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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2장. 은혜도 원한도 잊지 않는다(2)
청년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누가 봐도 청년이 싸울 만한 상태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방진보가 그런 청년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청년은 그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소차명, 그것이 청년의 이름이었고, 그래도 방진보를 살갑게 챙겨 주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형!”
방진보가 소차명을 불렀다. 하지만 소차명은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장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한의 이름은 금주상, 소차명과는 개인적으로 형 동생 하던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 소차명을 바라보는 금주상의 눈에는 예전의 따스함이나 사적인 정리 따윈 담겨 있지 않았다.
소차명을 죽여야 자신이 산다.
지금 금주상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금주상이 소차명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으으!”
소차명은 겁을 집어먹었으면서도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금주상의 공격을 막았다.
촤앙!
검 부딪치는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와하하!”
“난 나이 많은 놈에게 돈을 걸겠다.”
“에이! 그러면 내기가 안 될 것 같은데. 저 젊은 놈은 너무도 부실해 보이잖아.”
“좋아! 내가 젊은 놈에게 은 한 냥을 걸겠다.”
혈랑대의 마적들이 웃고 떠들며 내기를 했다.
금주상과 소차명의 목숨은 그렇게 누군가의 여흥이 되었다.
“저, 잔인한 놈들!”
“형!”
우리에 갇힌 사람들과 방진보가 지옥 같은 광경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불과 한나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형, 동생 하며 살뜰하게 챙겨 주던 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광경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말도 안 돼. 왜 이런 일이…….”
방진보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가 알던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가 속하고, 그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세상이.
아비가 죽고, 그의 지인들이 목숨을 걸고 서로 싸우고 있었다.
“이건 꿈이야. 꿈일 거야.”
방진보가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맨 정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풍경에 방진보는 현실을 도피하고 있었다.
서걱!
“아악!”
금주상의 검이 팔목을 훑고 지나가자 소차명이 큰 비명을 질렀다. 팔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혈할 사이도 없이 금주상이 다시 공격하고 있었다.
“죽어! 제발 죽어 줘! 차명아.”
금주상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소차명이 소리쳤다.
“주상이 형, 나에게 어찌 이런단 말이오?”
“미안하다. 하지만 나에겐 가족이 있다.”
“나도 고향에 가면 처자식이 있소.”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했잖느냐.”
금주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이 악귀나 다름없었다.
마적들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거봐, 나이 든 놈이 더 낫지 않느냐?”
“제길!”
소차명은 이미 혈인이나 다름없었다.
어깨와 복부에도 깊은 자상을 입고 비틀거리고 있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금주상이 소차명을 향해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으아아아!”
그의 절규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고, 소차명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금주상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제기랄! 제기랄!”
손이 덜덜 떨렸다.
제 손으로 아우라고 부르던 자를 죽였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제야 금주상은 자신이 한 짓을 깨닫고 바닥에 엎어져 엉엉 울었다.
“미안하다, 차명아. 미안하다. 으허헝!”
그가 피가 묻은 손을 바닥에 벅벅 문질렀다. 그래도 피 냄새가 지워지지 않았다.
“쯧! 재미없군.”
동자추가 혀를 찼다.
그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 어려 있었다. 조금 더 재밌는 싸움을 원했는데 너무 일방적으로 금주상이 이겼기 때문이다.
그가 조복을 바라봤다. 그러자 조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사람들이 갇혀 있는 우리에 다가갔다.
사람들의 그의 시선을 분분히 피했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친인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금주상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서러운지 자신들의 가슴이 다 찢어지는 것 같았다.
‘씨발! 저러고 싶지 않아.’
‘난 저렇게까지 해서 살지는 않을 거야.’
그들은 조복의 선택을 받길 원치 않았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잔인하게도 그들의 염원을 외면했다.
“이 녀석하고 이 녀석을 끌어내.”
이번에 조복이 지명한 이는 사십 대 초반의 상인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은련상단에 속한 이들로 평소에도 매우 돈독한 교분을 나누는 사이였다.
조복은 이번에도 그들에게 검을 던졌다.
“흐흐! 싸워라.”
“이 간악한 놈들! 나는 절대로 네놈들의 여흥거리가 되지 않겠다.”
상인 중 그래도 강직한 성격을 가진 염평이 조복을 노려봤다. 그러자 조복이 혀를 차며 다른 이를 바라봤다.
상인 주설천도 고개를 저었다.
“나도 죽었으면 죽었지. 이런 인간 같지 않은 짓은 못 한다.”
두 사람이 의외로 강하게 나오자 조복이 난감한 표정으로 동자추를 바라보았다.
동자추가 웃었다.
“흐흐흐! 제법 사내다운 놈들이구나. 그래, 가끔은 그런 놈들도 세상에 있는 법이지.”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마적들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동자추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이한 열기가 어려 있었다. 그들은 이다음에 일어날 일을 상상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 자식들이 감히 우리의 여흥을 거부하다니.”
“흐흐! 과연 대주가 놈들을 어떻게 죽일까?”
“단숨에 목을 베어 버린다는데 은 한 냥 걸지.”
“그럼 난 죽도록 팬다는 데 은 한 냥을 걸겠다.”
단숨에 도박판이 벌어졌다.
마적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고, 우리 안에 갇힌 사람들은 더욱 겁에 질렸다.
시끄러운 목소리에 정신이 든 방진보가 고개를 들었다.
상인들을 향해 동자추가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동자추의 얼굴은 마치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흐흐! 감히 너희들 따위가 내말을 거역한단 말이지?”
“이것이 인간이 할 짓이오? 다른 이도 아닌 친인들에게 서로 칼을 쥐여 주고 싸우라니.”
“그래서 못 하겠단 말이지?”
“죽어도 할 수 없소.”
염평이 대차게 나왔다.
은련상단의 상인들 중에서도 유독 강단이 있다고 알려진 염평이었다. 그는 동자추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염평의 당찬 눈빛에 움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상대는 다름 아닌 동자추였다.
혈랑대의 대주로 수년간 이곳에서 마적질을 해 온 그가 겨우 염평의 눈빛 정도에 기가 죽을 이유가 없었다.
“제법 대가 세구나. 그래서 못 싸우겠다고?”
“그렇소!”
“그럼 죽어야지.”
동자추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쾅!
“커헉!”
순간 염평이 동자추의 커다란 주먹에 관자놀이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염평이 게거품을 물며 푸들거렸다.
동자추가 그런 염평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강단이 있는 것은 좋은데, 그것도 사람을 봐가면서 해야지. 흐흐!”
동자추가 염평과 눈을 맞췄다.
염평은 이미 인사불성이었다. 그래서 동자추와 눈을 맞출 수도 없었다. 하지만 동자추는 억지로 염평의 턱을 치켜들었다.
“주제도 모르고 나댔다는 것. 그것이 네가 죽어야 할 이유야.”
“나는…….”
퍼억!
동자추의 주먹질에 염평의 고개가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넘어지지도 못했다. 동자추가 여전히 다른 손으로 멱살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자추가 다시 주먹질을 했다.
평범한 이도 아니고 무공을 익힌 이의 주먹이다. 흉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퍼억! 퍼억!
동자추의 주먹이 연이어 염평의 얼굴에 작렬했다.
살이 찢기고 피가 튀었다. 얼굴이 금세 퉁퉁 부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염평은 이미 정신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동자추는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감히! 너 따위가…….”
동자추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미친개와 같은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그것은 내기를 하던 마적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적들은 동자추의 눈이 돌아갔음을 직감했다. 이럴 때 동자추를 건드렸다가는 어떤 재앙이 찾아올지 잘 알고 있었다.
“그만 하시오. 제발!”
보다 못한 주설천이 동자추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동자추는 꿈쩍도 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의 폭력이 끝난 것은 염평이 더 이상 반응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털썩!
염평은 마치 잘 다져진 고깃덩이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망가져 있었다. 가슴의 미미한 기복이 그가 아직 숨이 붙어 있음을 말해 줄 뿐, 그 어떤 생명의 징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동자추가 살기 어린 눈을 희번덕거리며 우리에 갇힌 사람들을 돌아봤다.
“내말을 거역할 놈이 또 있느냐?”
“…….”
모두가 숨을 죽였다.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할 배짱이 있을 리 만무했다.
“흐흐흐!”
동자추의 웃음소리가 사람들의 심장을 후벼 팠다. 그에 사람들의 고개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동자추의 시선이 우리에 갇힌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멈춘 곳은 바로 방진보가 갇힌 우리였다.
“저 뚱보를 끌어내.”
“예!”
수하들이 방진보를 우리에서 끌어내 동자추 앞으로 데려왔다.
동자추가 방진보를 보며 히죽 웃었다.
“뚱보야, 살고 싶으냐?”
“네! 살고 싶어요.”
방진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동자추가 방진보의 손에 검을 들려줬다.
“그럼 저 녀석을 죽이거라.”
동자추가 가리킨 이는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염평이었다.
“나, 난 못 해요.”
“못 하면 죽는다.”
“어떻게 사람을…….”
“흐흐! 저 고깃덩이가 네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겠지? 죽여라. 그럼 네가 살 수 있다.”
동자추가 히죽 웃었다.
방진보는 그런 동자추의 얼굴에서 마귀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동자추가 방진보의 검을 쥔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염평을 향해 뻗었다.
“아, 안 돼!”
방진보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버티려 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 방진보가 동자추처럼 무공을 익힌 무인의 완력을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덜덜!
검을 쥔 손이 떨렸다. 하지만 조금씩 염평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제발…….”
방진보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동자추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힘을 주었다.
“와하하!”
“죽여라! 뚱보야.”
“오늘 뚱보가 좋은 경험을 하는구나.”
마적들이 그 광경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장내를 지배하고 있는 지독한 광기에 우리에 갇힌 상인들은 눈물만 흘렸다.
“이곳은 지옥이야.”
모두가 어서 이 지옥 같은 시간이 어서 끝나길 빌었다.
스윽!
방진보가 쥔 검이 염평의 목젖에 닿았다.
이대로 밀어 넣기만 하면 염평의 숨은 끊어지게 된다.
검 끝에 느껴지는 인간의 감촉에 방진보가 몸서리를 치며 눈을 감을 때였다.
쿵!
갑자기 공기 중에 이질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무척이나 나직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건드렸다.
동자추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그가 어둠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쿵! 스르륵! 쿵! 스르륵!
소리가 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