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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8장. 어둠 속에서 길을 찾다(3)
녹음으로 물든 광활한 평원을 가로지르는 수십 대의 짐마차가 있었다. 짐마차에 타고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과 그들을 호위하듯 말을 모는 십여 명의 무인들.
선두에 있는 마차의 지붕 위에는 은련(銀聯)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깃발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우와!”
행렬 중간의 짐마차에 앉아 있는 소년이 광활한 평원을 보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이제 겨우 열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아직 애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 그리고 얼굴만큼이나 넉넉한 체형이 인상적이었다.
한눈에 봐도 푸근한 인상을 가진 소년은 연신 주위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마차를 몰던 중년인이 그런 소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진보야, 그렇게 좋으냐?”
“그럼요!”
“이미 올 때도 봤던 풍경이 아니더냐? 뭐가 신기하다고 그러느냐?”
“그때는 이렇게 푸르지 않았잖아요?”
“하기는…….”
마차를 몰던 중년인 방우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소년은 그의 아들인 방진보였다.
방진보를 바라보는 방우광의 눈에는 안쓰러운 빛이 가득했다.
‘불쌍한 녀석! 제 어미만 살아 있어도 이렇게 아비 따라다니며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때였다.
“오늘은 이곳에서 노숙을 할 테니 모두들 준비하시게.”
선두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예!”
마차를 몰던 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중에는 방우광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수십 대의 마차가 평지에 모여들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마차를 둥글게 배치해 방벽처럼 만들고, 그 안에서 노숙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방우광도 마차를 다른 마차들 사이에 세우고는 급히 방진보에게 말했다.
“어서 주구(廚具)를 내리거라.”
“예!”
방진보가 짐마차 뒤쪽에 실린 물건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내린 것은 무쇠로 만든 커다란 과자(鍋子, 중국식 냄비)였다.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얕고 넓은 광동식 과자와 깊고 둥근 사천식 과자가 동시에 내려졌다.
“영차!”
그다음에 방진보가 내린 것은 바로 커다란 무쇠솥이었다. 방우광이 방진보에게 손짓을 했다.
“솥을 이쪽으로 가져오거라.”
방우광이 근처에 있는 돌들을 모아 임시로 화덕을 만들었다. 그는 방진보가 가져온 무쇠솥을 화덕에 올려놓았다.
“다른 것도 가져오너라.”
“예!”
방진보는 요리용 칼인 주도(廚刀)와 각종 찜기들을 마저 내렸다. 주구들을 내렸지만 아직 할 일은 끝나지 않았다.
짐마차 한쪽에 실려 있던 커다란 고깃덩이와 채소들을 부지런히 날랐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방진보는 연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사이 방우광은 임시 화덕을 네 개나 완성시켰다. 화덕 위에는 과자와 무쇠솥이 앉혀졌다.
이젠 불을 붙일 차례였다. 방우광은 짐마차 뒤쪽에 있는 궤짝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덩어리들은 바로 쇠똥과 건초를 섞어 말린 것이었다. 바짝 말리면 냄새도 거의 나지 않고 불을 붙이면 화력도 좋아 방우광이 애용하는 물건이었다.
방우광은 말린 쇠똥을 화덕에 집어넣고 불을 붙였다. 잘 마른 쇠똥은 순식간에 타올랐다.
“휴!”
그제야 방우광이 잠시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덕 앞에 두껍고 기다란 나무판이 놓여졌다. 나무판의 표면에는 수많은 칼자국이 나 있었다. 나무판은 바로 도마였다.
도마 앞에 방진보가 서 있었다.
방우광이 방진보를 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시작할까?”
“예!”
대답과 함께 방진보가 주도를 들고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숭덩! 숭덩!
커다란 주도에 의해 고기가 잘려 나갔다.
직사각형에 무게마저 만만치 않은 주도를 방진보는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커다란 고깃덩이를 순식간에 잘게 해체하고, 각종 채소들을 순식간에 다듬어 먹기 좋은 크기로 만들었다.
“헤헤!”
방진보의 잇새로 절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방진보를 보며 방우광이 웃었다.
“녀석!”
이젠 자신의 차례였다.
그는 방진보가 다듬은 재료들을 뜨겁게 달궈진 과자에 넣고 볶기 시작했다.
치이익!
하얀 연기가 순식간에 피어올랐다.
방우광이 양손에 과자를 하나씩 들고 움직였다. 제아무리 숙련된 숙수라고 할지라도 무거운 과자를 두 개나 들고 불질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두개의 과자를 동시에 움직이는 방우광의 얼굴엔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방진보는 그런 아비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언제 봐도 아비가 과자를 다루는 기술은 정말 대단했다. 단순하게 과자를 다루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틈틈이 무쇠솥에 고기와 각종 채소를 한꺼번에 넣고 화과를 끓이는데 그 냄새가 일품이었다.
방우광은 한꺼번에 전혀 다른 세 가지 요리를 해냈다.
금전우육(金錢牛肉)과 회가육(回猳肉). 그리고 돼지고기를 듬뿍 넣고 끓인 화과였다.
금전우육은 쇠고기 요리고, 회가육과 화과는 돼지고기 요리였다. 같은 고기 요리이긴 했지만 조리하는 방식이나 재료들이 달라 한꺼번에 요리하기엔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휴우!”
방우광이 소매로 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으며 방진보를 바라봤다. 그러자 방진보가 미소를 지었다.
“밥은 이미 완성됐어요. 헤헤!”
방진보는 어느샌가 하나 남은 화덕에 솥을 올리고 밥을 지었다.
“녀석! 이젠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구나.”
“그럼요! 내 경력이 얼만데요.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다닌 게 벌써 팔 년이라구요. 이젠 저도 당당한 숙수가 될 자격을 갖췄다구요.”
“허! 벌써 그렇게 되었더냐?”
방우광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내가 죽고 난 이후 방진보와 함께 천하를 떠돌았다. 그 말은 곧 아내가 죽은 지 팔 년이 지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조금만 더 참거라. 이번에 돌아가면 정착할 테니.”
“그럼 드디어 우리도 주루를 내는 건가요?”
“허허! 그렇다.”
“우와아아!”
방진보가 신이 나서 제자리에서 동동 뛰었다. 그런 방진보를 보며 방우광이 미소를 지었다.
이번 원행에서 번 돈이 제법 적잖았다. 그간 모은 돈을 더한다면 조그만 주루라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방진보에게 정식으로 음식을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그전에 동정호에 있는 천하제일루(天下第一樓)에 갔다 와야겠지.”
“드디어 천하제일숙수의 음식을 맛보는 건가요?”
“그래! 이 아비가 그분의 요리를 맛보고 나중에 똑같이 해 주마.”
“약속하신 거예요?”
“물론이다. 하하하!”
방우광이 너털웃음을 터트릴 때였다.
“이야, 냄새가 끝내주는구만.”
“역시 방 숙수야. 그새 요리를 완성시키다니.”
음식 냄새를 맡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은련상단 소속의 보표들과 상인들이었다.
방우광 부자는 상단에 고용된 숙수였다. 근 일 년이나 되는 원행이다 보니 상단에서 특별히 배려해 고용된 것이다.
이렇게 노숙을 하게 될 때면 방우광 부자는 일행들이 먹을 음식을 조리했다. 원행길에 나서면 늘 건량만을 먹던 상인들과 보표들은 방우광 부자가 뚝딱 만들어 낸 음식에 환호를 보냈다.
방우광의 솜씨는 이름난 유명 주루의 숙수들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뛰어났던 그의 요리 실력은 일 년의 원행을 통해서 더욱 깊어지고 완숙해졌다. 상인들과 함께 서역에 들어가서 각종 수많은 향신료를 맛보고 연구했기 때문이다.
방우광 부자가 타고 있는 마차에는 그가 개인적으로 구한 향신료가 실려 있었다.
그때 중년의 무인이 다가왔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중년의 무인은 바로 은련상단의 주인인 조수광이었다.
“오늘은 또 무슨 요리로 우리를 즐겁게 해 주려는가? 방 숙수.”
“마침 저번에 들렀던 마을에서 질 좋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구할 수 있어서 금전우육과 회가육, 그리고 돼지고기 화과를 만들어 봤습니다.”
“오! 금전우육이라니. 오늘은 내 입이 정말 호사를 하겠군.”
조수광이 미소를 지었다.
그가 방진보를 바라보았다.
“진보도 어서 아비의 음식 솜씨를 배워야지.”
“음식에 대한 감각은 이 녀석이 저보다 낫습니다.”
“허허! 그것참 기대되는군.”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방우광이 방진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방진보가 그런 아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해맑게 웃었다.
조수광이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자자, 고생 많았네. 방 숙수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으니 다 같이 식사하세.”
“잘 먹겠습니다.”
보표와 상인 들이 대답과 함께 방우광 부자가 만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방진보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 좋다.’
다음 날 새벽이 되자 은련상단은 일찍 자리를 정리했다. 모닥불을 끄고, 짐을 정리하자 순식간에 아침 해가 밝았다.
그들과 달리 방우광 부자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모두가 잠든 시각 그들은 일행이 먹을 식사를 미리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는 어제 먹고 남긴 음식들로 만든 죽이었다. 간단한 죽이라고 하지만 고기가 많이 들었기에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었다.
모두가 식사를 끝낸 후 방우광 부자는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그들이 각종 주구를 마차에 싣자 은련상단이 출발했다.
방우광이 모는 마차의 뒷자리에 누워서 방진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제 얼마 후면 중원으로 들어가는구나.’
생각해 보면 지난 일 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만큼 바쁘게 지나갔다. 방우광이 은련상단에 일자리를 구하면서 방진보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없이 떠밀리 듯 서역으로 떠났다.
처음 서역으로 갈 때만 하더라도 아비를 원망하던 방진보였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방진보가 품에서 조그만 책자를 꺼냈다. 아비 방우광이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의 요리 비법을 적은 책자였다.
방진보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책자를 보고 요리법을 익혔다. 물론 아직까지는 이론뿐이지만, 중원에 들어가면 정식으로 요리를 배우게 될 것이다.
“헤헤!”
방진보가 헤픈 웃음을 흘릴 때였다.
콰아앙!
갑자기 마른하늘에 뇌성벽력음이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워워!”
은련상단의 사람들이 놀라 날뛰는 말들을 진정시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언덕 너머에서 엄청난 양의 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저건?”
“대체 무슨 일이야?”
상인과 보표 들이 웅성거렸다.
상단주 조수광이 수석보표 오기오를 바라봤다.
“무슨 일인가?”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유표와 청오는 나와 함께 저곳으로 간다. 모두 각별히 주의하도록.”
“알겠습니다.”
오기오가 유표와 청오를 이끌고 먼지가 피어오르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지옥곡에 변고라도 생긴 것인가?’
언제부터인지 몰랐다. 그곳에 지옥곡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본래는 협곡이었던 곳이 어느 날 붕괴되어 평지가 되었다.
협곡이 평지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그곳을 지옥곡이라 불렀다. 거대한 바위와 토사로 평지가 된 곳, 그래서 이곳을 지나가는 상단들도 그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유표와 청오는 오기오가 신뢰하는 경험 많은 보표들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정도로 담대했다.
하지만 막상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전신은 마치 폭풍을 만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마치 화산이라도 터진 것처럼 지옥곡 일대가 초토화되어 있었다. 비산한 먼지는 가라앉지 않고 부유해 시야가 온통 뿌옇게 보였다.
“헉!”
안력을 끌어 올리던 오기오와 유표 등이 갑자기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잿빛 먼지 속에서 시퍼런 불덩이 두 개가 떠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피어난 귀화처럼 일렁이는 두개의 불덩이가 그들을 똑바로 바로보고 있었다.
“사, 사람?”
오기오는 그것이 인간의 눈빛이라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