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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1화 (3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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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2장. 은혜도 원한도 잊지 않는다(3)

무언가 바닥을 찍고, 다음엔 바닥을 끈다.

그 소리는 매우 일정한 박자를 가지고 있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에 집중했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집중도는 최고조에 달했다. 사람들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어깨엔 잔경련이 일어났다.

우리에 갇힌 사람들뿐 아니라, 마적들과 동자추의 반응도 똑같았다. 그 소리는 그들의 신경을 기저에서 갉아 대고 있었다.

사각! 사각!

마치 개미가 나무를 갉아 먹듯 소리는 그들의 신경을 갉아 먹고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쿵! 스르륵! 쿵! 스르륵!

소리가 더 선명해지고 나서야 동자추는 그것이 발소리임을 깨달았다.

어둠 너머에서 누군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오른발로 바닥을 찍고, 왼발로 바닥을 끌며 다가왔다. 왼발을 끌 때마다 살짝 어깨가 처졌다.

동자추는 그가 절름발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평상시라면 비웃음을 날리며 단번에 목을 쳤을 것이다. 그는 잠시라도 자신을 놀라게 한 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 잔혹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쿵!

그를 본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꽉 쥔 주먹 위로 굵은 힘줄이 지렁이처럼 돋아 올랐다.

어찌나 꽉 깨물었는지 이빨 사이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음에도 동자추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채 어둠을 일렁이며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어둠을 헤치고 남자의 새하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과 동화된 검은 장포를 입은 탓에 마치 남자의 얼굴만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의 등 뒤로 어둠처럼 검은 말이 따라오고 있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남자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면서도 강렬했다.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주르륵!

마적들의 얼굴에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들은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어둠을 헤치고 나타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자가 대체 누구기에?’

마치 머릿속 전체가 하얘진 것같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만큼 남자의 존재감은 그들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남자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부르르!

그의 눈빛을 받은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마치 도마 위에 오른 생선처럼.

남자의 시선이 멈춘 곳은 동자추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자추의 품속에 안겨 있다시피 한 방진보에게서였다.

방진보의 손에 든 검, 다시 그 손을 쥔 동자추의 손, 그리고 염평의 목젖에 닿아 있는 검.

남자는 한눈에 상황을 알아차린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동자추와 마적들은 숨통을 옥죄어 오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남자가 방진보를 향해 손짓을 했다.

방진보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 역시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남자에게서 친근한 감정을 느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말이다.

“이리 와라.”

처음으로 남자의 입이 열렸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방진보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형!”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 왔던 남자.

봉두난발에 가려 진면목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남자는 바로 담호였다.

담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리 와라.”

탁하면서도 거친 그의 목소리에 동자추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방진보를 품에 거칠게 끌어안았다. 본능이 방진보를 인질로 삼아야 한다고 시키고 있었다.

그가 방진보의 목에 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네놈은 누구…….”

콰앙!

순간 어둠 속에서 뇌성이 울려 퍼지며 동자추의 음성을 집어삼켰다.

마적과 상인들은 갑작스러운 굉음에 고막을 막고 비틀거렸다.

우웅!

이명이 고막을 울렸다.

사물이 막 두세 개로 겹쳐 보이고,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이명이 가라앉고, 사물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완벽하게 시력을 회복했을 때 마적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대, 대주?”

“우웨엑!”

갑자기 마적들이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토악질을 해 댔다. 그것은 우리에 갇힌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으으!”

사람들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방진보를 끌어안고 위협을 하던 동자추의 상체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주인을 잃은 하체뿐이다.

동자추의 상체가 있던 자리엔 담호의 주먹이 자리하고 있었다. 충보에 이은 파성추 한 방에 동자추의 상체가 날아간 것이다.

인간을 상대로 무공을 펼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담호조차도 설마 주먹질 한 방에 인간의 상체가 날아갈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눈앞에 주인을 잃은 동자추의 하체와 영문을 모르는 방진보가 서 있었다.

담호는 방진보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인간은…… 약하구나.”

어둠 속에서 그가 질리도록 상대했던 것은 커다란 바위와 단단한 암반이었다.

인간에 비할 수 없는 단단함을 가진 물체들을 인간으로 상정해 무공을 수련했다.

피가 마를 날이 없던 두 주먹에는 인간의 피륙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살기와 패력(覇力)이 응축되었다.

그 결과가 눈앞에 보이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담호는 아직 영문을 모르는 방진보를 품에 안은 채 처참한 광경을 보지 못하게 했다.

자신의 손에 동자추가 죽었음에도 어떠한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죄책감에 고개조차 들지 못했을 텐데, 그 모든 광경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타인의 일처럼 느껴졌다.

담호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암흑에서의 십이 년이 헛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으으! 네놈은 누구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조복이 소리쳤다.

눈앞에서 대주 동자추의 상체가 날아갔다. 그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그가 아는 동자추는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약한 사람이었다면 혈랑대의 대주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동자추는 결코 저렇게 허무하게 죽을 인물이 아니었다.

담호의 시선이 조복을 향했다. 그러자 조복이 벼락을 맞은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담호의 입이 열리고 마치 가래가 낀 것처럼 거칠고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는 너는 누구지?”

“나, 나는 혈랑대의 부대주인 조복이다.”

“혈랑대?”

담호가 주위에 포진하고 있는 마적들을 둘러봤다. 하나같이 제법 세상을 험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험악한 인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담호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담겨 있었다.

“그래! 우리는 혈랑대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물러가면 용서해 주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네놈을 처참하게 죽일 것이다.”

“그런데?”

“네놈을 죽이겠단 말이다. 갈가리 찢어서…….”

“그런데 왜 그러지 않는 거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담호의 담담한 음성, 그런데 이상하게 소름이 끼쳤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조복이 소리쳤다.

“노, 놈을 죽여라.”

본능적으로 담호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인간들과도 다른 부류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의 말이 불씨를 댕겼다. 그렇지 않아도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떨던 마적들이 담호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우와아!”

“놈을 죽여.”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흥분을 고조시켰다.

그들은 광기를 폭발시키며 담호에게 달려들었다. 그들 역시 담호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는단 사실을 느낀 것이다.

백 명이 넘는 마적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겁을 집어먹을 만도 하건만 담호의 표정엔 한 점의 변화가 없었다.

그가 잠시 야공을 올려다봤다.

흔한 별빛 한 점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쾅!

“아악!”

그 순간 굉음이 울려 퍼지고 누군가의 비명이 뒤따랐다. 그리고 칠흑빛 하늘에 핏빛이 덧칠해졌다.

연이어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적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주먹 한 방에 생명 하나가 으스러지고 있었다.

“아!”

짐승처럼 우리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인간은 결코 그렇게 쉽게 죽을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담호는 그런 그들의 상식을 부인하기라도 하듯이 너무나 손쉽게 인간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 강력한 마적들이 마치 유리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으아악!”

“살려 줘!”

공포에 질린 마적들이 절규를 내질렀다.

상인들의 상식이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마적들 삼분지 이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흘린 피가 강이 되어 대지 위로 흐르고 있었다.

“아, 악마 같은 놈!”

조복이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그 증거로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담호는 분명 절름발이였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무공을 펼칠 때의 담호는 절대 절름발이가 아니었다.

조복은 담호의 걸음이 위장이라고 생각했다. 적들을 방심케 하기 위한.

그는 단 한 번도 담호와 같은 자가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해 봤다.

쾅!

“으악!”

그 순간에도 혈랑대의 부하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이 이상 지켜보다가는 살아남을 자가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머, 멈춰라!”

조복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의 말을 들었는지 담호가 학살을 멈추고 조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복이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말했다.

“용서해 줘! 이쯤하면 됐잖아? 우리는 이미 충분한 대가를 치렀어. 우리가 한 잘못 때문에 이 이상 피해를 받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구.”

“가혹하다?”

“그래! 이건 너무 가혹해. 네가 그 꼬마와 무슨 관계인지 모르지만 이렇듯 일방적으로 학살을 하는 것은 너무하다구.”

“그런가?”

담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조복은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그가 급히 담호에게 무릎을 꿇었다.

“제발 용서해 줘. 내가 이렇게 빌 테니까.”

그런 조복을 보는 담호의 눈빛이 더욱 스산해졌다.

“용서는 나한테 구하는 게 아니야.”

“그럼?”

“저 아이가 하는 거지.”

담호가 방진보를 가리켰다.

조복이 급히 방진보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꼬마야, 우리를 살려다오. 우리가 잘못했다.”

“그, 그건…….”

“하라는 대로 다 해 주마. 보상은 얼마든지 해 줄 테니 제발…….”

조복이 방진보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감히 방진보를 인질로 삼을 생각조차 못했다. 동자추가 어떻게 되는지 방금 전에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기 때문이다.

방진보는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천성이 착한 방진보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 어떻게?’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비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을 지키려고 발버둥을 치던 아비의 얼굴이.

방진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입으로 복수를 해 달라고 하지 않는 대신, 용서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 모습에 조복이 애가 탔다.

“이렇게 간절히 비니까 제발 용서해 달라고! 이 뚱보 자식아!”

“…….”

하지만 방진보는 입을 다문 채 열지 않았다.

다시 조복이 소리를 질렀다.

“이 빌어먹을 뚱보 자식아! 사람이 이렇게 빌잖느냐?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라 할 수 있……. 커헉!”

덜컥!

순간 조복의 몸이 공중으로 치켜 올랐다. 담호가 그의 목덜미를 잡아 올린 것이다.

그가 오직 조복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용서란 건 말이야, 그렇게 너희 같은 가해자가 윽박질러 구하는 것이 아니야.”

“흐윽!”

“저 아이와 같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해 줘야 하는 거지.”

담호가 방진보와 우리에 갇힌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시선은 담호를 향해 있었다.

“그들은 아무도 너희들을 용서해 주지 않을 것 같군.”

“사, 살려 줘! 제발!”

“그러는 너희들은 저들을 살려 줬나? 저들도 그렇게 간절히 빌었을 텐데.”

조복은 담호가 절대 자신을 살려 두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악에 받친 그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 악귀 같은 자식아! 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네 마지막도 결코 좋지 않을 것이다. 우리 뒤에 누가 있는 줄 아느냐? 그들이 결코 네놈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네놈은 사람을 잘못 건드렸어. 이제 곧 그들이 올 것이다.”

순간 담호의 입가에 한 줄기 선이 걸렸다. 완만하게 곡선을 이룬 입매는 분명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거 기대되는군.”

“너?”

콰득!

순간 담호의 주먹이 조복의 복부에 꽂혔다. 조복의 배를 관통해 등으로 빠져나온 담호의 주먹.

조복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끄으으!”

“넌 너무 말이 많아.”

담호가 조복의 복부에 박힌 팔을 뺐다. 그러자 조복의 몸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조복이 바닥에 엎드려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뭍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힘없이 숨을 몰아쉬던 그의 숨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담호의 시선이 남아 있는 마적들을 향했다.

마적들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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