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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6화 (2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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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1장. 누구나 홀로 서야 할 때가 있다(1)

마치 어둠이 내린 것처럼 사위를 어둡게 만들었던 먼지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하지만 오기오와 보표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먼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남자 때문이었다.

그는 마치 짐승 같았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가슴까지 덮은 수염, 그 사이로 섬뜩한 빛이 어려 있었다.

거의 다 헤진 천 조각으로 국부를 겨우 가리고, 허리엔 천으로 둥글게 만 조그만 보따리를 매고 있었다.

“흐으!”

남자의 입술을 비집고 짐승의 울음 같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오기오와 유표 등은 전신의 피가 싸늘히 식는 느낌에 움찔거렸다.

그들은 남자의 거친 호흡에서 짐승의 숨결을 느꼈다.

사나우면서도 포악한 짐승 앞에 마치 알몸으로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대체…….’

‘으으!’

남자는 눈을 내리깐 채 한동안 거친 숨만 흘려 냈다.

그가 호흡을 할 때마다 아직도 부유하는 먼지가 같이 일렁였다. 그 소름끼치는 모습에 오기오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문득 짐승 같은 남자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봤다. 순간 너무나 강렬한 안광이 그들의 안구를 후벼 팠다.

“크윽!”

오기오는 감히 남자의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하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남자의 눈빛을 잠시 본 것만으로도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무슨 놈의 살기가…….’

은련상단의 수석 보표로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오기오였지만, 단 한 번도 남자와 같은 눈빛을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 오기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동안 그들을 바라보던 남자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누구지?”

무척이나 거칠고 탁한 목소리였다.

만일 오기오가 정신을 집중하지 않았다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남자의 발음은 불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오기오의 귓속에는 동종 소리만큼이나 크게 울리고 있었다.

오기오가 급히 대답했다.

“나, 나는 은련상단의 수석 보표인 오기오라고 합니다.”

“은련상단?”

남자가 마치 처음 들어 본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난주에 적을 두고 있는 상단입니다. 주로 서역을 오가며 물건을 팝니다.”

오기오는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곁에 있는 유표와 청오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손으로는 검병을 잡고 있었다. 그만큼 남자가 발산하는 강렬한 살기에 압도당해 있는 것이다.

“그럼 지금 서역으로 가는 건가?”

“아닙니다. 우리는 중원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잘됐군!”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오기오는 자신이 잘못 대답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 신세를 지지.”

“…….”

안 된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남자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으니까.

마치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은련상단의 주인인 조수광은 오기오 등이 데려온 괴인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이자는?”

“사정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은 가까운 마을까지 저희와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조수광의 미간이 골이 패였다.

그는 오기오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절박한 빛을 보았다. 오기오는 그만큼 간절한 눈으로 조수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알겠네.”

결국 조수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조수광의 허락이 떨어지자 오기오가 분주해졌다.

“청오는 이분이 입을 만한 옷 한 벌을 가져오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기오가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문득 그의 시선이 행렬 중간에 있는 짐마차에 멈췄다.

그가 손가락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대협은 저 마차를 타고 가시면 됩니다.”

“으음!”

오기오와 함께 온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남자가 발산하던 살기는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마치 스스로 갈무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덕에 지금은 이상해 보일지언정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조수광을 비롯해 상인들은 오기오 등이 남자에게 왜 그렇게 쩔쩔매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남자는 청오가 가져온 옷을 들고 오기오가 가리킨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으음!”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마차의 주인, 방우광이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천 쪼가리로 국부만을 가린 모습도 기괴했지만, 남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독특하면서도 거친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수석 보표인 오기오가 데려온 남자였다. 일개 숙수에 불과한 그가 거절을 할 수는 없었다.

“짐칸이라도 괜찮다면 그곳에 타시구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의 짐칸에 올라탔다.

“안녕하세요.”

그를 맞이한 이는 바로 방진보였다.

방진보는 겁도 없이 기괴한 분위기의 남자를 보며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헤헤! 제 이름은 방진보예요. 그냥 진보라고 불러 주세요. 아저…… 형 이름은요?”

방진보의 물음에 남자가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기라도 하듯이.

잠시 후 마침내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담호. 내 이름은 담호다.”

***

방진보는 눈을 빠끔히 뜬 채 마차에 누워 있는 담호를 바라보았다. 담호는 팔베개를 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미칠 것처럼 푸르렀다.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푸른 하늘인지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쁘지 않았다.

설렐 만도 하건만 심장이 돌덩어리로 변한 것인지 무덤덤했다. 마치 감정이란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문득 방진보의 시선이 느껴졌다. 방진보는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그를 훔쳐보고 있었다.

담호가 잠시 입안을 침으로 축였다.

너무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고 지내다 보니 이젠 입을 열기 위해선 상당한 준비를 해야 했다.

마침내 담호의 입술을 비집고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교를 아느냐?”

“마교요?”

방진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만큼 놀란 것이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봉두난발 속에 가려진 담호의 눈이 빛났다.

“마교가 멸망한 지 얼마나 되었느냐?”

방진보가 대답하지 못하고 아비를 바라봤다. 마교라는 단어를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정확히 그들이 언제 어떻게 멸망했는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들의 눈빛을 받은 방우광이 대신 대답했다.

“내가 알기론 삼십 년이 넘었소. 정확히는 삼십이 년 정도 될 거요. 그런데 그건 왜 묻소?”

“…….”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내가 천금마옥에 갇힌 지 십이 년이나 지났단 말인가?’

그의 어깨에 잔경련이 일어났다.

기껏해야 오륙 년 정도라고 생각했었다. 인생에서 그 정도의 공백은 있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려 십이 년이었다. 강산이 한 번을 바뀌고도 이 년이나 남을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열여덟 살에 이곳으로 왔으니 지금 그의 나이 딱 서른이었다. 인생의 거의 절반을 저 시커먼 암동 속에서 보낸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황금기라는 이십 대가 그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크흐흐!”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의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방진보와 방우광 부자는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히히힝!

짐마차를 끄는 말들이 갑자기 미친 듯이 날뛰었다.

“크윽!”

무공을 익힌 보표들조차 심맥이 진탕되어 급히 내공을 끌어 올려야 했다.

“대, 대협! 진정을…….”

견디다 못한 오기오가 부탁을 하자 담호가 웃음을 멈췄다.

“휴우!”

그제야 곳곳에서 안도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중에는 담호가 탄 마차의 주인인 방우광과 방진보도 있었다.

두 사람의 안색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어 있었다. 설마 자신의 마차에 태운 괴인이 이렇게 가공할 살기를 발산하는 자일 줄은 몰랐다.

‘내가 사신(死神)을 태웠구나.’

방우광이 울상이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짐마차에 담호를 밀어 넣은 오기오를 원망했다.

담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눈에 조금만 힘을 줘도, 웃어도 살기가 흘러나왔다. 십이 년 동안 고립된 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만마고에 있던 마공을 익힌 영향인지는 담호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의 사람들은 달랐다.

호랑이는 양 떼를 신경 쓰지 않지만 양 떼는 호랑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들 역시 담호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디서 이런 마두가? 우리가 재앙을 만났구나.’

조수광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이런 재앙을 데려온 오기오를 원망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니 오기오도 별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아무리 오기오가 은련상단의 수석 보표라고 하지만 강호의 이름 높은 고수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손색이 있었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나 분위기는 오기오를 압도하고 있었다. 아마 은련상단의 보표들이 모두 덤비더라도 담호의 상대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저 담호가 한시라도 빨리 떠나길 빌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달리 담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담호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형, 일어나세요.”

누군가 그를 흔들고 있었다. 눈을 뜨자 방진보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식사하세요.”

“식사?”

담호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평지 한가운데 마차들이 둥글게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잠든 사이 조수광은 노숙할 것을 결정했다. 사람들은 담호가 깰세라 조심스럽게 노숙할 준비를 했다.

방우광 부자도 그런 사람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조용히 음식을 준비했다.

화덕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담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담호는 그들의 눈에 담긴 두려움을 보았다.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대상은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은 그들에게 위협을 줄 생각이 없는데, 그들은 자신을 위협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담호가 방진보에게 말했다.

“내 식사는 따로 가져다 다오.”

“그냥 같이 드시지 않구요?”

“여기가 편하다.”

“알겠어요.”

방진보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화덕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커다란 나무 그릇에 갓 만든 음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랑 아버지가 만든 거예요. 많이 드세요.”

“고맙구나.”

담호가 그릇을 받아 들었다.

순간 매콤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밥 위에 돼지고기 볶음을 올렸어요. 사천식으로 맵게 했으니 조심하세요.”

“…….”

“헤헤! 제가 만든 거니까 맛이 없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담호가 방진보를 바라보았다. 방진보는 언제 담호에게 겁을 집어먹었냐는 듯이 웃고 있었다.

담호가 수저를 들어 밥과 돼지고기 볶음을 같이 떴다.

손이 떨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밥과 돼지고기를 입안으로 가져갔다. 입안 가득 돼지고기의 달콤한 육즙이 퍼져 나갔다.

“어때요?”

방진보의 기대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진보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하게 변했다.

“맛없어요?”

“아니, 맛있다.”

“우와! 정말인가요?”

“정말이다.”

담호의 눈가가 떨렸다.

맛이 없을 리가.

무려 십이 년 만에 맛보는 따뜻한 음식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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