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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8화 (2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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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1장. 누구나 홀로 서야 할 때가 있다(3)

담호는 침상에 누웠다. 하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잠을 제대로 안 잔 지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비록 야명주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하 공동 전체를 밝히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다 보니 밤과 낮이 구별 안 돼 경계선 자체가 희미해졌다.

이젠 잠을 자도 좋았고, 자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꼭 잠을 자지 않더라도 알아서 피로가 풀리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반드시 가부좌를 튼 채 운공을 해야 했지만, 지금은 가만있어도 절로 운기가 되었다.

이렇게 된 게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중천심결은 새로운 길을 찾았다. 마교의 심법을 공부하면서 그 영향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지금 중천심결은 원류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화했다.

그것이 진보인지, 퇴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심법이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었다.

담호는 새로운 심법에 암혼심공(暗魂心功)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둠 속에서 만들어졌기에 그렇게 지은 것이다.

암혼심공으로 쌓은 내공은 무거우면서도 어두운 성질을 가졌다. 그리고 담호가 따로 운공을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움직여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잠을 자도, 움직여도, 심지어는 먹을 때도 절로 내기가 쌓이는 샘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암혼심공은 스스로 움직여 내기를 쌓고 있었다.

담호는 팔베개를 한 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가 졌기에 방 안 또한 어두웠다. 천장도 시커멨다. 하지만 담호의 눈에는 대낮처럼 밝게 보였다.

같은 어둠이라도 지하 공동의 어둠과 바깥세상의 어둠은 달랐다. 바깥세상의 어둠이 가벼운 느낌이라면 지하 공동의 어둠은 한없이 무겁고 음습했다. 마치 암혼심공처럼.

“사부.”

문득 담호의 입술을 비집고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음성엔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바깥세상에 나온 이후 처음으로 인간다운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사부를 생각하면 항상 가슴 한쪽이 아려 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화산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래서 현소 진인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사부는 일진광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 화산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먼저 확인해야 했다. 과연 자신이 세상의 거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힘이 있는지.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설 수 있을지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담호는 결국 잠 한숨 자지 않고 식당으로 나왔다.

점소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쪽에서 나왔으니 손님이 분명한데, 어제 그와 같은 손님을 받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

어제 받은 손님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칼과 가위를 가져다준 것이 기억났다.

“설마…….”

“나다.”

“정말이셨군요. 이렇게 잘생긴 줄 몰랐습니다.”

“식사는?”

“아, 예! 미리 준비해 놓았으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담호가 탁자에 앉자 점소이가 재빨리 주방을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는 음식이 든 쟁반이 들려 있었다.

“양꼬치 하고 밀전병, 양고기로 만든 화과에요. 제법 드실 만 할 거예요.”

점소이가 탁자에 음식을 내려놓고 가려는 것을 담호가 붙잡았다.

“이곳에서 중원까지는 얼마나 걸리느냐?”

“혼자 가시려구요?”

“그래.”

“쉽지 않으실 텐데요.”

“못 갈 이유라도 있느냐?”

“요즘 마적이 기승이라고 합니다.”

“마적?”

“예!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소규모 상단이나 여행자들을 약탈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해가 극심하다고 하네요. 손님도 혼자 가실 생각하지 마시고, 일행을 더 구하세요. 그나마 여럿이 몰려가야 더 안전할 테니까요.”

“알았다.”

“잘 생각하세요. 열흘이나 되는 거리를 혼자 가려면 고초가 보통이 아닐 테니까요.”

“열흘이라…….”

담호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겼다.

“그래도 정히 혼자 가시고 싶다면 시장으로 가 보세요. 노숙에 필요한 물건들을 팔 테니까요. 보자, 뭐가 있나? 모래바람을 피하려면 피풍의가 필요하겠고, 건량도 있어야겠고……. 아, 타고 갈 말도 있어야겠다.”

점소이가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것을 들으며 담호는 식사를 마쳤다.

토로번은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도시였다. 중원과 서역의 문물이 뒤섞여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냈고, 그 때문에 이국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한족과 이족, 회족이 뒤섞여 살아가는 토로번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녹주를 중심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주 장을 연다.

그 규모가 제법 크기에 잘만 뒤져 보면 꽤나 쓸모 있는 물건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점소이의 말이었다. 그러면서 물건의 시세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해 주었다.

담호는 점소이의 말을 똑똑히 기억한 후 밖으로 나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북적이고 있었다. 흥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담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어려선 한적한 산골에 살았었고,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도가문파인 화산파에서 자랐다. 그리고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인적이라곤 없는 지하 공간에서만 살았던 그에겐 이처럼 시끄러운 풍경은 꽤나 이질적인 것이었다.

담호는 잠시 길 한가운데 멍하니 서서 움직일 줄 몰랐다.

이젠 그를 구속하는 것도, 막아선 벽도 없었다. 그런데도 담호는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에 홀로 던져졌다.

부모도, 사부도 없었다.

이제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일어서야 했다.

발을 내디뎌야 했다.

담호는 세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바로 점소이가 알려 준 시장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좌판을 깔고 흥정을 벌이는 곳.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는 그곳으로.

“자, 중원에서 들여온 질 좋은 비단옷입니다.”

“서역에서 들여온 향신료입니다.”

상인들의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담호는 그들 사이를 걸었다.

살기가 발산되지 않도록 억제를 하고, 눈빛에서도 힘을 빼도록 노력했다. 그래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강렬했지만, 사위를 짓누르던 위압감은 많이 사라졌다. 그 때문에 그의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들이 좌판에 가득 널려 있었다. 상인들의 말처럼 고급스러워 보이는 비단도 있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항아리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서역의 기형도를 팔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각종 장신구를 팔기도 했다.

담호는 그 모든 것들을 눈에 담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담호의 눈에 짐승의 가죽들로 만든 옷을 판매하는 상인의 모습이 보였다.

담호의 눈길을 끈 것은 상인이 내놓은 옷들 중 유독 검은 장포였다. 마치 피풍의처럼 품이 넉넉하면서도 목까지 올라온 깃이 인상적이었다.

담호의 발길이 좌판으로 향했다. 그러자 상인이 반색을 했다.

“어서 오시구려.”

“이것들도 파는 건가?”

“당연하지요. 어떤 것을 사시려고 하십니까?”

담호는 말없이 검은 장포를 집어 들었다.

“안목이 대단하시군요. 대웅의 가죽으로 만든 것입니다. 가죽을 이어 붙인 곳 없이 통째로 만든 것이라서 무척 튼튼합니다. 아마 어지간한 도검은 들어가지도 않을 겁니다.”

상인 특유의 과장된 표현이 섞여 있었지만,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것이 굉장히 튼튼할 것 같았다.

“값은?”

“에…… 그러니까.”

상인의 눈에 살짝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담호가 집은 검은 장포는 정말 곰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튼튼하기 그지없었지만, 불행히도 이곳은 사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누구도 곰 가죽으로 만든 답답한 옷을 입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헐값으로 내놓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막상 담호가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보니 욕심이 생겼다.

“은자 열 냥…….”

“…….”

담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상인이 마치 얼음처럼 얼어붙고 말았다.

‘무, 무슨 눈이…….’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을 보는 것처럼 깊고 검은 눈동자, 그 속에는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부르르!

자신도 모르게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올라왔다.

무서웠다.

상인은 급히 말을 바꿨다.

“다, 다섯 냥만 주십시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거면 되나?”

“네! 물론입니다.”

담호는 흥정할 생각도 하지 않고 품에서 은자를 꺼내 상인에게 건넸다.

담호는 검은 가죽 장포를 몸에 걸쳤다.

마치 원래부터 그의 치수를 알고 맞춘 것처럼 딱 맞았다. 그런 담호의 모습에 잠시 얼어붙어 있던 상인이 탄성을 내뱉었을 정도였다.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손님.”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꼭 상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곰의 가죽으로 만든 장포는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겉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장포 안쪽에는 주머니가 많이 달려 있어 수납이 용이했다.

담호는 전표와 은자를 모두 안쪽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담호는 내친김에 상인에게서 가죽으로 만든 가방도 하나 샀다. 품이 넉넉한 것이 제법 많은 짐이 들어갈 것 같았다.

담호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건량을 사서 가방에 채워 넣었다. 가방이 제법 묵직해졌다.

점소이에게서 이미 이야기를 들었기에 대략의 가격은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담호가 알고 있는 시세보다 높게 불렀다. 하지만 담호는 굳이 그들과 흥정을 하지 않았다.

흥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고, 가지고 있는 돈이 부족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담호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시장 가장 외곽에 있는 가축 시장이었다.

이곳엔 없는 동물이 없었다.

닭, 개처럼 조그만 동물은 물론이고 말과 소, 낙타까지 세상의 모든 동물이 다 이곳에 있는 것 같았다.

가축 시장에 들어서자 동물들의 배설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담호도 강렬한 자극에 잠시 코끝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내 적응을 하고 시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들은 가축 시장 가장 안쪽에 있었다. 말들의 종류도 많았다.

어떤 놈은 무척 컸고, 또 어떤 놈은 털이 타는 듯 붉기도 했다. 상인들은 저마다 자신이 가진 말이 명마라고 떠들며 담호를 붙잡았다.

하지만 담호는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말들의 울음소리가 어지럽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러다 문득 담호의 걸음이 멈췄다.

그가 입은 장포처럼 새까만 놈이 있었다. 다른 말들처럼 투레질을 하지도 않고, 흥분하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는 놈.

덩치도 그리 크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다른 말들이 놈의 곁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담호가 검은 말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검은 말이 콧김을 뿜으며 담호에게 다가왔다.

푸르르!

검은 말이 접근하자 근처에 있던 다른 말들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놈이 담호를 빤히 바라봤다.

그 눈빛이 사뭇 차가웠다. 도저히 말의 눈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담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놈의 도전적인 눈빛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담호의 눈에 순간적으로 스산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자 검은 말이 움찔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 놈이 형장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구려. 이런 적은 처음인데.”

머리에 조그만 모자를 쓴 뚱뚱한 회족(回族) 남자였다.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담호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시오, 나는 이 녀석의 주인인 등원이라 하오. 이 녀석이 마음에 드시오?”

담호가 회족 상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회족 상인이 씨익 웃었다.

“그런가 보구려. 싸게 줄 테니 사시구려.”

“…….”

“사실 저놈이 꽤나 골칫거리라오. 평원에서 뛰노는 것을 어찌어찌 잡아는 왔는데 길들여지지도 않고, 사람을 태우지도 않으니 참으로 골치가 아프다오.”

“얼마지?”

“오! 호탕하신 분이구려. 좋소! 내 인심 써서 은자로 오백 냥만 받겠소. 이 정도면 헐값이나 다름없소.”

회족 상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담호가 주머니에서 전표 다섯 장을 꺼내 던져줬다.

“됐지?”

“허! 흥정도 하지 않고?”

회족 상인의 표정에 아깝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상대가 이렇게 흔쾌히 셈을 치를 줄 알았다면 더 불러도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말처럼 검은 말은 골칫덩이였다. 말이 사람을 태우지 않으니 도저히 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그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이들은 꽤 되었지만 검은 말은 누구도 태운 적이 없었다. 그만큼 성질이 고약했다.

그런데 담호는 말에 타 보지도 않고 흔쾌히 셈을 치렀다. 회족 상인 입장에서는 충분히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회족 상인은 이내 생각을 바꿨다.

‘저 마귀 같은 말이 또 거부하면 돈을 돌려 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쐐기를 밖을 셈으로 말했다.

“여기 안장도 줄 테니 어서 타고 가시구려. 그 말은 이제 형장 것이오.”

회족 상인은 한쪽에 걸려 있던 말안장을 검은 말의 등에 올리고 물러났다.

담호는 검은 말의 목덜미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러자 검은 말이 기분 좋은지 연신 투레질을 했다.

담호가 단숨에 검은 말의 등에 올라탔다. 회족 상인은 나가떨어질 담호를 기대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검은 말은 너무나 얌전히 있었다. 마치 진정한 주인을 만났다는 듯이.

“이럴 수가!”

회족 상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담호는 검은 말의 목덜미를 두들기며 말했다.

“네 이름은 흑귀(黑鬼)다. 검은 귀신.”

히힝!

검은 말이 알아들었다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검은 말은 검은 귀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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