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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7장. 넘어진 곳에서 일어서다(2)
“여깁니다.”
임호령이 일행들을 이끌고 온 곳은 나포박호에서 닷새 거리에 있는 황량한 골짜기였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한 골짜기에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청허 진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이 적들의 근거지가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으음!”
임호령의 단호한 대답에 청허 진인이 침음성을 흘렸다.
사람이 사는 곳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사람이 사는 흔적과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호령이 잘못 알았거나, 그만큼 적들이 흔적을 철저히 지운 거겠지.’
청허 진인은 후자라고 생각했다.
독기가 가득한 임호령이었다. 그런 임호령이 자신들을 잘못 안내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적들이 이곳으로 북로상단의 물건들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럼 적들의 근거지는 골짜기 안쪽 깊숙한 곳에 있겠군.”
“확실합니다.”
“알겠네!”
청허 진인이 무당파 제자들을 돌아봤다.
“모두 들었겠지? 이곳에 마교의 잔당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모두 각별히 주의하거라.”
“예!”
무당파 제자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염중화도 종남파 제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도 무당파를 돕는다. 한수는 책임지고 제자들을 보호하라.”
“알겠습니다.”
무경도 화산파 제자들에게 각별히 조심할 것을 명령했다.
무당파를 필두로 종남파, 화산파의 제자들이 이름 없는 골짜기로 진입했다.
골짜기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분위기는 더욱 음산해졌다. 빛이 거의 들지 않아 마치 밤처럼 어두워보였다.
그때 무당파의 제자 중 한 명이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깁니다. 마차 바퀴 흔적이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바닥에는 바퀴가 지나간 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이로써 임호령의 말이 확실해졌다. 이 안에 북로표국을 습격한 자들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
몇몇 젊은 무인들의 얼굴에 흥분의 빛이 어렸다. 그들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마교라니. 이거 정말 흥분되는군.”
“여기에서 공을 세우면 강호에 이름을 알릴 수 있을 거야.”
“마교의 주구 따윈 내가 단 일 검으로 베어버리지. 하하!”
무당파는 물론이고, 종남파와 화산파의 젊은 무인들도 잔뜩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속삭임을 들은 현소 진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마교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이라 그런지 크게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마교를 경험한 세대들은 그들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잘 알고 있었지만,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마교의 무서움을 실감하지 못했다.
‘부디 객기를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현소 진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담호를 찾았다. 혹시 담호도 그들처럼 들떠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담호의 얼굴을 본 순간 현소 진인은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담호의 눈빛은 깊인 침잠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 어디서도 흥분한 기색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행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도 현소 진인에게서 두 걸음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화산파의 이대제자 한 명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사숙, 어지간하면 앞으로 나서지 말고 뒤로 쳐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슨 뜻이지?”
“사숙께서 앞에서 거치적거리시면 저희가 적들을 상대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정중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까지 정중하지는 않았다.
담호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거라. 네가 감히 사문의 존장을 능욕하는 것이냐?”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운경이었다.
그에 이대제자 원호가 움찔하며 사색이 되었다.
“제, 제자가 어찌…….”
“뒤로 빠지거라.”
“예!”
원호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빠졌다. 그런 원호를 운경이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원호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자 운경이 담호를 바라봤다.
“보았느냐? 이게 화산파에서 너의 위치다. 저들에게 더 이상 우습게 보이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담호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운경이 담호를 스쳐 지나가 무경의 옆에 섰다. 그러자 무경이 혀를 찼다.
“너는 너무 냉정해서 문제라니까.”
무경이 슬쩍 담호를 바라봤다.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담호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여서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실제로 담호는 원호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골짜기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이상하리만치 신경이 예리하게 곤두섰기 때문이다. 덩달아 담호의 기분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건?’
담호의 얼굴에 의혹이 떠오르는 그 순간이었다.
쉬쉬쉭!
갑자기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큭!”
“습격이다.”
장내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사이 몇 명의 무인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들의 몸에는 암기가 박혀 있었다.
“모두 침착하라.”
청허 진인과 염중화가 앞으로 나서 암기를 쳐내며 소리쳤다. 그들이 나서자 동요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웬 놈들이냐?”
청허 진인이 제자들을 막아선 채 소리쳤다. 그러자 골짜기 곳곳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 문양이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다.
청허 진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말 마교인가?”
“…….”
하지만 습격자들은 대답하지 않고 일제히 무기를 빼 들었다.
임호령이 그들을 보며 소리쳤다.
“저들입니다. 저들이 북로표국을 습격해서 표물을 갈취했습니다.”
임호령은 어느새 무기를 빼 들고 습격자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에 청허 진인이 외쳤다.
“놈들을 제압하라.”
“와아아!”
무당의 무인들이 그 뒤를 따르고, 화산과 종남의 무인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현소 진인이 눈을 감았다.
“정말 마교인가? 원시천존이시여…….”
담호가 전장을 바라봤다.
그의 눈앞에서 무당파, 화산파, 종남파의 무인들이 마교의 잔당으로 추측되는 무인들과 싸우고 있었다.
청허 진인의 검술은 실로 신묘했다.
쉬악!
그의 검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누군가 반드시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무당파의 무인들은 청허 진인을 따라 용맹하게 싸웠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이는 바로 연소하였다.
그녀는 현란한 보법을 펼치며 무당검을 펼쳤다.
카카캉!
검과 검이 부딪치며 사방으로 불똥이 튀었다.
강렬한 충격에 연소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청허 진인의 가르침 아래 착실히 성장한 연소하였지만, 실전을 겪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쉬익!
상대의 어깨에서 피가 치솟아 올랐다.
나무는 많이 베었지만, 사람을 베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섬뜩한 느낌에 가슴이 다 울렁거렸지만 연소하는 애써 참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연소하는 사력을 다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자극을 받았는지 무당파의 무인들도 최선을 다했다.
“이놈들! 정체를 밝혀라.”
염중화가 종남파의 절기인 천하검(天河劍)을 펼치며 상대를 압박했다. 그의 검엔 지독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츄화학!
그의 검에 습격자 중 한 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상체와 하체가 양단되어 쓰러졌다.
지독한 살의가 담긴 그의 검술에 같은 편인 무당파와 화산파의 무인들마저 숨을 죽였을 정도였다.
‘저것이 종남의 검.’
담호는 염중화의 검을 눈에 담았다.
한편 무경과 운경이 이끄는 화산파의 무인들도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곱 명씩 짝을 이뤄 칠성검진(七星劍陣)을 펼치고 있었다.
“모두 진을 유지하라.”
운경이 그들을 진두지휘했다.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는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문파들보다 젊은 무인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흥분하면 칠성검진을 펼치는 제자들도 흥분을 한다. 그렇기에 운경은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냉철한 판단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운경이 칠성검진을 지휘하는 동안 무경은 습격자를 상대로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그는 화산파의 장문제자답게 강력한 무위를 자랑했다. 최소 장로급 이상이 되어야만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는 태청검법(太淸劍法)이 그의 손에 의해 빛을 발했다.
쉬악!
무경은 화산파가 아직 살아 있음을 이번 기회를 통해 보여 주고 있었다.
푸확!
상대의 피가 무경의 얼굴에 튀었다.
무경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화산파의 장문제자인 이상 언젠간 누군가를 벨 거라고 각오했지만, 그 느낌이 이렇게 진저리처질 정도로 섬뜩할 줄은 몰랐다.
무경이 이를 악물었다.
‘원시천존이시여. 이 제자의 살행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이 강호의 평화를 위해 하는 것일지니.’
모두가 화산을 위한 일이었다.
이번 강호행이 끝나면 화산파의 제자들은 한층 더 강해질 것이다.
모두가 악귀가 되어 날뛰고 있는 한가데 현소 진인과 담호가 있었다.
두 사람은 열외의 전력이었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고, 그래서 두 사람을 가운데 두고 보호했다. 원호를 포함한 이대제자들이 바로 그 역할을 맡았다.
‘이, 이것이 진짜 강호의 싸움?’
원호와 이대제자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화산파 무인으로 가졌던 자부심과, 고련했던 무공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치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에 정신이 다 아찔해졌다.
“아악!”
“살려 줘!”
사람들의 비명이 그들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울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그저 슬플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다.
습격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다른 습격자와는 무언가 달라 보였다.
훨씬 더 왜소하면서도 차가운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복면을 쓴 습격자가 현소 진인과 화산파 제자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왔다.
탁, 탁!
단 두어 번의 도약만으로 습격자는 순식간에 화산파 제자들의 지척까지 도달했다.
“마, 막아!”
원호가 소리쳤다.
화산파 제자들이 칠성검진을 펼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습격자가 더 빨랐다.
파바바방!
그의 손이 마치 수십 개로 분열한 듯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크윽!”
“컥!”
칠성검진이 순식간에 붕괴되고 이대제자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어느새 상대는 원호의 코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쉬익!
그의 손이 독사처럼 원호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원호는 검을 펼쳐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쾅!
굉음이 터져 나오고 원호의 몸이 들썩였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원호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 사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