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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4화 (3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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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3장. 살아 있음에 가시밭길도 걷는다(3)

합밀(哈密)은 서역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최후의 관문 같은 도시였다. 합밀을 지나 사흘만 더 가면 바로 중원으로 들어가는 가욕관이 나온다.

합밀은 새외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한때는 이족들의 왕조가 들어섰을 정도로 번성하기도 했었다.

합밀에 들어가자 공기가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어딘지 모르게 텁텁했다면 합밀의 공기는 훨씬 더 가볍고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중원이 가까워졌음이리라.

담호와 방진보는 그런 합밀의 공기를 몸으로 느끼며 들어섰다. 그들의 머리와 어깨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닷새면 올 거리를 무려 열흘이나 걸려 왔다. 하지만 시간을 소비한 만큼 방진보의 안색은 좋아졌고, 예전의 웃음기도 많이 되찾았다.

가끔은 우울해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담호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방진보는 요리에 집착했다. 식재료가 될 만한 야생초나 과일이 있으면 꼭 맛을 봐야 했고, 매끼마다 직접 요리해야 했다. 덕분에 이름 모를 마을에서 샀던 식재료들은 동이 난 지 오래였다.

담호는 그래도 방진보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것이 방진보가 상처를 해결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와! 형, 저것 봐요.”

방진보가 좌판에 널려 있는 식재료들을 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수많은 이들이 모이는 도시답게 합밀의 거리에는 온갖 식재료들이 넘쳐났다.

방진보는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좌판에 널려 있는 식재료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건 죽순이고, 요건 송화단. 우와아!”

숙수의 아들답게 방진보는 각종 식재료에 해박했다.

방진보는 마음에 드는 식재료를 닥치는 대로 사 모았다. 돈은 담호에게서 충분히 받았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방진보가 식재료를 모두 산 후에야 객잔으로 향했다.

청강객잔(淸江客棧)이라는 이름의 객잔이었다. 합밀에서도 꽤 큰 축에 속하는 청강객잔엔 항상 사람들이 들끓었다.

객잔은 단순히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곳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많은 정보가 오갔다. 그래서 먼 길을 오가는 상인들일수록 큰 객잔을 선호했다.

담호는 그런 사실은 잘 몰랐지만, 큰 객잔일수록 시설이 좋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청강객잔을 택했다.

“어서 옵셔!”

점소이가 잽싸게 달려왔다.

방진보가 담호를 대신해서 물었다.

“방 있어요? 형.”

“있지. 몇 인실로 줄까?”

방진보가 붙임성 있게 나오자 점소이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형’이라고 불러 주는데 기분이 안 좋을 이유가 없었다.

“이 인실 있으면 주세요.”

“마침 하나 남았는데 잘됐네. 이 층으로 올라가서 왼쪽 복도를 따라가면 끝 방이 있어. 거기로 가면 돼.”

“고마워요.”

“뭘!”

점소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담호가 방진보의 붙임성 있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진보가 처음부터 저렇게 붙임성 있는 성격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뚝뚝한 담호와 함께 가다 보니 자신이라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된 것이다.

“형, 식사는요?”

“배고프면 남는 자리 아무 곳이나 앉아. 금방 갖다 줄 테니까.”

방진보가 담호를 바라봤다. 배고프다는 신호였다.

“저기에 앉자.”

“예!”

두 사람이 빈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어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담호는 벽을 등진 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음식은 네가 알아서 시키거라.”

“예!”

방진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가장 고대하던 시간이었다. 다시 점소이를 불렀다.

“형, 여기서 가장 자신 있는 음식이 뭐예요?”

“글쎄다. 다 자신 있는데 그래도 권한다면 청증양육(淸蒸羊肉)이 어떤가 싶어. 양고기 찜인데 우리 객잔만의 비법으로 만들어서 맛이 기가 막히지. 청증양육에다가 술 한 잔이면 피로가 싹 풀릴 거야.”

“좋겠네요. 그걸로 먹을게요.”

“탁월한 선택이야. 그럼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가져올 테니까.”

“예!”

점소이가 주방으로 달려갔다.

방진보는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객잔 내부를 둘러봤다.

객잔 안은 무척 넓었다. 탁자만 스무 개가 넘었고, 대부분의 자리가 꽉 차 있었다.

상인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무기를 차고 있는 무인들도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요즘 그렇게 마적 떼들이 기승이라며?”

“말도 말게. 잘못하다가는 물건뿐 아니라 목숨도 잃기 십상이라네.”

“휴우!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상인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방진보의 안색이 잠시 어두워졌다. 마적 떼가 언급되자 아비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가 애써 웃었다.

“저들은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네요. 형한테 마적들이 전멸당한 것을.”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렇게 마적이 극성인지…….”

“물건만 빼앗았으면 됐지, 왜 사람들을 잡아가는 건지 정말 모르겠군.”

“그러게 말일세. 휴! 어쨌거나 내일 여정이 무사하기만을 빌자구.”

“술이나 드세.”

상인들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객잔 안에 울려 퍼졌다. 그래서인지 분위기가 더 무거워졌다.

그때 점소이가 쟁반을 들고 왔다.

“헤헤! 청증양육이 나오기 전까지 기다리기 지루하실 테니 잠시 입가심이라고 하시라고 두부볶음하고 술을 가져왔어요.”

“고마워요, 형. 헤헤!”

“뭘! 그럼…….”

점소이가 담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다시 종종걸음으로 주방으로 달려갔다.

“형, 제가 따라 드릴게요.”

방진보가 담호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담호는 말없이 술잔을 받았다.

사부가 마시는 것은 많이 봤지만 담호 본인은 한 번도 마셔 본 적이 없었다.

가끔 어떤 맛이냐고 물어보면 사부는 세상의 모든 감정이 이 안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담호는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첫맛은 무척 썼다. 사부는 이런 게 뭐가 좋다고 그리 마셨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두 번째 맛은 꽤나 괜찮았다.

세 잔째는 그래도 나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사부가 왜 그렇게 술을 좋아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담호는 술잔을 내려놨다. 그와는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객잔의 문을 열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음!”

“아아!”

다양한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만큼 객잔에 들어온 인물이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만큼 특별하기 때문이다.

객잔에 들어온 이들은 일 남 일 녀였다.

정확히는 한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여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인에게 꽂혀 있었다.

마치 초원을 자유롭게 뛰어노는 야생마처럼 싱그러운 기운이 가득 감도는 이십 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다갈색 피부에 유난히 큰 눈동자. 그런데 특이하게 눈동자에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 이질적인 아름다움에 사람들은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만큼 여인은 독특하면서도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여인이 객잔 안을 둘러보자 점소이가 급히 달려왔다.

“어서 오십쇼, 손님.”

“방 있느냐?”

점소이에게 물은 이는 여인의 곁에 있는 노인이었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허리마저 잔뜩 굽어 있었다. 하지만 주름진 눈매 사이로 번뜩이는 눈빛은 도저히 노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점소이의 자세가 더욱 공손해졌다.

“일 인실하고 특실만 남아 있습니다.”

“특실을 빌리겠다.”

“기간은 얼마나?”

“머물면서 결정하겠다.”

“알겠습니다요. 그럼 특실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먼 길을 와서 시장하니 이곳에서 제일 잘하는 음식으로 몇 가지 내오거라. 값은 상관없으니.”

노인이 품속에서 조그만 은덩이 하나를 꺼내 쥐었다. 점소이는 재신이 강림한 것을 직감하고 허리가 부러져라 굽실 댔다.

“네! 자리에 앉아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점소이가 부리나케 주방으로 달려갔다.

노인이 매서운 눈으로 객잔 안을 훑어봤다. 그의 눈빛을 받은 상인들이 분분히 고개를 숙였다.

노인의 눈빛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나운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상인들은 본능적으로 노인이 무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상인들이었다. 저 정도의 노인이 함께할 정도의 여인이라면 보통 신분이 아닐 것이다. 그런 여인과 괜히 엮여서 좋을 것이 하나 없었다.

“아가씨,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노인이 여인을 빈자리로 이끌었다. 공교롭게도 담호와 방진보의 바로 옆자리였다.

“흑노, 여긴 꽤나 번잡하네.”

“합밀은 원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이 정도는 복잡할 겁니다.”

“그래?”

“그나마 합밀에서 이곳이 가장 머물기 좋은 곳입니다.”

“알았어. 흑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여인이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흑노라 불린 노인은 여인이 자리에 앉은 이후에야 앉았다.

그것으로 미뤄 보아 여인이 노인보다 훨씬 더 신분이 높음을 알 수 있었다.

여인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객잔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 모습조차 매력적으로 보일 만큼 여인에게선 싱그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객잔 안을 둘러보던 여인의 시선이 문득 구석진 탁자 앞에서 멈췄다. 정확히는 담호와 방진보가 앉은 곳이었다.

마치 석상처럼 표정이 없는 담호와 달리 방진보는 마치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이 그런 방진보를 보며 웃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니?”

“너, 너무 예뻐서…….”

방진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부터 목덜미까지 온통 빨개져 있었다. 그런 방진보의 순진한 모습에 여인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고마워! 넌 이름이 뭐니?”

“방진보요.”

“진보? 좋은 이름이구나. 내 이름은 심옥이란다.”

“심옥!”

“그래! 예쁘지?”

스스로를 심옥이라고 밝힌 여인이 콧대를 높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밉거나 어색하지 않고 무척이나 잘 어울려 보였다.

방진보는 순진하게 거기에 대답했다.

“네! 예뻐요.”

“깔깔! 너, 재밌는 아이구나.”

결국 심옥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흑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가씨, 체통을 지키십시오.”

“알았어, 알았다구. 그치만 너무 귀엽잖아.”

심옥이 샐쭉한 표정으로 흑노를 흘겨봤다. 보통의 남자라면 심장이 쿵 떨어질 만큼 매혹적인 모습이었지만, 흑노는 표정의 변화 하나 없었다.

심옥의 시선이 방진보의 곁에 앉아 있는 담호를 향했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방진보와 달리 담호는 아무런 표정 없이 젓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심옥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리 봐도 담호는 감정이 없는 석상 같았다. 그녀의 호위인 흑노도 꽤나 차가운 표정의 소유자였지만, 담호처럼 완벽하게 감정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담호와 방진보의 조합은 아무리 봐도 어울려 보이지가 않았다. 그런데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어딘지 모르게 어울려 보이기도 했다.

그런 이질적인 모습이 그녀의 흥미를 끌었다.

심옥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흑노가 입을 열었다.

“앉으십시오, 아가씨.”

“왜? 내가 뭘 할 줄 알고?”

“괜히 식사 잘 하고 있는 사람에게 민폐입니다.”

“쳇!”

결국 심옥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녀가 다시 흑노를 흘려보았다.

“그 표정을 보시면 막주님이 그리 좋아하시지 않을 겁니다.”

“괜찮아! 여기엔 아빠가 없으니까.”

“아가씨!”

“알았어. 알았다구.”

흑노의 잔소리에 심옥이 질렸다는 듯이 두 손을 들었다.

흑노는 심옥의 천적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아비가 흑노를 호위로 붙여 준 건지도 몰랐다.

심옥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쏙 빠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그곳이 맞아?”

“확실합니다.”

“그래?”

심옥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방금 전까지 짓궂고 철없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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