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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3화 (3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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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3장. 살아 있음에 가시밭길도 걷는다(2)

담호와 방진보는 방우광의 무덤에 작별을 고했다.

“아버지, 다시 찾아올게요.”

방진보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방진보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곤 어디론가 향했다.

그곳엔 마차의 부서진 잔해가 남아 있었다. 방우광과 방진보가 타고 온 그 마차였다.

방진보는 마차의 잔해를 뒤지기 시작했다. 담호는 그런 방진보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잔해를 한참이나 뒤져 방진보가 찾아낸 것은 과자(중국식 냄비)와 각종 향신료 같은 요리 재료들이었다.

아비 방우광이 남긴 마지막 유산이었다. 이런 곳에 버려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방진보는 마차의 잔해에서 찾은 물건들을 말의 안장에 실었다.

방진보가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형, 가요.”

불과 하룻밤 사이에 방진보의 눈빛은 무척이나 깊어져 있었다.

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진보는 사고와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꾸는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그런 경험을 한 자의 눈빛은 보통 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담호와 방진보는 방우광의 무덤이 있는 곳을 떠났다.

말을 타고 가면서도 방진보는 조금씩 훌쩍였다. 하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방진보의 울음도 차츰 줄어들었다.

길을 가는 내내 담호는 말이 없었다. 방진보도 말이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하루 종일 길을 갔다.

가끔 흑귀가 투레질을 했다. 신나게 달리고 싶은데 담호가 달리지 않으니 답답한 것이다.

담호가 흑귀의 목을 두들겨 주며 달랬다. 흑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달릴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루 대부분을 말 위에서 보냈다. 그들이 말에서 내린 것은 해가 질 무렵 이름 모를 조그만 개울가에 도착했을 때였다.

해가 진 이상 길을 가는 것은 무리였다. 담호는 이곳에서 노숙을 하기로 결정했다.

개울가에 말을 세워 두고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주워 왔다. 담호는 모닥불을 피웠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지하 깊은 곳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담호는 이제 추위나 더위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모닥불은 방진보를 위한 것이었다. 그가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담호가 모닥불에 앉으며 방진보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먹어라.”

그가 방진보에게 준 것은 바로 육포였다. 토로번에서 헤어지기 전에 방진보에게서 받은 그 육포였다.

방진보가 육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정신이 들었는지 담호를 바라보았다.

담호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육포를 씹는 그의 모습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방진보가 갑자기 육포를 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잠시만요.”

담호가 눈을 뜨고 방진보를 바라보았다.

방진보가 갑자기 말안장 위에서 과자를 꺼냈다. 근처에 있는 개울가에서 길어 온 물을 과자에 담은 후 모닥불에 올려놓았다.

방진보는 불이 붙은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개울가 수풀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에 붙은 불로 주위를 비추며 금세 풀 몇 가지를 뜯어 왔다.

때마침 과자 안의 물이 끓기 시작하자 육포와 함께 풀을 잘 다져 넣었다.

담호는 그런 방진보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방진보는 마차 잔해에서 가져온 조그만 부대를 열었다. 그러자 곱게 빻은 곡물 가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진보는 곡물 가루를 과자 안에 한 줌 집어넣었다. 그러자 향긋한 냄새가 순식간에 주위에 퍼져 나갔다. 방진보는 그 안에 향신료 몇 가지를 첨가했다.

육포와 곡물가루, 그리고 이름 모를 풀이 섞여 그럴듯한 죽이 만들어졌다.

“먹을 만할 거예요.”

방진보는 담호에게 죽 한 그릇을 떠서 줬다.

담호는 방진보가 만든 죽을 맛봤다. 입안 가득 고소함이 맴돌았다.

“맛있구나.”

“아버지가 알려 준 요리예요. 재료가 떨어지면 가끔 이렇게 해 먹곤 했어요.”

“그렇구나.”

“보기엔 좀 그렇지만, 그래도 한 끼 식사로 부족함이 없을 거예요.”

“잘 먹으마.”

“네!”

방진보가 죽 한 그릇을 떠서 담호의 곁에 앉았다.

후르륵!

두 사람이 죽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담호는 죽을 맛있게 먹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방진보의 실력은 뛰어났다.

두 사람은 금세 죽 한 그릇을 비웠다. 식사가 끝난 후 방진보가 담호를 바라봤다.

“형!”

“왜 그러느냐?”

“저 좀 동정호에 데려다주실 수 있어요?”

“동정호?”

담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방진보를 바라봤다. 그러자 방진보가 담호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제가 염치없다는 것은 잘 알아요. 하지만 형밖에 부탁드릴 사람이 없어요.”

“동정호엔 왜 가려는 것이냐?”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었거든요.”

“알겠다.”

담호는 더 이상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다.

이유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정말인가요?”

“어서 쉬거라. 내일부터 먼 길을 가려면 체력을 비축해 놓아야 할 것이다.”

“고마워요, 형.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방진보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유도 묻지 않고 흔쾌히 허락해 준 담호가 고마웠다.

다른 사람들에겐 담호가 흉신악살(凶神惡殺)로 보이겠지만 방진보에겐 둘도 없는 은인이었다.

모두가 그들 부자를 외면할 때 담호만큼은 외면하지 않았다. 비록 그의 손에 수많은 이들이 죽었지만, 담호가 잔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담호가 아니었으면 마적 떼에 의해 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 많은 이들이 슬픔에 잠겼을 것이다.

“형, 고마워요.”

방진보가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표했다. 담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닥불가에 있는 조그만 바위에 등을 기댔다.

그사이 방진보는 과자와 그릇을 개울가로 가져가 설거지를 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이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지금은 무어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방진보는 잠시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담호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슬픔을 극복하는 것은 오직 스스로의 노력에 달렸다. 그리고 방진보는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담호가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새벽, 방진보는 담호보다 먼저 일어나 식사를 준비했다. 몇 가지 안 되는 한정된 재료와 향신료만으로도 방진보는 음식을 뚝딱 만들어 냈다.

담호는 그런 방진보의 행동을 만류하지 않았다.

음식을 할 때면 방진보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저런 요리에 대한 열정이 방진보가 살아가는 힘이 되어 줄 터였다.

식사를 마친 후 담호는 방진보와 함께 길을 떠났다. 이젠 어느 정도 슬픔이 가셨는지 방진보가 조금씩 떠들기 시작했다.

방진보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일부터 방우광과 함께 서역에 간 것까지 시시콜콜 이야기했다. 그리고 담호는 그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담호가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방진보는 끝없이 이야기를 했고, 시간이 갈수록 표정이 좋아졌다.

하지만 담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아비의 죽음을 잊었기 때문이 아닌, 나름의 방법으로 슬픔을 삭인 것이라는 사실을.

방진보는 아비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담호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사부님은 뭐하고 있을까?’

현소 진인이 그리웠다.

당장이라도 그가 있는 화산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몰아치는 광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을 때 찾아오라고 했다. 일단 그 사실부터 확인해야 했다.

담호는 묵묵히 흑귀를 몰았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저 앞에 조그만 마을이 보였다.

방진보가 반색을 했다.

“잘됐네요, 형. 저곳에 들러서 재료 좀 사요.”

“재료?”

“예! 요리할 재료가 너무 없어요. 몇 가지만 사면 될 것 같으니 잠깐 들렀다 가요.”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방진보가 먼저 말을 몰아 마을로 달려갔다. 담호는 멀어지는 방진보의 뒷모습에서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봤다.

혼자 놔두기엔 불안하고, 그래서 외면할 수 없는…….

어쩌면 사부 현소 진인도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그때 느꼈는지도 몰랐다.

마을은 무척 조그마했다. 방진보가 아니었으면 들르지도 않았을 만큼.

가구 수라고 해 봐야 겨우 서른 가구 정도, 아이들까지 모두 합쳐도 백 명이 안 될 듯싶었다. 이런 곳에서 무슨 식재료를 구할까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방진보가 보는 시점은 담호와 또 다른 모양이었다. 방진보는 평범한 가정집의 문을 두들기며 흥정을 했다.

그렇게 해서 방진보가 얻어낸 것은 훈제한 돼지고기 한 덩이와 꾸덕꾸덕하게 말린 물고기, 마찬가지로 볕에 말린 정체를 알 수 없는 풀이었다.

방진보는 어렵게 구한 재료들을 보자기에 싸매어 소중하게 보관했다. 비록 정식으로 요리를 배우진 않았지만 방우광의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 적잖았다.

그 때문에 식재료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숙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좋은 식재료였다.

“이제 가요.”

방진보의 얼굴에 오랜만에 미소가 어렸다.

두 사람은 곧장 마을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그만 촌락일수록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심한 법이다. 목적을 이뤘으면 빨리 떠나는 것이 여러 사람을 위해 좋았다.

담호는 노숙이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려서는 인적이 드문 촌락에 살았고, 철이 들어서는 화산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폐쇄된 지하 공간에서 보낸 십이 년의 세월은 그를 어떤 상황에서도 금방 적응할 수 있게 바꿔 놓았다.

담호는 자신이 처했던 상황보다 더 최악의 상황은 거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 최악의 상황을 헤쳐 나왔는데 적응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노숙하는 것 정도는 그에게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방진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아비를 따라 수없이 노숙을 경험했기에 오히려 담호보다도 훨씬 더 나았다.

문제는 방진보의 체력이었다.

이제까지는 아비가 모는 마차를 타고 편하게 와서 체력의 소모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직접 타는 것은 그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체력의 소모가 극심한 일이었다.

혼자일 때보다 당연히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담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방진보가 지친 기색이 보이면 쉬었다. 잠깐 쉬었다 떠날 때도 있었고, 한참이나 머물 때도 있었다.

방진보는 점점 더 밝아졌고, 곧 예전의 활발함을 되찾았다.

“형, 오늘은 이곳에서 자요.”

방진보가 먼저 담호에게 노숙할 것을 제안했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방진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헤헤! 형, 잠깐만 쉬고 있으세요.”

방진보는 담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처에 널려 있는 잔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고, 오면서 봐 둔 개울가에서 물을 길어 왔다.

모닥불에 과자를 올려놓고 뜨겁게 달궜다. 과자가 어느 정도 달아오르자 마을에서 얻은 돼지비계를 넣었다.

치익!

돼지비계가 녹으면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방진보는 한껏 달아오른 과자에 마을에서 구한 훈제한 돼지고기와 콩팥, 간을 함께 넣고 달달 볶았다.

그렇게 해서 방진보가 내놓은 음식은 폭삼양이라는 회족 전통의 요리 중 하나였다. 원래는 양고기를 써야 했지만, 요령껏 돼지고기로 만든 것이다.

처음 맛보는 음식에 담호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건 어디서 배운 거냐?”

“아버지가 틈틈이 적은 요리서에 적혀 있는 대로 조리해 봤어요. 어때요?”

“맛있구나.”

“다행이다. 헤헤!”

담호의 대답에 방진보가 멋쩍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담호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방진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전 꼭 천하제일숙수가 될 거예요.”

방진보는 그게 아비를 위하는 길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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