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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6장. 세상 밖의 세상으로……(2)
청허 진인을 따라 화산파 무인들이 도착한 곳은 섬서성과 감숙성 경계에 있는 천양(千陽)현이었다.
성도인 서안에서 서쪽으로 사백여리 떨어져 있는 천양현은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 때문에 사시사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저곳이 집결지이네.”
청허 진인이 손가락으로 천양현에 있는 제법 큰 장원을 가리켰다. 윤가장이라는 이름의 장원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호화로워 보였다.
“무당파와 연관 있는 곳입니까?”
“윤가장의 장주가 젊었을 적 본문에 큰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는군. 그래서 본문에 꽤나 협조적이지.”
무경의 질문에 청허 진인이 담담히 대답했다.
순간 무경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섬서성은 예로부터 화산의 영역이었다. 그때는 감히 다른 문파가 섬서성에 거점을 마련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만큼 화산파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겠지?’
무경의 눈빛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때 운경이 말을 걸었다.
“사형?”
“왜 그러는가?”
무경이 언제 심각해졌냐 싶게 활짝 웃었다. 그런 무경의 모습에 운경이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혹여 무경이 분을 참지 못할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런 운경의 마음을 알아차린 무경이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난 괜찮아.”
“안심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웃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야. 걱정하지 마.”
그들은 청허 진인을 따라 윤가장으로 들어갔다. 윤가장 중앙에 있는 널찍한 공터에는 백여 명의 인원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 일부가 청허 진인을 발견하고 급히 다가왔다.
중년의 배불뚝이 도사가 청허 진인에게 포권을 취했다.
“사형.”
“청광 사제.”
청허 진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도사답지 않은 배가 불룩 튀어나온 중년의 도사는 그의 사제인 청광 진인이었다. 비록 청허 진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 역시 매우 뛰어난 무인이었다.
청허 진인이 화산파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올라갔던 것처럼 청광 진인은 종남파에 올라갔었다.
청광 진인의 곁으로 두 사람이 다가왔다. 이제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장년의 무인과 아직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공통점이라면 두 사람의 눈빛이 매우 강렬하다는 것이다.
청광 진인이 두 사람을 청허 진인에게 소개했다.
“인사하시지요, 두 분. 이분은 저희 무당파의 최고수이자 호북제일검이라 불리시는 청허 사형이십니다. 청허 사형, 이분들은 종남파에서 나오신 종남진검(終南眞劍) 염중화 대협과 그분의 제자이신 금한수 소협입니다.”
청광 진인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청허 진인이 포권을 취했다.
“반갑습니다, 염 대협, 금 소협 빈도는 무당의 청허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청허 진인. 불초 염중화라고 합니다.”
“종남의 금한수입니다. 무당제일검이신 청허 진인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염중화와 금한수가 정중히 인사를 했다.
이번에는 청허 진인이 화산파의 무인들을 소개했다.
“이분들은 화산파에서 나오신 현소 진인과 무경 소협이라오.”
“화산의 현소입니다.”
“무경이 인사를 드립니다.”
두 사람이 포권을 취했다.
순간 염중화와 금한수의 눈이 빛났다.
화산파와 종남파는 같은 섬서성에 터전을 두고 있었다.
화산파가 성하면 종남파가 쇠하고, 반대로 종남파가 성하면 화산파가 쇠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두 문파는 예전부터 그리 교류가 많지 않았다.
“이거 이웃을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반갑습니다, 현소 진인.”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장도에 짐이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염 대협.”
염중화와 현소 진인이 먼저 인사를 나눴고 다음은 무경과 금한수 차례였다.
“화산파의 무경이오. 반갑소!”
“종남파의 금한수요. 잘 부탁드리겠소.”
아직은 젊은 사람들답게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자가 화산의 대제자.’
‘종남파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천고의 기재라.’
두 사람은 서로의 비상함을 눈치챘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무인들. 더군다나 화산과 종남 모두 섬서성에 적을 둔 이상 계속해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엔 경계심과 호기심이 공존하고 있었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윤가장에 모인 화산파와 종남파의 무인들 모두 서로를 경계심과 호기심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청허 진인이 앞으로 나섰다.
“젊은 사람들은 놔두고 우리들은 안에 들어가서 앞으로의 일정이나 의논합시다.”
현소 진인과 염중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의 흔적을 찾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한가하게 기 싸움을 할 시간이 없었다.
문파의 어른들이 안으로 들어가고 젊은 무인들만이 남았다.
무경이 침묵을 깨고 금한수에게 말했다.
“술 한잔 어떻소? 금 소협.”
“좋소이다!”
금한수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무경이 손짓을 하자 운경을 비롯해 화산파의 기재들 몇 명이 다가왔다. 금한수 역시 손짓으로 종남파의 기재들을 불렀다.
어차피 함께하게 된 자리였다. 이번 기회에 서로 안면을 트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화산파와 종남파 무인들의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담호는 초대받지 못했다. 운경이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담호가 조용히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 연소하가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뭐가 말입니까?”
“저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것.”
“전혀!”
담호의 단호한 말에 연소하가 미소를 지었다. 담호라면 그렇게 대답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당파의 제자들도 간단하게 술자리를 할 생각인데 혹시 참석할 의향 있나요?”
담호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연소하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번 대답 역시 예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럼…….”
연소하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담호를 스쳐 지나갔다.
담호가 주위를 돌아봤다.
남은 제자들은 윤가장 사람들에 의해 거처를 배정받았다. 그들이 안내된 곳은 커다란 마당을 둘러싼 구조의 건물이었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각자 다른 방에 안내되었지만 언제든 서로를 볼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담호에게도 조그만 방이 주어졌다. 하지만 담호는 방에서 쉬지 않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현소 진인에게는 잠시 밖에 다녀오겠다고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
생전 처음 천양현에 온 담호였다. 하지만 그의 눈에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담호가 나오자 윤가장의 정문을 지키던 무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왜 나오시오?”
“잠시 밖에 나갔다 오렵니다. 혹시 말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말?”
“안 되겠습니까?”
담호의 질문에 무사가 잠시 생각하다가 답을 주었다.
“장주께서 뭐든지 협력하라고 했으니 빌려주는 것은 어렵지 않소이다. 허나 오늘 밤까지는 반납해야 하오. 괜찮겠소?”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허면 잠시 기다리시오.”
무사가 근처에 있던 하인에게 말해 말을 가져오게 했다. 흰색 털이 윤기가 흐르는 녀석이었다.
“제법 좋은 말이니 조심스럽게 다뤄 주시오.”
“감사합니다.”
담호는 무사에게 인사를 한 후 말을 끌고 윤가장을 나섰다. 그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남쪽으로 커다란 산이 보였다.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워낙 높기에 이곳에서 선명히 보였다.
담호는 산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태백산.’
담호는 태백산이 있는 방향으로 말을 달렸다.
생전 처음 타는 말이었지만 담호의 눈엔 두려움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남쪽으로, 또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그렇게 한 시진을 말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이름 모를 산길이었다. 사방이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곳. 무릎까지 자란 풀 때문에 길조차 희미해진 그런 곳이었다.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는 말에서 내려 풀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아비를 따라 몇 번이나 오갔던 기억이 있던 곳이다. 그때도 높은 태백산을 보며 방향을 잡았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담호의 눈앞에 제법 너른 분지가 나타났다.
수풀과 잡목이 우거져서 발 디딜 곳 하나 없어 보이는 분지를 바라보는 담호의 눈빛이 더욱 깊이 침잠됐다.
“아버지, 어머니, 가령아.”
그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져 나왔다.
지금은 잡목과 풀이 우거져 있는 폐허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이곳에도 사람이 살았었다.
담호의 꽉 쥔 주먹 위로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이곳은 그의 고향이었다.
서른 가구 백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던 곳.
어미는 밭을 일구고, 아비는 약초를 캤다. 부모가 돌아오는 저녁까지 담호는 어린 동생을 돌보며 지냈다.
비록 고단한 일상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억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의 기억은 육 년 전에 끝이 났다.
담호가 수풀이 우거진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콰드득!
담호의 양손이 바닥을 긁었다. 흙과 풀이 그의 양손 가득 잡혔다. 손가락이 찢겨지고 터져 피가 흘렀지만 담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어깨에 잔경련이 일었다. 하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의 눈물은 이미 육 년 전에 말랐다.
눈앞에서 아비, 어미가 처참히 죽는 모습을 본 순간 말이다.
왜 그들이 죽어야 했는지 지금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도적들은 마치 역병처럼 다가왔고, 마을에서 생기를 앗아가 버렸다.
담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가래가 끓는지 그의 목소리는 탁하게 갈라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난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당신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왜 그렇게 목숨을 잃어야 했는지……. 그냥 힘이 없어서 죽은 거라면……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이 세상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바람을 타고 담호의 넋두리가 울려 퍼졌다.
백여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한 명 나서서 이 사태의 원인을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담호를 구해 준 화산파에서도 말이다.
그들은 단순히 도적들이 습격해서 약탈했을 거라고 짐작할 뿐, 그 어떤 대처도 하지 않았다.
담호에겐 온 세상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이 그들에겐 그저 타인의 안타까운 불행에 불과했다.
그때 담호는 깨달았다.
아무리 가까운 척 살갑게 다가오더라도 결국은 타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예외가 있다면 오직 현소 진인뿐이다.
오직 그만이 담호의 처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함께 해결 방법을 찾으려 했을 뿐이다.
담호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하지만 끝내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담호는 한동안 석상처럼 미동도 없었다. 그가 몸을 일으킨 것은 거의 반 시진이 지난 후였다.
“나는 결코 당신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결코 당신들을 잊지 못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