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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2장. 은혜도 원한도 잊지 않는다(1)
다음 날 담호는 새벽 일찍 객잔을 나섰다.
히힝!
마구간에 홀로 있던 흑귀가 반갑다는 듯이 투레질을 했다. 담호는 흑귀의 등에 안장을 올린 후 밖으로 끌고 나왔다.
토로번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다.
담호는 잠시 방향을 가늠한 후 흑귀에 올라탔다.
오랫동안 마구간에 갇혀 있었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 흑귀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질주했다.
‘너도 답답했구나. 나처럼.’
담호는 흑귀의 마음을 이해했다.
드넓은 평원을 마음껏 뛰놀던 녀석이 비좁은 마구간에 갇혀서 지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흑귀는 검은 바람이 되었다. 담호는 그런 흑귀와 한 몸이 되었다.
빠르게 주위의 풍경이 가까워지고, 또 멀어졌다. 황량한 황야가 나타나고, 저 멀리 보이던 산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담호는 흑귀가 지칠 때까지 달리도록 놔두었다. 지치면 스스로 멈출 것이다.
담호는 흑귀에 몸을 맡긴 채 바람을 느꼈다.
십이 년 만에 느끼는 따스한 빛과 바람이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담호는 시간의 흐름마저 잊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담호는 갑자기 속도가 현저히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흑귀가 지친 것이다.
“그래, 조금 쉬자꾸나.”
담호는 쉴 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마침 저 멀리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바위 밑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담호는 흑귀를 바위가 있는 곳으로 몰았다.
바위에 다가간 순간 담호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코끝에 지독한 혈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위에 가까워지자 혈향은 더 짙어졌다. 바위 밑 그림자 아래 수십여 구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났는지 시신들은 벌써 부패하면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담호가 흑귀에서 내려 시신들에게 다가갔다. 구역질이 나올 만큼 처참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시신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당한 채였다. 여기저기 상처들이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담호가 한 시신의 상처를 유심히 살폈다.
“가지고 놀았군.”
즉사할 만큼 깊은 상처는 하나도 없었다.
이들을 죽인 자들은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전신에 상처를 냈다. 그리고 고통 속에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문득 점소이의 말이 떠올랐다.
“마적인가?”
담호는 그대로 일어나려 했다.
이들이 마적에게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으으!”
시신들 속에서 미약한 신음성이 들려왔다.
담호는 다른 시신들을 들추고 신음을 흘리는 자를 꺼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담호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가슴부터 배까지 길게 갈라진 채 신음을 흘리고 있는 남자는 그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방우광, 바로 방진보의 아비였다.
내장이 보이는 끔찍한 상처를 입고도 방우광은 숨을 끈질기게 이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담호는 알고 있었다. 이제까지 버틴 것도 천운이었다.
담호가 그제야 주위에 널려 있는 시신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아는 얼굴들이 몇 명 보였다.
은련상단에 소속된 이들이었다. 담호는 어떻게 된 사정인지 알아차렸다.
담호는 방우광에게 내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잠시나마 혈색이 돌아왔다.
방우광이 힘겹게 눈을 떴다.
그가 담호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입술을 겨우 열었다.
“다, 당신은?”
“남길 말은?”
“무슨…….”
“알고 있을 거야. 그리 오래 살수 없다는 것을.”
“크흑!”
순간 방우광의 뺨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담호는 그런 방우광을 보며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조금이나마 정신을 수습했는지 방우광이 담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담호를 향한 방우광의 눈빛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
“진보가 마적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제발 진보를…… 내 아들을 구해 주십시오.”
“…….”
“대협, 제발 부탁……. 나는 그 아이를…….”
방우광이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담호의 손을 잡았다. 죽어 가는 사람의 손아귀 힘이 묵직했다.
그 절절함이 손을 타고 담호에게 전해졌다.
그의 입술이 물고기처럼 끔뻑거렸다.
“대협, 제발…….”
담호는 자신 역시 그런 눈빛을 본 적이 있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 마을이 습격을 당했을 때 자신의 아비 역시 방우광 같은 눈빛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그땐 자신의 아비가 죽고 난 후 화산파의 도사들이 찾아왔다는 것이고, 방우광은 숨이 끊어지기 전에 자신을 만났다는 것뿐이다.
담호의 입술을 비집고 거칠고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살아 있다면.”
“가, 감사……. 부디…….”
방우광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의 목소리처럼 몸 역시 싸늘히 식어 갔다.
담호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서 생기도 사라져 갔다. 하지만 그 절박함만은 그대로였다.
담호는 손을 뻗어 방우광의 눈을 감겨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수많은 이들의 시신이 한데 뒤엉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담호는 또 하나의 익숙한 얼굴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오기오.”
은련상단의 수석 보표이자, 자신을 은련상단의 행렬에 넣어 주었던 남자였다. 그의 곁에는 은련상단의 주인인 조수광이 길게 혀를 내민 채 죽어 있었다.
얼마나 원통한지 그들은 죽어서도 눈조차 감지 못했다. 담호는 빛이 사라진 그들의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생명의 불씨가 꺼진 눈은 그 이상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담호는 말없이 그들의 공허한 눈을 바라보았다. 마치 대화를 하듯이.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담호가 그들의 눈을 감겨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호는 흑귀의 등에 올라탔다.
잠시 동안 쉬어서 그런지 흑귀는 다시 힘차게 투레질을 했다. 그 모습 어디서도 지친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자.”
흑귀가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갔다.
***
방진보의 두 눈은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진보는 나무로 만든 조그만 틀 안에 갇혀 있었다. 마치 짐승들을 잡아넣는 우리 같았다.
우리에 갇힌 이는 비단 방진보만이 아니었다. 은련상단의 상인들 중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이 방진보와 같은 신세였다. 그 수가 무려 오십여 명에 달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조리 죽었다. 상단주인 조수광은 물론이고 방진보의 아비까지도.
조수광은 마적의 습격을 우려해 다른 상단과 함께 길을 떠났다. 두 개의 상단. 무려 백오십여 명에 이르는 인원이라면 마적 떼들도 건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틀렸다.
마적 떼들은 두 개의 상단이 연합했음에도 전혀 겁내지 않고 쳐들어왔다.
오기오가 이끄는 보표들이 분전을 했지만 백여 명이 넘는 마적들을 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보표들은 모조리 몰살을 당했고, 수많은 상인들이 죽었다. 그 모든 광경을 두 눈으로 봐야 했던 방진보였다.
마적들은 공터 중앙에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 놓고 회포를 푸는 중이었다. 한쪽 바닥에는 상단에서 빼앗은 물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모닥불 앞에 덩치가 큰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모닥불에 어린아이 주먹만 한 야명주를 비춰 보았다.
“흐흐! 운수 대통했군. 이런 상질의 묘안석이라니.”
상단에서 약탈한 물건들 전체를 합쳐도 이 묘안석의 십분지 일도 값어치가 되지 않는다.
오늘은 그가 이곳에서 약탈을 시작한 이래로 최고의 날이었다.
그의 이름은 동자추, 서역과 중원을 횡단하는 상인들을 주로 약탈하는 혈랑대(血狼隊)의 대주였다.
혈랑대는 한족과 회족, 그리고 여러 이족이 섞여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공이 강하다는 것과 한군데 정착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토로번 일대를 떠돌면서 약탈을 했다. 사람은 죽이고, 물건은 빼앗아 처분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술을 마시고, 계집을 사서 즐겼다.
한동안 묘안석을 만지작거리던 동자추가 옆에 있던 수하에게 물었다.
“그들은?”
“연통을 넣었으니 곧 이쪽으로 출발할 겁니다. 두세 시진 안에는 도착할 겁니다.”
“그래? 그럼 그때까지 뭐하고 지낸다?”
동자추의 눈이 불빛에 번들거리며 위험하게 빛났다.
문득 그의 시선이 우리에 갇힌 사람들을 향했다.
“저놈들을 끌고 와.”
“왜 그러십니까? 대주.”
얼굴이 부엉이를 닮은 부대주 조복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동자추가 씨익 웃었다.
“심심하잖느냐.”
“아!”
조복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우리로 달려가 갇힌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빛을 받은 사람들이 고개를 움츠렸다.
“우리한테 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물건도 빼앗았으니 우리를 보내 주시오.”
몇몇 사람들이 애원을 했지만 조복은 귓등으로 그들의 말을 흘리며 말했다.
“이 녀석하고 이 녀석을 꺼내.”
“예! 부대주.”
부하들이 조복이 지목한 사람들을 우리에서 꺼냈다. 삼십 대 초반의 장한과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조복과 부하들이 장한과 청년을 동자추 앞에 내던졌다.
두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동자추 앞에 엎어졌다. 동자추가 그런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의 운명을 알고 있느냐?”
“무슨?”
장한이 발작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은련상단과 함께한 상단의 상인이었다.
심약해 보이는 청년은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그런 청년의 귀로 동자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있으면 어떤 사람들이 올 거야. 나는 너희들을 그들에게 노예로 팔 생각이다.”
“그럴 수가!”
장한과 청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동자추는 그런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며 즐겼다.
“노예로 팔려 가면 두 번 다시 햇빛은 볼 수 없을 거야. 그들이 데려간 이들 중 살아남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다.”
동자추의 말이 끝나자마자 곁에 있던 조복이 두 사람에게 각각 검 한 자루를 던졌다.
영문을 모르는 두 사람이 눈만 끔뻑거렸다.
“싸워라. 이기는 놈은 자유롭게 풀어 주겠다. 흐흐!”
“흐흐흐!”
곳곳에서 음소가 터져 나왔다.
혈랑대 마적들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들만의 여흥이었다.
자유를 대가로 피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보며 즐기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쾌감 중 하나였다.
평생 검 한 번 잡아 보지 않은 평범한 이들의 싸움은 꽤나 치열한 편이었고, 무인들 간의 싸움과는 다른 쾌감을 선사했으니까.
장한이 발작적으로 고개를 들어 동자추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정말입니까?”
“물론이다. 네가 이긴다면 너를 풀어 준다. 반대로 네가 진다면 저 녀석을 풀어 줄 것이다. 어때? 이 정도면 충분히 싸울 이유가 될 것 같은데.”
장한의 눈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난 노예로 평생을 보내고 싶지 않다고.’
집에 그를 기다리는 마누라와 자식이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장한이 검을 쥐어 잡았다. 그의 눈에는 독기가 떠올라 있었다. 반대로 청년은 벌벌 떨고 있었다.
“나, 난 못 해요.”
“흐흐! 그러면 지금 죽는다.”
“그런…….”
청년의 뺨 위로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촹!
조복이 검을 꺼내 청년의 목에 댔다.
“검을 잡아라, 겁쟁이 녀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