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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7장. 넘어진 곳에서 일어서다(3)
담호의 옷이 펄럭이고 있었다.
전신을 관통하는 강렬한 충격에 담호의 두 발이 바닥에 깊은 고랑을 남기며 한참이나 밀려났다.
주르륵!
담호는 중천심결을 운용해 버텼다. 바위처럼 무거운 기운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나서야 담호의 몸이 멈췄다.
그제야 풍압으로 잠시 일그러졌던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손바닥에 통증이 느껴졌다.
“사, 사숙?”
놀란 원호의 외침이 들렸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온통 복면을 쓴 습격자에게 쏠려 있었다.
뚫린 구멍 사이로 보이는 두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설마 자신의 일격이 막힐 줄은 몰랐던 듯한 기색이었다.
“감히!”
복면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옥처럼 고왔다.
‘여자?’
그 순간 습격자가 다시 공격을 해 왔다.
쉬쉬쉭!
순간적으로 그녀의 손이 다시 수십여 개로 늘어났다.
“조심해라, 호야. 마교의 암천열화수(暗天熱火手)다.”
등 뒤에서 현소 진인의 처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이십 년이나 지났지만 현소 진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수많은 화산파의 무인들이 암천열화수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정말 마교가 맞구나.’
현소 진인의 몸에 잔경련이 일었다.
퍼버벙!
장(掌)을 휘두르는데 폭음이 터져 나왔다. 암천열화수를 펼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현소 진인이 움찔했다. 암천열화수에 담호의 몸이 찢겨져 나가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왼발을 발목까지 대지에 깊이 박은 채 서 있는 그의 모습은 굳건한 거목을 연상케 했다.
원호와 이대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어떻게?”
놀라움도 잠시, 이내 의문이 들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담호는 절름발이였다. 그 때문에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 화산파 내에서도 버림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현소 진인의 제자가 아니었다면 인간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화산파 내에서 담호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그런데 지금 담호가 보이는 모습은 그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 편견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투두둥!
담호는 두 손으로 상대의 암천열화수를 튕겨 내고, 흘리고, 맞받아치고 있었다.
“설마…… 죽엽수?”
원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화산파의 속가제자 이상이라면 누구나 익히는 죽엽수다. 원호도 수박 겉핥기나마 죽엽수를 익혔기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죽엽수는 마교의 절학을 상대할 만큼 위력적이지 않았다.
원호와 이대제자들이 입을 떡 벌렸다.
“사숙은 이제까지 실력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타다다닥!
담호의 손과 습격자의 손이 격렬하게 얽혔다.
담호의 입가를 타고 선혈이 흘러내렸다. 원호의 짐작대로 그가 펼치는 무공은 죽엽수였다.
하지만 죽엽수로 마교에서도 손꼽히는 절학인 암천열화수를 상대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한 번씩 손을 부딪칠 때마다 담호의 내장이 진탕되었다. 내장을 울리는 충격에 담호는 내상을 입고 있었다.
그래도 담호가 물러나지 않는 것은 바로 등 뒤에 사부 현소 진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뚫리면 현소 진인까지 목숨이 위험했다.
‘사부님!’
“흠!”
상대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제야 담호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사숙!”
원호와 이대제자들이 다가오려는 것을 담호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들은 아직 상대의 강함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직접 손속을 겨뤄 본 담호는 알고 있었다.
상대의 진짜 실력은 겨우 이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저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데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사부님을 모시고 뒤로 물러나라.”
“하지만…….”
원호가 망설이자 담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화산파의 일대제자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리는 명령이다. 이곳을 빠져나가라.”
원호와 이대제자들이 움찔했다.
불주견(不走犬), 달릴 수 없는 개라는 별명으로 화산파 제자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던 담호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담호가 보여 주는 위압감과 박력은 그들의 숨을 턱 막히게 할 정도로 엄청났다.
“사숙!”
“안 된다, 호야. 나는 절대 너를 두고 가지 않을 것이다.”
현소 진인의 목소리가 협곡에 울려 퍼졌다.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은 절대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조금만 버텨라. 그럼 다른 제자들이 도와줄 것이다.”
현소 진인의 절규 어린 목소리에 담호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전황은 백중지세였다. 누구 한 명 이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청허 진인도, 무경도…….
현소 진인을 지키는 것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금방 따라갈게요. 그러니까 먼저 나가 있으세요.”
“호야.”
“약속할게요.”
“분명히 약속했다?”
“예!”
“그럼 가겠다. 넌 결코 약속을 어기는 아이가 아니니까.”
현소 진인이 힘없이 몸을 돌렸다. 그를 호위하면서 이대제자들이 계곡을 빠져나갔다.
현소 진인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담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호야!’
괜히 눈물이 차올랐다.
복면인이 그들을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순간 담호가 옆으로 한 걸음 옮겼다.
움찔!
복면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담호는 분명 온통 허점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를 메우고도 남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자신의 뜻을 굳건히 한 자에게서만 느껴지는 불굴의 의지가 담호에게서도 느껴지고 있었다.
“휴!”
복면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계곡 곳곳에서 피가 흐르고, 죽음이 내려앉고 있었다.
문득 그가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가려져 있던 진면목이 드러났다.
순간 담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복면 안에 감춰져 있던 것은 뜻밖에도 매우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삼단같이 검은 머릿결과 대조되는 유난히도 하얀 얼굴, 그리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얼음보다 차갑게 느껴지는 눈동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화산의 제자인가요?”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악연이군요.”
“마교인가?”
“세인들은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저희 스스로는 신교라 부릅니다.”
“신교?”
“훨씬 듣기 좋은 이름이죠.”
“신교가 이곳에서 뭘 하는 거지?”
“이곳의 이름은 천금마옥, 신교의 죄인들을 가두는 거대한 뇌옥이 이 계곡의 끝에 존재한답니다. 그곳이 우리의 거처예요.”
“천금마옥?”
“지상에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기에 택한 최후의 은신처랍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에게 발각되었군요.”
담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만큼 소녀의 눈빛은 차가워졌다.
중원과의 전쟁에서 피한 후 마교는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힘을 길렀다. 그러다가 물자가 모자라면 인근을 지나는 상단들을 습격해 약탈했다. 그렇게 이십 년을 살아왔다.
“중원에 복수를 꿈꾸는 건가?”
“그런 사람도 있지요.”
“아닌 사람도 있다는 걸로 들리는군.”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소녀가 담호를 향해 기수식을 취했다. 그녀의 전신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당신의 이름은요?”
“왜?”
“당신은 내가 죽이는 최초의 사람이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이름이라도 기억해 두어야죠.”
“고맙군! 담호, 내 이름은 담호다.”
“잊지 않겠어요, 담호. 내 이름은 음유경이에요.”
팟!
순간 스스로를 음유경이라 밝힌 소녀가 담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가 암천열화수의 마지막 초식인 백련표설(白蓮漂雪)을 펼쳤다.
허공이 온통 그녀의 수영(手影)으로 가득 찼다.
동시에 담호의 몸이 튀어 나갔다.
성문을 향해 돌격하는 충차와 같은 보법, 충보였다.
쾅!
바닥에 깊은 족적이 파이고, 담호의 몸이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왼발의 장애는 더 이상 담호에게 걸림돌이 아니었다.
중천심결로 모은 내기가 오른쪽 주먹에 집약되었다.
쐐애액!
충보에 이은 파성추였다.
그의 모든 것이 이 일격에 담겨 있었다.
콰앙!
파성추와 백련표설이 격돌했다.
“크헉!”
순간 피분수를 뿜으며 누군가 뒤로 날아갔다.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을 나뒹구는 이는 바로 담호였다.
마치 비수로 난자당한 것처럼 전신에 수많은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었다.
담호가 버둥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려 애를 썼다. 그런 상처를 입고도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음유경의 표정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왼쪽 어깨로 향했다. 어깨가 퉁퉁 분 채 덜렁거리고 있었다. 담호의 일격에 탈골된 것이다.
음유경의 목 뒤로 소름이 올라왔다.
‘만일 그의 일격에 담긴 힘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나의 팔은 어깨에서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내장이 진탕되었다. 내상의 전조였다. 아니, 벌써 내상을 입었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음유경의 눈빛이 깊어졌다.
담호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을 전율케 한 남자였다. 그런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 슬퍼졌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벌써 죽은 사람 취급하지 마. 난 아직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담호가 피 섞인 가래침을 뱉으며 음유경을 노려봤다. 비록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담호의 눈빛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제 몸 하나 움직이기 힘든 상처를 입었지만, 담호의 정신력은 겨우 이 정도로 꺾일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쿠르르!
갑자기 계곡 전체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진동을 일으켰다.
음유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시작되었군요.”
“시작?”
휘릭!
담호가 의혹 어린 표정을 지을 때 갑자기 기다란 줄이 날아와 음유경의 허리를 낚아챘다.
음유경은 마치 낚시에 걸린 고기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라 순식간에 사라졌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담호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콰아앙!
그 직후 계곡 한쪽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청허 진인의 안색이 싹 변했다.
“벽력탄?”
“흐흐! 우리 모두 이곳에서 죽는 거다. 말코!”
청허 진인의 상대가 음소를 흘렸다.
그의 눈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설마 동귀어진?”
“어차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있을 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두 함께 죽는 수밖에. 억겁의 성화여. 우리를 굽어살펴 주소서. 이 몸을 불태워 당신의 곁으로 가리니.”
“억겁의 성화여. 우리를 굽어살펴 주소서.”
정파의 무인들과 싸우던 마교의 무인들이 우두머리를 따라 일제히 주문을 읊조렸다.
죽음을 도외시한 그들의 모습에 청허 진인이 사자후를 토해 냈다.
“놈들은 동귀어진하려고 한다. 어서 빨리 계곡 밖으로 빠져나가라.”
정파의 무인들이 기겁해 일제히 경공을 펼쳤다.
무당파의 무인들은 제운종을, 종남파의 무인들은 부운보(浮雲步)를 펼쳤다.
무경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제자들에게 외쳤다.
“모두 경공을 펼쳐 이곳을 빠져 나가라.”
“우와악!”
화산파 제자들이 경공을 전력으로 펼쳤고, 무경과 운경이 그 뒤를 따랐다.
“아!”
순간 무경이 잠시 경공을 멈췄다.
“왜?”
무경의 시선을 따라가던 운경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계곡 양쪽에서 엄청난 양의 토사와 바위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 담호가 서 있었다.
담호는 거친 숨을 몰아 쉴 뿐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음유경과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 때문이었다.
운경이 외쳤다.
“천경을 구해야 합니다.”
“늦었어.”
무경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사형?”
“천경을 구하려 했다가는 우리도 죽는다. 그를 포기해야 해.”
“천경도 우리 사제입니다. 그리고 사형은 우리의 대사형입니다. 절대 그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운경이 무경을 노려봤다. 하지만 무경은 단호했다.
“내게 화산보다 더 큰 가치는 없다. 천경도 중요하지만, 그의 가치가 다른 제자들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야.”
“사형!”
운경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지만 무경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대사형의 권위로 명한다. 사제 운경은 지금 당장 전력으로 경공을 펼쳐라.”
“알……겠습니다.”
결국 운경은 무경의 명을 따랐다.
무경을 따라 경공을 펼치며 담호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눈엔 자책감만이 가득했다.
‘미안하다, 천경. 그래서 그토록 데려오지 않으려 한 건데. 너를 구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말거라.’
그와 무경의 모습이 무너지는 바위 사이로 사라졌다.
담호는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굉음이 요란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대화가 또렷이 들어왔다. 죽음의 위기가 그의 신경을 예리하게 일깨워서인지도 몰랐다.
청허 진인은 그를 지나쳐 갔다. 그의 꽉 깨문 입술이 유독 또렷하게 들어왔다.
연소하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감히 그에게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이내 계곡 밖으로 몸을 날렸다.
‘미안해요.’
무당파의 무인들이 사라지고, 종남파의 무인들도 멀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산파의 무인들이 계곡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무사히 빠져나갔지만, 어떤 이들은 쏟아지는 바위에 깔려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의 절규는 이내 토사에 묻혀 사라졌다.
담호는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사부.”
어둠이 그를 덮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