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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7장. 넘어진 곳에서 일어서다(1)
청허 진인이 향한 곳은 풍진객잔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인적이 없는 곳에 이르자 청허 진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 무당의 청허일세. 이미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네. 어서 나오시게.”
“…….”
“임 표두.”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청허 진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십여 장 밖의 땅이 들썩였다.
청허 진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 순간 땅 거죽이 일어나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임 표두?”
“죄송합니다, 진인. 혹시 추적자가 따라붙었는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바닥으로 위장했던 천을 던지며 입을 여는 남자는 북로표국의 표두인 임호령이었다.
임호령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왼쪽 팔은 잘렸는지 보이지 않았고, 전신에는 오래된 흉터가 가득했다. 먼지가 가득 쌓인 옷은 걸레쪽처럼 헤져 있었다.
“괜찮은가? 임 표두.”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표국의 식구들은…….”
임호령의 뺨을 따라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만을 남겨두고 북로표국의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 대표두 막굉이 필사적으로 적의 시선을 끌지 않았다면 그 역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적들이 방심을 한 틈을 타서 모래 구덩이 속에 숨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는 데 급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임호령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그토록 살아남고자 한 것은 동료들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였다.
청허 진인이 그를 위로했다.
“자네라도 살아남아서 다행일세.”
“진인. 크흑!”
임호령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청허 진인은 잠자코 임호령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어떤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진정한 임호령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괜찮다면 그간의 사정을 듣고 싶네.”
“놈들의 근거지까지 추적했습니다.”
“정말인가?”
“이 목숨을 걸었습니다.”
임호령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의 두 눈은 온통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습격자들은 북로표국의 짐을 가지고 북쪽으로 사라졌다. 그냥 그대로 도주할 수도 있었지만 임호령은 습격자들을 은밀히 추적했다.
적들의 정체를 알아내서 응징하는 것만이 죽은 북로표국 식구들의 원한을 갚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호령은 목숨을 걸고 이틀이나 그들을 추적했고, 결국 그들의 목적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정말 그들이 마교의 잔당인 것은 확실한가?”
“그들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놈들은 분명 ‘본교’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제가 알기론 강호에서 그런 단어를 사용하는 곳은 마교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놈들은 성화를 연상시키는 문양이 새겨진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으음!”
청허 진인이 침음성을 흘렸다.
아직은 확실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마교를 연상시키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온 발걸음이 헛되지 않았다.
“고생했네.”
청허 진인이 임호령의 등을 토닥였다.
임호령의 등에 잔경련이 일었다.
몸에 묻은 동료들의 피 냄새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곁을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기 전에 이 냄새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청허 진인의 눈가에 잔경련이 일었다.
‘부디 마교가 아니길…….’
임호령의 착각이길 빌었다.
모두가 잠든 시각 현소 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담호는 운공을 하고 있었다. 이제 운양단을 복용하지 않아도 중천심결을 운공하는 데 별문제가 없었다.
담호의 중천심결은 벌써 오 성의 성취를 보이고 있었다. 운양단의 도움과 담호의 피나는 노력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담호는 단 하루도 운공을 쉬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잡담이나 술로 시간을 보낼 때도 그는 운공을 했다. 그 덕에 이젠 중천심결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현소 진인이 중얼거렸다.
“중천심결은 든든한 초석이다. 화산파의 심공이 중천심결을 토대로 발전했듯이, 중천심결이 깊어지면 너만의 심공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제자의 성취를 지켜보는 것은 현소 진인에게 큰 기쁨이었다.
그때 담호가 운공을 끝냈는지 눈을 떴다.
“사부님.”
“오, 그래! 운공을 끝냈느냐?”
“예!”
“수고했다.”
담호가 가부좌를 풀고 일어났다.
화산을 떠난 후 거의 쉬지 않고 이곳까지 말을 달려왔지만, 담호의 얼굴에 피로의 빛 따윈 보이지 않았다. 중천심결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반대로 현소 진인의 얼굴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사부님.”
“아니다.”
“사부님.”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생각할 것이 많아서 그런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거라.”
“예!”
“녀석!”
현소 진인이 애써 미소를 지을 때였다.
“사숙!”
밖에서 무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현소 진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무경과 운경이 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청허 진인께서 급히 출진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청허 진인이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다.
“급한 일이라 하셨습니다.”
“급한 일?”
현소 진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현 시점에서 급한 일이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마교.’
현소 진인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담호에게 말했다.
“어서 준비하고 따라 오거라.”
“예!”
현소 진인과 무경이 밖으로 먼저 달려 나갔다.
담호가 현소 진인의 짐을 챙기는 모습을 지켜보던 운경이 입을 열었다.
“너는 가지 않는 게 어떻겠느냐?”
“예?”
“정말 저들이 마교라면 누구도 너를 도와줄 여유가 없을 것이다.”
“사형.”
“모두에게 짐이 되느니 너 스스로 이곳에 남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운경의 눈빛은 차가웠다. 너무 차가워서 몸서리가 처질 정도였다. 하지만 담호의 눈동자를 흔들기엔 부족했다.
“어째서 제가 짐이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이냐?”
“사형이 뭐라고 하시든 전 갈 겁니다.”
“천경!”
“사부님만 혼자 그 위험한 곳에 가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담호가 이렇게 나오자 운경도 더 할 말이 없었다.
“난 분명히 경고했다.”
“분명히 들었습니다.”
“고집불통 같으니라구.”
운경이 고개를 저으며 뒤돌아섰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던 운경이 문득 뒤돌아봤다.
“그래도…… 부디 조심하거라.”
그는 담호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담호는 잠시 운경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담호는 이내 짐을 꾸려 밖으로 나왔다.
풍진객잔 앞에는 이미 각파의 젊은 고수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말을 탄 채 대기를 하고 있는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의 빛이 어려 있었다.
잠시 후 청허 진인과 현소 진인, 그리고 종남파의 염중화가 나왔다. 그들의 곁에는 한쪽 팔이 잘린 임호령이 있었다.
청허 진인이 젊은 무인들에게 말했다.
“시간이 없어 이 시간에 여러분들을 급히 소집하게 되었네. 지금부터 우리는 옥문관을 벗어나 바로 신강으로 향할 것이네. 모두 각자의 안전에 각별히 신경 쓰고, 뒤쳐지지 않도록 주의하게. 그럼 출발하겠네.”
청허 진인이 먼저 말에 올라타 출발했다. 그 뒤를 연소하를 비롯해 무당파의 제자들이 따랐다.
“우리도 출발한다.”
염중화가 종남파의 제자들을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맨 마지막으로 움직인 이는 화산파의 제자들이었다.
무경이 말을 달리는 현소 진인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사숙.”
“왜 그러느냐?”
“사숙은 저들이 정말 마교의 무인들이라는 것만 확인해 주고 물러나십시오.”
“허나…….”
“사부께서 그러셨습니다. 싸움은 무당파에게 맡기고 사숙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고. 그러니까 혹여 싸움이 벌어진다면 사숙께서는 망설이지 마시고 빠져 주십시오.”
“알겠다.”
결국 현소 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위나 나이로 보면 그가 가장 연장자였지만, 화산파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바로 무경이었다. 현소 진인은 그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정말 마교일까?’
청허 진인은 현소 진인과 염중화에게도 임호령을 만나게 했다. 임호령은 나포박호 인근에서 벌어졌던 싸움을 이야기했다.
임호령의 설명은 무척이나 자세해서 마치 눈앞에서 싸움을 지켜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임호령의 묘사에 나오는 적들의 무공은 청허 진인이 알고 있는 마교의 무공과 거의 일치했다.
특히 습격자들의 우두머리가 펼친 도법은 마교에서도 가장 유명한 절학 중 하나인 만황구절도(滿荒九絶刀)와 유사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입고 있던 옷에 새겨져 있던 불꽃 문양은 마교의 상징인 성화를 떠올리게 했다.
현소 진인의 낯빛이 절로 어두워졌다.
이십 년 전에 그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던가? 수많은 이들의 죽음으로 겨우 되찾은 강호의 평화였다.
만일 그들이 정말 마교의 잔재라면 강호는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할지도 몰랐다.
‘무량수불! 부디 마교가 아니길…….’
현소 진인은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저 멀리 옥문관이 보였다.
옥문관을 지키는 병사들이 보였다. 이미 이야기가 되었는지 병사들이 옥문관을 열었다.
피처럼 붉은 황야가 그들 앞에 펼쳐졌다.
***
남자의 방은 무척이나 컸다. 큰 방에는 수많은 서가들이 줄지어 있었고, 서가에는 수많은 서책들이 꽂혀 있었다.
남자의 책상은 서가 한가운데 존재했다. 언제든 손만 뻗으면 서책을 꺼낼 수 있는 그곳에.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무척이나 청수해 보였다. 남자답지 않게 새하얀 피부와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남자가 한참 서책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원주님.”
아무도 없는 빈 공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주라고 불린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예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뇌공입니다.”
“무슨 일이냐?”
“꼬리가 붙었습니다.”
“꼬리?”
“아무래도 전에 먹었던 음식이 탈이 난 모양입니다. 북로표국에 생존자가 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종 대주가 잘 처리했다고 하지 않았더냐?”
“죄송합니다.”
뇌공의 대답에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에서 꼬리를 붙었느냐?”
“확인된 바로는 무당과 화산, 종남입니다.”
순간 남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가 보고 있던 서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대문파 중 세 곳에서 붙었다는 것은 곧 구대문파 전체가 움직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구대문파가 움직이면 오대세가도 움직이고, 곧 천하 전체가 움직인다.
“아직은 천하를 상대할 힘이 모자라.”
“어떻게 할까요?”
“이곳을 버린다.”
“예? 하지만 그렇게 쉽게 천금마옥(天禁魔獄)을 포기한단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어. 단지 시기가 앞당겨졌을 뿐.”
“알겠습니다.”
“교주님께는 내가 보고를 드리겠다. 시작하도록.”
“존명!”
뇌공의 기척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남자가 중얼거렸다.
“천금마옥을 포기하더라도 선물은 안겨 줘야겠지.”
남자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