좋은 풍광을 매일 보신다니 부럽습니다.”

“무당산의 풍경도 일품이라 들었습니다.”

“하하! 어디 화산만 하겠습니까? 화산의 산세가 화산파의 기상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듯합니다. 그렇지 않느냐? 연하야.”

“그렇습니다.”

연소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산의 풍경 또한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다.

일흔두 개 봉우리에는 영기가 가득하고, 산세 또한 수려해 사시사철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화산은 그와 다르다. 근육질의 거암과 하늘을 찌를 듯 날카롭게 솟아 있는 봉우리들은 수려하기보다는 장엄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칼날 같은 기상이 느껴졌다.

새로운 풍경은 새로운 감흥을 느끼게 하기 마련이었다. 이제까지 느껴 보지 못한 감흥에 연소하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득 그녀의 시선이 앞에서 걷고 있는 담호를 향했다. 발을 살짝 저는 모습이 보였다.

‘발을 저는 건가?’

그녀의 미간에 살짝 골이 패였다.

몸이 온전해도 상승의 경지에 드는 것이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곳이 무공의 세계였다. 하물며 발을 저는 자가 그런 경지에 들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제법 몸이 다부져 보였지만, 발을 저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연소하는 담호가 상승의 경지에 들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학도인의 제자이기에 상관없으려나?’

연소하의 시선이 문득 청허 진인을 향했다. 청허 진인도 담호가 발을 저는 것을 보았는지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 안타깝구나. 재능은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화산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마음에 든 현소 진인의 제자이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내색할 수 없기에 오히려 너스레를 떨었다.

“이렇게 좋은 곳에 사시니 그리 도력이 깊으신 거군요.”

“도력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현소 진인이 얼굴이 벌게져 손사래를 쳤다. 그런 현소 진인의 모습에 청허 진인의 미소가 짙어졌다.

마침내 현소 진인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청허 진인의 감탄사는 극에 달했다.

“오! 이곳입니까? 정말 멋진 풍경이군요. 이 청허, 오늘 새롭게 개안했습니다. 이런 절경이라니.”

진한 매화향과 수려한 풍경이 그의 흥취를 절로 돋웠다. 청허 진인이 연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자 화산의 장엄한 풍경이 더욱 눈에 잘 들어왔다.

“현소 도우에게 억지를 부려 따라온 보람이 있군요.”

청허 진인은 진심으로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에 현소 진인도 미소를 지었다.

학도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화산파를 겉돌았던 현소 진인이었다. 이제까지 누구도 그의 거처를 찾아와 이렇게 진심 어린 미소를 보여 준 이는 없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요기하실 만한 거라도 만들어 올 터니.”

“그러지 말고 자리에 앉으십시오, 현소 도우. 풍경도 좋고 바람도 좋은데 무슨 요기랍니까? 이거 하나면 충분하지요.”

청허 진인이 허리춤에서 꺼낸 것은 꽤 큰 호로병이었다. 호로병을 막고 있는 마개 사이로 은은히 흘러나오는 향기는 분명 주향이었다.

현소 진인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건?”

“한잔하시지요, 현소 도우.”

청허 진인이 술병을 현소 진인에게 내밀었다. 그에 현소 진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술을…….”

“술이 아닙니다. 자연을 마시는 거지요.”

청허 진인의 말은 묘한 설득력을 가지고 현소 진인의 가슴을 때렸다.

현소 진인이 슬쩍 담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담호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연 소저에게 화산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그래?”

“저와 함께 가시지요, 연 소저.”

연소하도 눈치가 있는지라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허 진인과 현소 진인을 남겨 둔 채 두 사람은 거처를 나섰다.

“하하하!”

등 뒤로 청허 진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연소하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괜히 저희 사부님 때문에…….”

“아닙니다.”

“다른 것은 다 괜찮으신데 술을 너무 좋아하셔서.”

“저에게 변명하실 것 없습니다. 사부님이 괜찮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이해해 주시니 고마워요. 사실 본문에서도 사부님 때문에 꽤 말들이 많거든요.”

청허 진인에게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그것은 술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장문인에게 여러 차례 경고도 받고 웃어른들에게 혼나기도 했지만 누구도 청허 진인이 애주 습관을 바꿔 놓지는 못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담호는 지독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그런 담호의 모습에 연소하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서 먼저 입을 열었다.

“천경 소협은 화산파에 언제 들어오셨나요?”

“육 년 전에 들어왔습니다.”

“얼마 안 되셨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입문한 후 쭉 사부님과 함께 지내 오신 건가요?”

“네!”

“외롭진 않나요? 이런 외딴 곳에서 지내려면 많이 외로우실 것 같은데.”

“사부님이 함께하셔서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사부님과의 정이 애틋하시군요.”

“…….”

담호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연소하는 많은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천경 소협과 화산파의 관계가 그리 좋은 것은 아니구나.’

외딴 곳에 따로 떨어진 거처만 봐도 알 수 있었고, 담호를 대하는 무경의 어색한 모습을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연소하는 무당이 오랜만에 받아들인 여제자였다. 그만큼 뛰어난 무재를 갖고 있었다.

그녀의 총명함은 무당파 내에서도 매우 유명했다. 그로 인해 무당파 노도사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청허 진인이 괜히 연소하를 대동한 것이 아니었다. 청허 진인은 연소하가 직접 화산을 오름으로써 견문을 넓히길 원했다. 그만큼 그녀에 대한 기대가 큰 것이다.

연소하는 담호를 따라다니며 화산 곳곳을 두 눈에 담았다. 그녀의 깊은 눈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어둠이 화산 정상에 내려앉고 있었다.

“이젠 그만 돌아가야겠네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담호가 어둑해진 산길을 걸었다.

화산의 산세는 실로 아찔해서 발을 잘못 디디면 수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할 수 있었다. 그렇게 위험한 산길을 담호는 발을 절룩이면서도 잘도 걷고 있었다.

“천경 소협.”

“예?”

“불편하지 않나요?”

주어가 빠져 있었지만 담호는 연소하가 무엇을 묻는지 알아차렸다.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연소하의 음성엔 진심이 묻어났다. 하지만 담호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모두가 그의 다리를 보면서 걱정하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 기저에 깔린 안쓰러움과 불쌍한, 혹은 경멸의 기운을 수도 없이 느껴 왔기에 이젠 감정 자체가 무뎌졌다.

연소하가 진심이라도 상관없었고, 혹은 가식으로 하는 말이라도 상관없었다. 이젠 그런 말 자체가 그에게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게 된 것이다.

담호는 앞장서 걸었고, 금방 현소 진인의 거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왔느냥?”

그를 맞아 준 이는 혀가 잔뜩 꼬인 채 얼굴이 벌게진 현소 진인이었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모르지만 그의 두 눈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사부님.”

“허허! 사부가 술을 쪼금 마셨당. 흐끅!”

딸꾹질을 하던 현소 진인이 갑자기 평상에 고개를 박고 쓰러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청허 진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얼마 안 먹였는데…….”

겨우 석 잔을 마셨을 뿐인데, 혼자서 취해 이제까지 횡설수설을 했던 현소 진인이었다.

현소 진인의 횡설수설에 가장 많이 나온 이는 바로 담호였다. 담호를 향한 현소 진인의 애정이 얼마나 큰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청허 진인이 괜히 찔리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네.”

“아닙니다.”

담호가 인사불성이 된 현소 진인을 업고는 청허 진인에게 인사를 했다.

“옆방이 비어 있으니 그곳에서 주무십시오. 이불과 베개도 있습니다.”

“필요 없다네. 이곳이 내 침상일세. 이런 절경을 눈앞에 두고 어찌 답답한 방 안에서 잔단 말인가?”

청허 진인이 앉고 있는 평상을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담호의 시선이 연소하를 향했다.

“그럼 연 소저라도 안에서 주무십시오.”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요.”

“그럼…….”

담호가 고개를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방 안으로 들어갔다.

둘만 남게 되자 청허 진인의 혈색이 싹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얼큰하게 느껴지던 취기는 바람결에 날아갔는지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의 시선이 연소하를 향했다.

“그래, 어때 보이더냐?”

“평범해 보였습니다.”

“평범하다?”

“다리를 절긴 하지만 일상생활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꽤나 냉정한 성격으로 보이지만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닙니다.”

“아직 멀었구나.”

“무슨 말씀입니까?”

연소하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그녀의 눈빛에 청허 진인이 반대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느냐?”

“예?”

영문을 모르는 연소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 키 높이에 그려진 조그만 원, 그리고 원 안에 움푹 팬 자국이 보였다. 그리고 삼 장 밖의 바닥에 새겨진 발자국.

청허 진인의 눈에는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있었던 그 어떤 광경이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 아이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남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일만련(一萬鍊)을 행하는 자를 동정하는 것이 어찌 가당키나 할까?”

“그런…….”

“역시 화산이구나. 높고도 깊어.”

청허 진인이 화산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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