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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4장. 스쳐 가는 바람이 늘 따스한 것은 아니다(1)
식사 후 방진보는 방으로 돌아갔고, 담호는 밖으로 나왔다.
푸르르!
마구간에 다가가자 흑귀가 반갑다는 듯이 고개를 내밀었다. 담호는 그런 흑귀의 목덜미를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흑귀가 다시 뜨거운 김을 뿜어냈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마음껏 달릴 수 있을 테니까.”
흑귀가 담호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앞발로 바닥을 긁었다.
비록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흑귀는 담호와 교감이라도 하듯이 말을 잘 알아들었다.
담호가 그렇게 흑귀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자네 말인가 보군.”
낯선 인기척과 함께 역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아까 심옥과 함께 온 흑노란 노인이 보였다. 그가 양팔을 소매에 집어넣은 채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담호가 바라보자 흑노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아까 들어올 때 보았지만 상당히 좋은 말일세. 요즘엔 그런 말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지.”
“…….”
“어디에서 구했는가?”
“마시장.”
“호! 마시장에서 이 정도의 물건을 구했다고? 대단하군!”
흑노가 감탄했다는 눈으로 흑귀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탐심이 담겨 있었다.
무인이라면 좋은 무기만큼이나 욕심나는 것이 좋은 말이다. 특히 이곳처럼 광활한 초원에서 활동을 하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흑노 역시 초원을 무대로 활동하는 무인이었다. 좋은 말에 대한 욕심이 누구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잡털 하나 섞이지 않고 검은 일색인 흑귀는 한눈에 보아도 명마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용건은 흑귀가 아니었다.
흑노가 담호 앞에 멈춰 섰다. 흑노는 담호의 가슴 어림에 겨우 닿을 정도로 왜소했다. 하지만 담호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무척이나 강렬했다.
“자네는 누군가?”
“…….”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흑노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사람의 심혼을 꿰뚫어 볼 만큼.
보통 사람은 그런 흑노의 시선을 견디지 못했다. 흑노가 속해 있는 단체에서도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담호는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마주 보고 있었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속엔 한 점의 동요도 없었다.
‘이놈!’
순간 흑노는 등골이 서늘해져 옴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바위를 보는 것 같았다. 너무 커서 그 끝이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산악 같은.
담호의 눈빛엔 그 정도의 무게감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이 압도당할 것 같았다.
흑노는 자신도 모르게 무기를 빼어 들 뻔했다. 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겨우 눌러 참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담호의 눈빛에 압도적인 무게감이 담겨 있을지언정 살기는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흑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자네는 누군가?”
“담호.”
“그게 자네 이름인가?”
흑노의 눈빛이 번뜩였다. 반대로 담호의 얼굴엔 귀찮다는 빛이 떠올랐다.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다. 그것도 매우.”
흑노는 담호를 본 처음부터 알아차렸다. 담호가 무공을 익힌 고수라는 것을.
검은 장포에 가려진 담호의 육체는 놀랄 만큼 잘 발달되어 있었다. 흑노도 외공의 고수들을 많이 봐 왔지만 담호만큼 육체가 잘 발달되어 있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덩치가 크다고, 혹은 근육이 우락부락하다고 외공이 강한 것은 아니다.
모든 무공이 그렇듯 조화가 가장 중요했다.
잘 발달된 팔과 다리의 근육, 그를 받쳐 주는 허리와 등 근육들이 조화를 이뤘을 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담호는 외공을 펼치기엔 최적의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흑노는 이제까지 담호처럼 육체가 잘 발달된 무인을 본 적이 없었다.
덩치는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지만,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화산처럼 막대한 힘을 근육 한 올 한 올에 응축하고 있었다.
그래서 심옥이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았다.
심옥은 무공은 강하지만 인간관계엔 매우 서툴렀다. 특히 어려서부터 남들에게 떠받듦을 받고 자랐기에 가볍게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에겐 어떻게 대해도 상관없었지만, 담호와 같은 자에게 그렇게 했다가는 필연코 충돌이 따라온다.
담호가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지금과 같은 시점에서 괜히 섣부른 은원을 맺을 필요가 없었다.
“혹시 그들과 관계 있는가?”
“그들?”
담호가 의아한 눈빛과 함께 흑노를 향해 걸어왔다. 순간 흑노는 담호가 다리를 살짝 전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아깝군! 다리를 절다니.’
제아무리 잘 발달된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 무얼 하는가? 다리를 저는데. 다리를 저는 자는 육신의 균형이 맞지 않아 운신에 큰 장애를 가지게 된다.
흑노는 이내 상념을 지웠다.
담호의 반응으로 미뤄 보아 그들과 관계가 없는 것이 확실했다.
“아닌가 보군. 그럼 한 가지만 부탁하지.”
“…….”
“이곳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그냥 자네 갈 길을 가게. 그게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니. 그럼 그렇게 안 것으로 알고 가겠네. 부디 내 말 명심하게.”
흑노는 담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뒤돌아섰다.
담호는 멀어지는 흑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빛은 더욱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다음 날 담호와 방진보는 아침 일찍 떠날 준비를 했다.
방진보는 꼼꼼하게 식재료를 챙겼다.
“어떡하지?”
너무 많이 샀나 보다. 아무리 우겨 넣어도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물건이 있었다. 방진보의 몸통만큼이나 크고 넓은 과자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과자는 숙수의 생명과도 같은 주구였다. 절대 몸에서 떨어트릴 수 없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방진보는 과자를 끈으로 묶어 등에 걸쳐 맸다. 그 모습이 꼭 거북이 같았다.
“됐다.”
방진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양새야 어떻든 간에 움직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형, 이제 가죠.”
“그래!”
방진보와 달리 담호는 딱히 준비할 것이 없었다. 노숙이나 음식은 모두 방진보가 책임지니까.
담호는 검은 장포 하나면 충분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담호와 방진보는 객잔을 나섰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대부분이 먼 길을 떠나는 상인들이었다.
“하하!”
“저 녀석 보게. 꼭 자라 같군.”
상인들이 과자를 등에 짊어진 방진보를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둥근 과자를 짊어진 모습이 꼭 거북이 같았다.
방진보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벌게졌다.
그때 담호가 말했다.
“허리를 펴라.”
“예!”
대답과 함께 방진보가 허리를 폈다.
“무인이 검을 들고 싸우듯 너는 과자를 들고 불과 싸운다. 자부심을 가져라.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보는 겉모습 따위가 아니니까.”
“알겠어요.”
방진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담호의 말이라면 뭐든지 믿었다. 담호는 그가 믿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방진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심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담호가 방진보의 머리를 헝클었다.
“섭섭하냐?”
“아, 아니에요.”
방진보의 얼굴이 빨개졌다. 방진보가 서둘러 빈자리로 달려갔다. 담호가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점소이가 달려왔다.
“지금 출발하시나요?”
“예! 형. 저희 식사주세요.”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갖다 줄게.”
점소이가 미소와 함께 주방으로 달려갔다.
담호는 자리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봤다.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상인이었고, 그중에는 방진보가 관심을 갖는 심옥도 있었다.
심옥과 흑노는 그들보다 먼저 객잔을 나선 것 같았다.
방진보는 여전히 심옥이 없는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담호가 그런 방진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때 점소이가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왔다. 아마도 미리 만들어 놓은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상인들 모두가 똑같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양고기 볶음과 화과, 그리고 하얀 쌀밥이 전부였다.
“헤헤! 아침 식사는 모두 똑같습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너도 잘 먹고.”
“형, 고마워요.”
“뭘! 그럼…….”
점소이가 웃음과 함께 물러갔다.
담호는 젓가락을 들자 방진보도 식사를 시작했다.
어제도 느낀 거지만 청강객잔의 음식은 무척이나 맛있었다. 담호에겐 특히 그렇게 느껴졌다.
담호는 음식을 젓가락으로 조금씩 떼어 깊이 음미했다. 세상에 나온 후 생긴 식습관이었다.
조금을 먹더라도 확실히 씹어서 넘긴다. 그래야 속의 부담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담호의 모습은 구도자와 비슷했다.
반대로 방진보는 호들갑을 떨며 식사를 했다.
“우와! 오향분을 기가 막히게 썼네요. 양고기의 누린내가 하나도 나지 않아요.”
오향분은 회향풀과 계피, 산초, 정향과 진피 등을 가루로 만들어 섞은 것으로 요리의 가장 기본이 되는 향신료 중 하나였다.
오향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요리의 풍미와 향기가 달라진다. 이름 높은 숙수들은 저마다 비법의 배합이 있기 마련이다.
“이 쌉쌀한 맛은 뭐지? 감초인가?”
방진보는 음식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사용된 향신료와 양념을 알아냈다. 그러면서도 음식을 먹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방진보의 얼굴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헤헤!”
그가 웃었다.
해맑은 웃음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담호와 방진보는 객잔을 나와 마구간으로 갔다.
흑귀가 반갑다고 투레질을 했다.
담호는 흑귀의 목덜미를 두들겨 준 후 올라탔다. 방진보는 자신의 말 위에 식재료가 담긴 가방을 먼저 실었다. 그런 후 낑낑대며 말에 올라탔다.
말 등에 식재료가 담긴 주머니와 가방을 싣고, 등에 과자를 짊어진 방진보의 모습은 꽤나 해학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방진보의 표정은 나름 비장했다.
합밀을 떠나면 며칠 안에 중원에 들어갈 것이다. 중원에 들어가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겁도 났고, 기대고 되었다.
방진보가 흘깃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담호를 만난 지 꽤 되었지만 방진보는 그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형도 웃을 줄 알까?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저렇게 감정을 잃어버린 것일까?’
아비를 잃은 슬픔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자 이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방진보는 자신이 담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조건 없는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가자.”
담호의 무뚝뚝한 음성이 들렸다.
마치 가래가 낀 것처럼 탁하면서도 거친 음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움찔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방진보가 상상을 하는 사이 담호는 어느새 저 멀리 가고 있었다.
“형, 같이 가요. 이럇!”
방진보가 말의 옆구리를 박찼다.
담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난 뒤에야 방진보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매우 빠른 속도로 합밀을 빠져나왔다.
합밀을 나온 이후부터는 거칠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흑귀는 마치 그동안 억눌린 질주 본능을 풀기라도 하듯이 미친 듯이 달렸다. 방진보가 탄 말은 흑귀를 따르다가 기어이 거품을 물고 말았다.
그래도 끈기는 있는지 용케도 뒤쳐지지 않고 흑귀를 따라붙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 사이의 거리는 벌어졌다.
담호와 흑귀의 모습이 조그만 점이 되어 사라져 가고 있었다.
“형, 같이 가요.”
결국 조급해진 방진보가 큰 소리로 담호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담호가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방진보가 희색이 만면해 담호의 곁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담호와 가까워질수록 방진보의 얼굴이 굳어졌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은 낯선 향기를 실어 왔다. 하지만 방진보는 근래 이와 같은 향기를 맡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혈향?”
후각을 아프게 자극하는 그것은 분명 피비린내였다.
담호의 곁에 도착하자 충격적인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
붉게 물든 대지, 그 위에 굴러다니는 수많은 시신들. 그리고 포식하는 까마귀와 들짐승 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생각났다.
방진보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