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24화 8장. 어둠 속에서 길을 찾다(2)
담호가 문득 눈을 떴다. 그러자 밀실에 가까운 지하 공간이 보였다. 지하 공동 중에서도 제일 비좁은 이 공간이 그의 거처였다.
아주 오래전 누군가 사용한 흔적이 있는 지하 공간은 담호의 유일한 휴식처였다.
밀실 한쪽에 있는 돌을 깎아 만든 침상, 시리도록 차가운 한기가 올라오는 돌 침상에서 담호는 잠을 잤다.
지독한 한기는 그를 괴롭혔고, 추위를 견뎌 내기 위해 담호는 항상 운공을 해야 했다.
담호가 고개를 돌려 바로 옆의 벽을 바라봤다. 그러자 누군가 매우 뾰족한 물체로 새긴 듯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검율천, 이곳에 친구들을 묻다.
담호 이전에 이곳의 주인이었던 자가 새긴 글귀였다.
고개만 돌리면 보였기에 눈을 뜰 때마다 보게 되는 글자였다. 그런 글자가 벽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하나같이 이곳의 주인이었던 자들이 남긴 글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절망을, 어떤 이들은 희망을 새겼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관심도 없었다.
담호의 관심사는 현재였다. 어떻게든 현재를 살아남는 것. 그래서 밖으로 나가는 것.
담호는 밀실을 나와 지하 공동으로 향했다.
마침내 그가 멈춰 선 곳은 거대한 바위 앞이었다.
지하 공동에 밀려온 바위와 토사들 중에서 가장 거대하면서도 단단한 녀석이었다.
놈은 마치 문지기처럼 지하 공동의 입구를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다. 하지만 놈의 거대한 동체에는 여기 저기 생채기가 나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놈의 몸은 거울처럼 반질반질 했었다.
이유는 금세 드러났다.
쿵!
담호의 다리가 바위를 강타했다. 강타당한 표면이 부서져 나가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온전한 다리가 아닌 왼쪽 다리였다. 그런데 바위의 표면에 쩍쩍 금이 갔다.
담호가 다시 다리를 날렸다.
쿵! 쿵!
어두운 지하 공간에 육중한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 후로 소리는 한참 동안이나 울려 퍼졌다.
***
쩌적!
거대한 바위에 균열이 일었다. 밑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은 순식간에 바위 전체로 번져 나갔다.
쿠쿠쿵!
거대한 바위가 비명을 내지르며 붕괴되었다.
담호는 무심한 눈으로 부서진 바위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바위가 절로 부서질 리 없었다. 놈을 부순 것은 담호의 주먹이었다. 거대한 바위를 부쉈음에도 불구하고 담호의 주먹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주먹 위로 돌덩이처럼 딱딱한 굳은살이 도드라져 나온 모습이 꼭 쇠망치 같았다.
담호는 잠시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폈다를 반복했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거대한 바위를 부쉈음에도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토사의 양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제 겨우 초입에 발을 디뎠을 뿐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주먹을 휘둘러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담호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 지루한 곳에서 그에게 남는 것은 오직 시간뿐이었다. 그는 얼마든지 주먹을 휘두를 용의가 있었다.
담호의 주먹이 다시 거대한 바위에 작렬했다. 그때마다 바위가 육중한 비명을 질렀다.
쿵! 쿵!
오직 파괴하겠다는 일념(一念).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가 그를 움직였다.
잠시 담호가 뒤로 물러났다.
팟!
담호의 신형이 순식간에 십여 장의 거리를 단축해 쏘아졌다.
충보. 성문을 파괴하는 충차 같은 보법이 펼쳐지고, 뒤이어 파성추가 펼쳐졌다.
쾅!
거대한 바위가 부서져 돌조각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담호의 눈이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그와 사부 현소 진인과 함께 만들어 낸 충보와 파성추였다. 처음 이 무공들을 창안했을 때만 하더라도 화산파의 신묘한 도리가 녹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펼친 충보와 파성추에는 일말의 자비도, 도가의 이치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담호의 무공에는 마교가 남긴 무공들의 정수가 스며들었다.
삼격포영권의 묘리가 파성추에 녹아들었고, 탄마각의 정수가 충보와 합일됐다. 광압수가 또 다른 무공으로 재탄생되었다. 중천심결은 마교의 심공과 섞여 또 다른 심공으로 진일보했다.
도저히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화산파의 무공과 마교의 무공이 그의 몸에서 한데 섞여 들었다.
담호는 탐식자였다.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마공도 받아들였다.
현소 진인과 함께 만든 무공은 이제 예전의 모습과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화했다. 현소 진인이 와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음습하면서도 고립된 환경은 담호의 성격을 더욱 폐쇄적이고 살기 짙게 만들었다.
담호의 하루 일과는 쳇바퀴처럼 돌아갔다.
잠시 눈을 붙인 후 운공, 만마고로 이동해 무공서를 탐닉한 후 웅덩이로 이동해 괴어를 잡아먹었다.
이후 지하 공동을 막고 있는 바위를 향해 무공을 펼쳤다.
바위가 그의 적이었고, 거대한 토사가 그의 방해물이었다.
부수고, 또 부수고.
그러다가 지치면 다시 운공 후에 잠이 들었다.
이곳에선 그 일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어둠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특히 이렇게 고립된 곳에서 오랜 세월 혼자 있는 것은 심마가 들기 십상이었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사소한 일 하나에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어쩌면 벌써 미쳤는지 모르지.’
꼭 외부로 광기를 발산해야만 미친 것이 아니다.
냉철하게 미칠 수도 있다.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지만 필요에 의해 언제든 광기를 발산할 수 있는 것.
담호는 자신이 그런 상태라고 생각했다.
이곳은 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곳이었다.
쾅!
그의 파성추 한 방에 커다란 바위가 부서졌다.
담호가 습관처럼 다시 파성추를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위이잉!
갑자기 토사물 사이로 조그만 벌레들이 새까맣게 몰려나오더니 담호를 향해 날아들었다.
‘개미?’
쌀알보다 작은 벌레는 개미가 분명했다. 그런데 일반적인 개미와 다르게 날개가 달려 있었다.
보통의 개미 무리엔 날개 달린 개미들이 있어도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담호를 향해 날아오는 개미들은 모두가 날개가 달려 있었다.
일반적인 개미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해 주듯 개미들이 일제히 담호를 깨물려 했다.
담호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파성추를 펼쳤다.
후웅!
커다란 바위도 단숨에 파괴하는 파성추였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개미들에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바람에 잠시 밀려났던 개미들이 몇몇이 은밀히 담호를 물었다.
순간 담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개미들에게 물린 곳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가려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독개미?’
담호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 개미들에게 몇 번을 더 물렸다.
개미들에게 물린 곳이 순식간에 퉁퉁 부어올랐다.
“크윽!”
담호의 입술을 비집고 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부릅뜬 담호의 두 눈이 충혈되었다. 물린 곳에서 시작한 고통과 가려움증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
우우웅!
개미들이 담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담호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고통을 참으며 순식간에 십여 장이나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개미들이 다시 기어 나온 곳으로 돌아가 주위를 맴돌았다.
그제야 담호가 급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을 시작했다. 내공으로 독을 몰아내려는 것이다.
우웅!
내공이 그의 몸속을 치달으며 개미의 독을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개미의 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지독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투둑!
담호의 전신에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끄으으!”
꽉 다문 입술 사이로 고통 어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픔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려움증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가진 담호도 견디기 힘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운공을 풀고 손톱으로 전신을 벅벅 긁고 싶었다. 피부를 한 겹 벗겨 내면 가려움이 가실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치명적인 독기가 그의 심장을 공격할 것이다.
운공을 하자니 견딜 수 없이 괴롭고, 운공을 그만두자니 목숨이 위험했다.
결국 담호는 가려움을 참고 운공에 열중했다.
그의 얼굴에 붉은 반점이 올라왔다.
“후아!”
담호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얼굴에 올라왔던 붉은 반점은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지난 며칠 동안 필사적으로 운공을 해서 몸 안에 들어온 독기를 몰아낼 수 있었다. 열흘, 어쩌면 보름 이상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그 시간 동안 담호는 몇 차례나 죽음의 위기를 느꼈었다.
마치 불지옥에 갇힌 채 살갗을 칼로 긁어내는 듯했다. 그 정도로 개미의 독은 지독했다.
담호는 개미에게 지옥혈의(地獄血蚁)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야말로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담호는 괴어 한 마리를 잡아먹으며 생각했다.
‘이곳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그곳을 통과해야 한다.’
천금마옥을 둘러싼 지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단단했다. 그래서 마교도 이곳을 뇌옥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그나마 가장 만만한 곳이 바로 토사가 붕괴된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엔 지옥혈의의 집이 존재한다.
건드리면 지옥혈의가 당연히 공격을 할 것이다.
문제는 지금 담호로서는 지옥혈의의 공격을 방어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지옥혈의를 단번에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다시 반격을 당할 것이고, 그때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는 것 또한 말도 안 됐다.
다행히 아직은 괴어가 남아 있지만, 언젠가는 모두 담호의 뱃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정말 끝장이었다.
물러날 수도,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었다.
그의 선택지는 오직 하나, 전진하는 것뿐이다.
담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방패……. 방패를 완성해야 한다.’
***
담호는 그 후로도 몇 십 번을 더 지옥혈의에게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똑같았다.
지옥혈의에게 물리고, 지옥을 경험했다.
차라리 이대로 혀를 깨물고 죽는 것이 낫다 싶었을 정도였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고통과 가려움증에 담호는 수십 번이나 머리를 바위에 처박았다.
이마가 터지고, 피가 전신을 적셨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운공을 하고, 다시 지옥혈의에게 도전을 했다.
지옥혈의와 싸우면서 담호는 급격히 살이 빠졌다. 나중에는 뼈에다 가죽만 뒤집어씌운 것처럼 깡말랐을 정도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우웅!
지옥혈의가 담호를 향해 날아들었다.
담호가 뒤로 물러나며 파성추를 날렸다. 많은 개미들이 파성추에 휩쓸려 짓이겨졌다. 하지만 상당수는 바람에 밀려나 날갯짓을 하다가 다시 해일처럼 담호를 향해 날아왔다.
순간 담호의 손모양이 변했다.
이제까지 쇠망치처럼 주먹질만 고수하던 그의 손이 활짝 펴졌다.
그 상태 그대로 담호가 손바닥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러자 부드러운 바람이 일어나 지옥혈의를 밀어냈다.
지옥혈의는 어떻게든 담호에게 다가오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잠시 자신의 내공 흐름을 관조하던 담호의 눈이 빛났다.
‘저들을 상대하는 데 강맹한 내공은 필요 없다. 오히려 무당파의 면장처럼 섬세한 내공의 운용이 필요하다.’
수십 번이나 지옥혈의와 싸우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강함이 통하지 않는 상대도 있었다. 눈앞에 있는 지옥혈의가 그랬다.
그동안 번식을 잘했는지 지옥혈의는 그새 엄청나게 불어 있었다. 이대로 지옥혈의를 놔두면 이 지하 공동은 지옥혈의들에게 잠식당하고 말 것이다.
단순히 무공이 발전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싸움이었다.
담호가 활짝 펼쳤던 손바닥을 오므렸다.
내공의 성질이 변했다.
흡(吸)!
내공의 운용이 바뀌면서 순간적으로 그의 손바닥과 지옥혈의 사이에 공기가 사라졌다. 진공(眞空) 상태가 된 것이다.
쉬아악!
순간 일대의 공기가 그의 손바닥 앞쪽으로 해일처럼 밀려왔다. 지옥혈의도 공기의 흐름에 휩쓸려 왔다.
수십만, 수백만이 넘는 지옥혈의가 어린아이 머리통만 하게 뭉쳤다.
다시 담호의 내공 운용이 바뀌었다. 손가락이 오므라지며 오른쪽으로 회전했다.
폭(爆)!
퍼엉!
공처럼 뭉쳐져 있던 지옥혈의가 터져 나갔다.
그 충격으로 지하 공동의 공기가 요동쳤다.
우웅!
오지암파경(五指暗破輕)
지옥혈의를 상대하기 위해 담호가 만들어 낸 무공이었다. 일순간 주위를 진공으로 만든 후 폭발을 시키는 극악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오지암파경에 의해 죽은 지옥혈의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담호가 죽인 지옥혈의의 숫자보다 수백 배는 더 많은 수가 남아 있었다.
지옥혈의가 다시 담호를 향해 날아왔다.
새까맣게 담호를 뒤덮은 지옥혈의. 분노에 잠식된 지옥혈의들이 담호를 깨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부르르!
갑자기 담호의 전신이 진동을 일으켰다. 인간의 안력으로는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담호의 몸이 두 겹, 세 겹으로 겹쳐보였다.
픽! 픽! 픽!
순간 담호를 물려던 지옥혈의들이 터져 나갔다.
초진동을 이용한 방호기공(防護氣功).
풍뎅이의 날갯짓에서 영감을 얻은 담호만의 무공이었다.
“방패(防牌).”
담호의 입술에서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