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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8장. 어둠 속에서 길을 찾다(1)
스르륵!
바위 틈을 비집고 기다란 무언가가 삐져나왔다. 꿈틀거리면서 앞으로 기어가는 물체는 바로 뱀이었다. 하지만 흔히들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뱀은 아니었다.
기다란 혓바닥을 날름거리면서 바닥을 기는 뱀에겐 눈과 귀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둠 속에서도 용케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돌멩이가 있으면 돌아가고, 골이 있으면 넘어갔다. 뱀은 그렇게 자신이 목적한 곳을 향해 기어갔다.
목적지는 건너편에 있는 조그만 바위틈이었다. 뱀은 바위틈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다음은 기다란 몸통을 넣을 차례였다.
뱀이 추진력을 얻기 위해 몸을 한껏 끌어당길 때였다.
갑자기 엄청난 힘이 뱀의 머리 바로 아래쪽 몸통을 조였다. 갑작스러운 압력에 놀란 뱀이 머리를 들 때였다.
콰직!
섬뜩한 파골음과 함께 뱀의 머리가 송두리째 뜯겨 나갔다. 영문도 모른 채 머리를 잃은 뱀의 몸통이 미친 듯이 요동을 쳤다. 하지만 뱀의 몸통을 붙잡고 있는 억센 손은 움직일 줄 몰랐다.
우적! 우적!
어둠 속에서 누군가 뱀의 머리를 씹어 먹고 있었다.
얼굴 전체를 가린 채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과 가슴팍까지 자란 수염 때문에 이목구비를 구별할 수 없는 남자였다.
남자는 옷 쪼가리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오랫동안 햇볕을 쐬지 못해서 그런지 남자의 몸은 무척이나 창백했다.
하지만 햐얀 피부와 달리 남자의 몸은 무척이나 강인해 보였다. 마치 철사를 꼬아 놓은 것처럼 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잘 발달된 근육과 마치 크고 작은 쇠망치를 붙여 놓은 것처럼 도드라진 뼈마디들.
우직!
남자가 다시 뱀을 뜯자 전신의 근육이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마치 별개의 생명체인 양 움직이는 근육들에서는 막대한 힘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남자는 거의 반 시진에 걸쳐 뱀 한 마리를 먹어 치웠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뼛조각, 비늘 하나 버리지 않고 그렇게 뱀 한 마리를 완전히 위장에 집어넣었다.
남자가 손으로 뱀의 체액이 묻은 입을 닦으며 일어섰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남자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마치 맹수가 어둠 속에서 먹이를 노리듯 남자의 동공은 활짝 열려 있어, 아무리 미세한 빛이라도 놓치지 않고 감지할 수 있었다.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은 무척이나 독특했다.
쿵! 스르륵! 쿵! 스르륵!
오른 발이 바닥을 디디면 왼발이 살짝 끌리며 따라왔다. 그로 인해 생기는 독특한 운율감과 박자감은 남자의 걸음을 더욱 이질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비좁은 동굴을 벗어나 남자가 도착한 곳은 광활한 지하 공동이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생활해도 될 만큼 커다란 지하 공동의 천장에는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야명주가 여러 개 박혀 있었다.
남자가 이마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자 오랫동안 햇볕을 보지 못한 창백한 얼굴이 야명주의 희미한 빛 아래 드러났다.
반듯한 이마 아래 자리 잡은 새까만 눈동자와 어떤 경우에도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은 굳게 다문 입술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남자는 바로 담호였다.
더 과묵해지고, 더 거칠어진 모습으로 그는 여전히 천금마옥에 생존해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몇 년이 되었을 수도 있고,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났을 수도 있었다.
담호는 최소 오 년 이상은 지났을 거라고 생각했다. 성장기가 끝났는지 언제부턴가 신체가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장이 멈췄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담호의 시선이 지하 공동 한쪽을 향했다. 시간은 흘렀지만 여전히 엄청난 양의 토사와 집채만 한 크기의 바위들이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담호는 바위와 토사들을 지나쳐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도 조그만 동혈이 뚫려 있었다.
담호는 망설이지 않고 동혈로 들어갔다.
동혈은 무척이나 비좁고 어두웠다. 하지만 어둠 따윈 담호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이미 수백, 수천 번도 더 드나든 길이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 천장에서 자란 종유석의 위치 하나까지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동혈은 꾸불꾸불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둠 속을 담호는 인내심을 갖고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담호의 목적지가 나타났다.
방원 이 장 정도의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었다. 그곳엔 돌로 만든 책장이 있었다. 책장에는 이십여 권 정도의 서책이 꽂혀 있었다.
담호는 돌로 만든 책장 옆에 있는 낡은 궤짝을 열었다. 그러자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궤짝 안에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야명주가 들어 있었다.
담호는 한손에 야명주를 든 채 다른 손으로 돌로 만든 책장에 있는 서책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희미한 불빛 아래 서책의 제목이 드러났다.
삼격포영권(三擊砲砲影拳).
낡고 헤진 책자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담호는 삼격포영권이라 적힌 서책을 후루룩 넘겼다. 그동안 이 낡은 책자를 얼마나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수백, 수천 번은 더 넘게 본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이상인지도 몰랐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머릿속에 삼격포영권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가 있는 공간은 만마고(萬魔庫)라고 했다.
오래전에는 마교의 죄수들을 가뒀던 곳이었다. 하지만 마교의 무인들이 천금마옥에 들어온 이후에는 무경을 보관하는 곳으로 이용됐다.
담호가 들어오기 전에는 수백 권이 넘는 무경들이 이곳에 보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교의 무인들이 이곳을 떠날 때 대부분의 무경 역시 가져갔다.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된 것들뿐이다.
삼격포영권을 비롯해 탄마각(彈魔脚), 광압수(廣壓手) 등이 모두 그렇게 버려진 무공들이었다.
어차피 천금마옥을 붕괴시킬 것이기에 외부로 유출될 위험도 없었을 것이다.
처음 이곳을 찾아냈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랐다.
이곳에선 시간이 너무나 더디게 흘렀다. 진짜 그럴 리는 없었지만, 담호가 느끼기엔 하루가 열흘 같았다.
무언가 읽을 것이 있다는 것, 시간을 보낼 무언가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담호는 충분히 기뻤다. 그때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만마고를 찾아 책을 탐독했다.
읽고, 또 읽었다.
나중에는 자구 하나 틀리지 않을 정도로 탈탈 외웠고, 그 후에는 숨겨진 뜻이 없는지 또다시 탐독했다. 그렇게 완벽하게 외운 무경들이었다.
하지만 담호는 삼격포영권을 필두로 이곳에 있는 무경들을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담호의 동공이 활짝 열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담호는 만마고를 나왔다.
이번에 그가 향한 곳은 만마고보다 훨씬 더 으슥한 곳에 있는 동혈이었다. 동혈은 사람이 겨우 한 명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비좁으면서도 음습했다.
후우웅!
동혈 건너편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마치 마귀의 속삭임처럼 강렬하면서도 차가운 바람이 담호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기에 추위가 느껴질 만도 하건만 담호의 표정엔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는 마치 인간의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동혈 끝에 도착하자 부서진 바위 조각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자연적으로 부서진 게 아닌 인위적인 충격에 의해 파괴된 것들이었다.
바위를 부순 이는 바로 담호였다.
담호는 언제인지 정확하게 모를 그날을 떠올렸다.
벽곡단이 모두 떨어지고 며칠이나 굶었는지 모를 그때를.
그땐 배고픔에 눈이 돌아갔었다. 그냥 이렇게 가다가 죽나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팔이라도 뜯어먹고 싶을 정도로 극심하게 굶주려 있었을 때.
뭐라도 찾아야 했다.
굶주림을 참다못해 벽에 나 있는 이름 모를 이끼를 긁어 먹었다. 그렇게 근근이 생명을 연장하며 필사적으로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그 피나는 노력 끝에 발견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동혈 안쪽을 막고 있는 바위틈으로 새어 나오는 바람을 느꼈다. 바위 뒤에 빈 공간이 있다는 뜻.
담호는 바위를 부쉈다.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이 지금 담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방원 십여 장 정도의 제법 넓은 공간이었다. 공간 전체를 물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단순히 종유석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인 웅덩이라고 보기엔 턱없이 크고 깊었다. 어디선가 물이 유입되고 있다는 뜻, 또한 일정한 양이 유지되는 것으로 보아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담호는 유심히 웅덩이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웅덩이 안에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있었다.
너무 투명해서 뼈까지 보이는데, 기이하게 뼈가 발광을 하고 있었다. 담호도 직접 보지 못했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한 물고기였다.
담호는 그대로 웅덩이 안에 뛰어들었다.
물은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지독한 한기에 피부가 떨어져 나갈 듯 아파 왔고,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쳤다.
하지만 담호는 그 모든 아픔을 참으며 물속을 헤집고 다녔다. 괴어들이 담호의 등장에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담호의 손을 피하지는 못했다.
잠시 후 다시 웅덩이 밖으로 나온 담호의 손에는 괴어가 들려 있었다.
괴어가 담호의 손안에서 파닥거렸다. 담호는 그대로 괴어를 뜯었다. 이곳에는 모닥불을 피울 만한 그 어떤 물건도 없었다.
화식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고, 이렇게 생식으로나마 무언가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담호는 감사했다.
담호는 괴어의 대가리만 빼고 모조리 먹어치웠다. 담호는 잠시 아쉬운 눈으로 괴어의 대가리를 바라보았다.
괴어가 언제부터 이곳에 살았는지, 어떻게 이곳에서 살게 된 것인지는 몰랐다. 중요한 것은 괴어가 이곳에 살기 적합하게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툭!
담호가 괴어의 대가리를 웅덩이 한쪽의 공터에 던졌다. 그리고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잠시 후였다.
사사삭!
갑자기 미세한 소음이 웅덩이가 있는 지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이어서 바위의 틈에서 무언가 기어 나왔다.
담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것은 매우 기묘한 벌레였다. 마치 풍뎅이처럼 생긴…….
차이점이 있다면 풍뎅이도 괴어처럼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풍뎅이가 괴어의 대가리에 달라붙어 살점을 갉아 먹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밀폐된 공간이라 그런지 조그만 소리도 매우 크게 증폭돼서 울려 퍼졌다.
담호는 무릎을 쪼그리고 앉은 채 풍뎅이를 바라보았다. 담호가 있었지만, 풍뎅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먹이에 집중했다.
풍뎅이가 어느 정도 살점을 뜯어 먹었을 때였다. 갑자기 바위틈에서 다시 무언가 기어 나왔다.
순간 담호의 입가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풍뎅이가 아닌 사마귀였다. 사마귀 역시 풍뎅이처럼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마귀도 어둠에 적응한 이종(異種)이었다. 사마귀가 나타나자 풍뎅이가 경계의 빛을 띠고 노려보았다.
담호는 흥미로운 눈으로 풍뎅이와 사마귀의 대치를 바라보았다.
이곳 지하 공간은 무척 흥미로웠다.
괴어는 스스로 빛을 내서 곤충들을 유인하고, 곤충들은 죽을 자린 줄 알면서도 이곳으로 찾아왔다. 그것이 괴어가 이곳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간혹 괴어가 죽으면 다시 지하 곤충들의 먹이가 되었다. 먹이가 부족하다 보니 곤충들의 경쟁 또한 대단했다.
그중에서도 담호의 시선을 끈 것은 바로 풍뎅이와 사마귀의 대결이었다.
사마귀가 낫같이 생긴 앞발로 풍뎅이를 공격해 왔다. 매섭게 앞발을 휘두르는 모습이 마치 무림의 고수 같았다.
일 초의 변식도 없이 오로지 풍뎅이의 목만을 노리고 날아오는 사마귀의 앞발.
순간 풍뎅이가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러자 사마귀의 앞발이 갑주처럼 단단한 풍뎅이의 몸체에 튕겨 나갔다. 사마귀의 공격을 사선으로 빗겨 낸 것이다.
공격이 빗나간 사마귀가 비틀거렸다. 그러자 풍뎅이가 육중한 몸으로 사마귀를 밀어붙였다.
순간 사마귀가 날갯짓을 해서 잠시 뒤로 물러났다.
또다시 이어지는 대치, 그리고 공격.
사마귀의 앞발이 다시 날카롭게 휘둘러졌다. 이전처럼 단순하게 빗겨 흘려보낼 공격이 아니었다.
푸르르!
순간 풍뎅이가 날갯짓을 했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빠른 날갯짓에 사마귀의 앞발이 튕겨나갔다.
담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최강의 방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