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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3장. 살아 있음에 가시밭길도 걷는다(1)
날이 밝아 왔을 때 살아남은 오직 방진보와 우리에 갇힌 상인들뿐이었다. 마적들 중 살아남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목숨을 건졌지만 상인들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들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공터 중앙에 서 있는 담호를 바라보았다.
죽음이 내린 대지 위에 그 홀로 서 있었다.
마적들의 시신이 그의 주위에 흩뿌려져 있었다. 말 그대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담호의 주먹에 맞은 이들 중 누구도 형체를 제대로 유지한 이는 없었다. 마치 벽력탄에 직격당한 것처럼 터져 나가거나, 뼈와 살이 한 번에 찢겨 나갔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그들이었지만, 이런 광경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아, 악귀…….”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그는 담호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을까 걱정하며 눈을 내리 깔았다.
하지만 그의 우려와 달리 담호는 공터에 우두커니 서서 움직일 줄 몰랐다.
담호의 눈빛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참상이었다. 자신의 손에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호의 심정엔 그 어떤 동요도 없었다.
담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제야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게 내가 잃어버린 것인가?’
십이 년간의 지하 생활은 그에게서 정상적인 인간의 감성을 앗아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발밑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이 그 증거였다.
담호가 눈을 뜨고 우리에 갇힌 상인들을 바라봤다. 그들이 두려운 표정으로 분분히 담호의 시선을 피했다.
담호는 그들이 갇힌 우리의 문을 하나씩 부숴 나갔다. 자유를 찾았지만 상인들은 쉽게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만큼 담호의 강렬한 존재감에 압도당한 것이다.
담호는 문을 모두 부수고 난 뒤 방진보에게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방진보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서 움직일 줄 몰랐다.
담호의 손이 방진보의 어깨를 짚었다. 그제야 방진보가 담호를 올려다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이내 하염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으허헝! 형!”
방진보가 대성통곡을 했다.
담호는 그런 방진보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아비를 잃은 아이였다. 그 아이가 느낄 상실감과 슬픔이 얼마나 클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담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지켜보는 것뿐.
그사이 우리에 갇혀 있던 상인들이 눈치를 보며 한 명씩 빠져나왔다.
자유를 찾자 그들도 방진보의 감정에 영향을 받은 듯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으허헝!”
삽시간에 공터는 사람들의 울음소리로 난장판이 되었다.
그들이 울음을 멈춘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몇몇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적들에게 약탈당한 물건들을 다시 수레에 싣고 정리했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사람들도 수레를 정리하는 행렬에 동참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담호는 말없이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모든 짐을 마차에 실은 후 상인 중 한 명이 담호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대협의 구명지은에 상인들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음!”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보답을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
“필요 없어.”
“하지만…….”
“당신들을 구하기 위해 온 게 아니야. 저 아이를 위해서지.”
담호의 시선이 아직도 울고 있는 방진보를 향했다.
“그러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휴! 알겠습니다.”
담호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자 상인은 더 이상 뭐라 말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잘됐다고도 생각했다.
상인은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연장자였다. 상단주인 조수광이 죽었으니 이젠 그가 책임자였다.
그에겐 살아남은 이들을 중원으로 데려갈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사소한 정리나 감정 따윈 버려야 했다.
얼른 사태를 수습해서 살아남은 이들이 죽은 이들의 가족까지 책임져야 했다. 그것이 그와 상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상인이 담호에게 포권을 취한 후 방진보에게 다가갔다.
“진보야, 이제 그만 가자.”
그가 달랬지만 방진보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손을 잡아끌었지만 방진보는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상인은 방진보를 달래는 것을 포기하고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는 다른 이들과 한참 동안이나 상의를 한 후 다시 담호와 방진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대협! 저흰 이제 가 봐야 합니다. 해서 부탁드리는 말씀인데 혹시라도 저희를 중원까지 호위해 줄 수 있는지요? 대가는 섭섭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거절하지.”
“대협?”
상인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담호의 단호한 눈을 보고 있자니 더 부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은 이렇게 한없이 평범한 듯 보이지만, 그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움직이던 마적들을 백 명이나 죽인 살인마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와 상인들 정도는 밥 한 끼 먹는 시간 만에 죽일 수도 있었다.
상인은 생각을 바꿨다.
“대협께 어려운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럼 저희끼리 중원으로 가겠습니다.”
그의 생각은 간단했다.
이곳에서 다시 토로번으로 돌아가서 낭인들과 보표들을 더 고용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물건들 대부분이 무사하고, 마적들이 타고 온 말들도 있으니 그들을 고용할 여력은 되었다.
상인이 다시 방진보에게 다가가 같이 가자고 했다. 하지만 방진보는 여전히 움직일 줄 몰랐고, 상인은 곤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자꾸 이러면 너를 두고 갈 수밖에 없다. 그래도 좋으냐?”
“나, 나는……. 으허헝!”
방진보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그때 담호가 나섰다.
“진보는 내가 데려가겠다.”
“대협께서요?”
상인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진보는 대인에게 맡기지요.”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말 한 마리만 남겨 두고 가.”
“알겠습니다.”
상인은 이유도 묻지 않고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마적들이 타고 온 말들이 백여 마리가 넘는다. 그중 한 마리를 주어도 엄청나게 남는 장사였다.
게다가 방진보의 아비인 방우광이 죽은 후였다. 보호자도 없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중원으로 가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중원에 들어가도 문제였다. 보상도 해야 하고, 따로 살길도 마련해 주어야 했다. 이제는 상단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방진보에게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컸다.
그렇다면 차라리 담호에게 방진보를 넘기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진보야, 대협을 따라가거라. 그분이 널 잘 보살펴 줄 것이다.”
그는 아직도 울고 있는 방진보에게 은자 몇 개를 꺼내 쥐어 주었다. 생색내기용에 불과했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양심에 찔릴 것 같았다.
그는 방진보의 대답도 듣지 않고 부리나케 일행들에게 돌아갔다. 그러고는 서둘러 이 지옥 같은 곳을 빠져나갔다.
마차를 끌고 나가는 상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순식간에 수십여 대의 마차와 말들이 담호와 방진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담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푸르르!
근처에 있던 흑귀가 다가와 담호의 뺨에 머리를 비볐다. 담호는 그런 흑귀의 목덜미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나중에는 방진보가 탈진했다.
담호는 상인들이 남기고 간 말 등에 방진보를 실었다. 그래도 담호의 눈치를 보느라 최고로 상태가 좋은 녀석을 남기고 갔다.
담호는 흑귀에 탄 후 방진보를 실은 말을 끌고 공터를 떠났다. 그들이 사라진 공터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가득했다.
잠시 후 시체의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공터에 나타났다. 늑대들은 게걸스럽게 시신들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늑대들 다음은 까마귀였다. 마적들의 시신은 그렇게 짐승들의 밥이 되었다.
한참이나 야생의 짐승들이 인간의 시신을 탐할 때였다.
쉬익!
깨앵!
소름 끼치는 파공음과 동시에 늑대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늑대들이 사방으로 도망갔고, 까마귀가 후드득 날아올랐다.
그 자리에 나타난 이는 일단의 무인들이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발산하는 무인들은 처참한 공터의 풍경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렸다.
우두머리인 듯한 남자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이제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의 몸에서는 보는 이들을 움찔하게 만드는 강렬한 기백이 발산되고 있었다.
남자의 허리에는 보기에도 섬뜩한 귀신 문양이 새겨진 도갑이 걸려 있었다.
우두머리 남자가 동자추의 것으로 짐작되는 시신 앞에 섰다.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동자추, 여기에서 죽어 나자빠져 있었군.”
수하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혈랑대 전원이 죽었습니다.”
“물건은?”
수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우두머리 남자의 표정이 더욱 냉랭하게 변했다.
“흉수는 몇 명인가?”
“짐승들이 시신을 심하게 훼손해 추정하기 힘듭니다.”
“어떻게든 놈들을 찾아라.”
“존명!”
수하가 대답과 함께 다시 마적들의 시신이 널브러진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면밀하게 시신들을 살폈다.
그사이 우두머리 남자는 동자추의 시신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쓸 만한 사냥개였는데 아쉽게 됐군. 산장의 행사에 차질이 생기겠어.”
동자추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꽤나 중요한 존재였다. 그가 더러운 짓을 도맡아 해 준 덕에 이제까지 일들이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동자추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우두머리 남자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동자추의 허리 춤 아래 무언가 반짝이는 물건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두머리 남자가 손을 뻗어 반짝이는 물체를 집어 들었다.
“묘……안석인가?”
그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누구보다 냉철한 그의 심지를 흔들 정도로 묘안석은 귀물이었다.
그의 시선이 동자추를 향했다.
묘안석은 동자추가 가질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 말은 곧 묘안석을 가진 누군가를 습격해서 강탈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상대를 잘못 건드렸는지 모르겠군.”
묘안석을 가지고 다닐 정도라면 무시 못 할 거물일 수도 있었다.
세상엔 종종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도 있는 법이다. 어쩌면 동자추도 그런 인물을 건드렸는지 몰랐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본장의 사냥개를 죽인 죄는 용서할 수 없지.”
우두머리 남자가 일어났다.
그의 이름은 경천생, 귀검혈마(鬼劍血魔)라는 별호가 붙을 만큼 잔혹한 성정을 가진 남자였다.
그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담호가 방진보를 데리고 온 것은 방우광의 시신이 있는 커다란 바위 근처였다.
방우광의 시신을 보자 방진보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 흐윽!”
방진보는 방우광의 시신 위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담호는 그런 방진보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슬픔의 실체를 마주하고 극복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보기 힘들다고 외면했다가는 나중에 더 큰 고통으로 남을 뿐이다.
방진보는 아비의 곁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다시 날이 밝아 올 무렵 담호가 마침내 움직였다.
“이젠 아버지를 보내줘야 한다.”
“형?”
“이제 쉬게 해 드려야지.”
“그래도…….”
“그는 쉴 만한 자격을 갖고 있다.”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담호의 말에 방진보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진보가 비칠거리며 일어났다. 잠시 방우광의 시신을 바라보던 방진보가 이내 근처에 있던 돌들을 주워와 아비의 시신 위에 쌓았다.
손바닥이 터져 피가 흘렀고, 손톱이 흔들거렸다. 하지만 방진보는 힘들단 말 한 번 하지 않고 돌로 아비의 무덤을 만들었다.
담호가 그런 방진보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넌 행복한 거야. 최소한 아비의 무덤을 직접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