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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4장. 스쳐 가는 바람이 늘 따스한 것은 아니다(2)
담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시신을 살폈다. 시신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담호의 눈빛이 묵직해졌다.
그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은련상단을 수습해 떠났던 상인.’
조수광이 죽은 이후 구심점이 되었던 그 상인이었다. 그가 초원 한복판에서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다른 시신들을 확인해 볼 것도 없었다.
“은……련상단이 왜?”
방진보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일 년이나 함께 원행을 한 사이였다. 옷차림과 체형만 봐도 얼굴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 시신이 되어 나뒹굴고 있는 자들은 은련상단의 상인들이었다. 담호에게 구함을 받아 따로 떠났던 그들이 뜻밖에도 이곳에서 시신이 되어 있었다.
“형, 왜 이들이…….”
“습격을 당한 것 같구나.”
“대체 누가?”
“얼마 전에 습격했던 자들의 동료이거나 방조자들이겠지.”
“그럴 수가!”
방진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횡액을 당하고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떠난 이들이었다. 그들이 초원 한가운데서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는 모습은 방진보에게 큰 충격이었다.
담호는 꽤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단 사실을 눈치챘다.
‘잡아간 것인가?’
담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인들이 죽은 것을 보고도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의도적이군.’
하필 담호와 방진보가 지나가는 길목에 이들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다는 것. 누군가 담호와 방진보가 이들의 시신을 보길 원하고 있었다.
몇몇 상인들의 몸에 남은 고문의 흔적이 그의 짐작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상처를 도려내고 소금을 뿌린 흔적이 보였다. 무공을 익힌 사람들도 참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을 것이다. 하물며 고문의 대상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상인들.
결과가 어떨지는 불 보듯 뻔했다.
“형!”
방진보가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와 함께하면서 사라졌던 공포가 다시 그의 눈 속에서 살아났다. 담호가 커다란 손으로 방진보의 머리를 헝클었다.
“겁먹을 거 없다.”
“하지만…….”
“나를 믿어라.”
“예!”
담호의 말 한마디에 방진보의 굳어 있던 표정이 풀렸다.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담호가 방진보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주위를 둘러봤다.
보이는 것은 끝없는 초원뿐이었다. 하지만 담호는 은밀한 시선을 느꼈다. 저 푸른 초원 어딘가에 자신과 방진보를 지켜보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담호의 눈에 스산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방진보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시신을 수습해 줄 여유 따윈 없었다. 담호는 시신들을 그대로 길가에 방치한 채 흑귀 위에 올랐다. 하지만 방진보는 그냥 이들을 놔두고 가야 하는 게 마음에 걸리는지 쉽게 말에 오르지 못했다.
“가자.”
결국은 담호가 채근을 한 이후에야 방진보는 말에 올라탔다.
“그냥 가는군.”
경천생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는 지금 초원 한가운데 있었다. 높게 자란 수풀이 그와 수하들의 모습을 가려 주고 있었다.
“듣던 대로 재밌는 녀석이군.”
경천생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은련상단의 흔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갈 만한 곳은 뻔했으니까.
토로번에서 놈들의 흔적을 찾았고, 이곳에서 조우했다. 그 후의 결과는 보이는 대로였다.
상인들은 토로번에서 그들을 지켜 줄 무인들을 고용했다. 하지만 그들의 수준은 너무나 저급해 몸을 풀 만한 가치조차 없었다.
마치 썩은 짚단을 베어 넘기듯 그렇게 놈들을 죽이고 상인들을 고문했다.
동자추와 혈랑대를 죽인 자들을 알아내기 위해서.
상인들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사실을 털어놨다. 그들이 털어놓은 사실은 실로 놀라웠다.
‘겨우 한 놈이었다니.’
최소한 열 명 이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흉수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 처참한 광경이 오직 단 한 명에 의해서 자행된 것이란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몇 놈을 더 고문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똑같았다.
이젠 믿을 수밖에 없었다.
흉수는 단 한 명뿐이다. 그리고 그는 경천생의 경각심을 일으킬 만큼 강했다.
놈이 가는 길목에 죽은 상인들을 던져 놓았다. 놈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면 놈의 진정한 성격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도 인간의 감성을 가졌다면 상인들의 시신을 외면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놈이 상인들의 시신을 수습하면 기습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담호의 반응은 경천생의 생각과 달랐다. 그는 동요하지도 않았고, 상인들의 시신을 수습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일반적인 사람들의 반응과는 달랐다. 경천생이 아는 사람들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다.
“재밌는 녀석이군. 게다가 다리도 절고…….”
처음에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거짓인 줄 알았다. 다리를 저는 이가 상대할 수 있을 만큼 혈랑대와 동자추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수하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우리 것을 건드렸으면 응당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지.”
“지금 공격할까요?”
“그렇게 쉽게 하면 재미가 없잖아.”
“그럼?”
“놈을 흔들어 놔야지. 계속 선물을 보내.”
경천생이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결박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일단의 사람들이 보였다. 은련상단의 생존자들이었다.
경천생의 입꼬리가 잔혹하게 뒤틀려 올라갔다.
***
“저, 저…….”
방진보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또다시 그들의 눈앞에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먼젓번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시신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커다란 나무에 방진보가 잘 알고 있는 이가 사지에 못이 박힌 채 죽어 있었다. 죽어서도 자유를 찾지 못하고 얽매인 이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담호의 눈빛은 더욱 스산해졌다.
이것이 자신을 향한 도발이라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저들은 어딘가에 숨어서 자신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담호와 방진보가 겁을 집어먹고 꼴사납게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을지도 모른다.
담호가 방진보에게 말했다.
“절대로 흔들리지 말거라.”
“하지만…….”
“그게 놈들이 원하는 것이다.”
“알……겠어요.”
방진보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눈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방진보의 얼굴엔 온통 절망만이 가득했다. 그런 방진보에게 담호가 말했다.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예?”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담호가 검은 장포를 벗었다.
장포를 방진보에게 건네주면서도 그의 시선은 저 멀리 초원을 향해 있었다.
“놈은?”
“그냥 떠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냥 떠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경천생이 누워 있던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멀리 커다란 나무 뒤로 길을 떠나는 담호와 방진보의 모습이 보였다. 시신을 뒤로하고 말을 타고 가는 그들의 모습에 경천생의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예상과는 너무 동떨어진 반응이었다. 그래도 인간이라면 일말의 동요가 있어야 하는데, 담호에게서는 그런 반응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흠! 보기보다 냉정한 놈이군.”
“어떻게 할까요?”
“이젠 보낼 선물도 떨어졌으니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드디어 놈을 잡는 겁니까?”
“애들을 준비시켜 놔.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까 단단히 각오하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수하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그의 눈이 살기로 물들어 있었다.
그동안은 너무 지루했다. 납치한 상인들을 죽이는 재미는 있어도, 피가 끓는 즐거움은 없었다.
“참! 산장에 보고는 어떻게 할까요?”
“나중에 해. 놈을 잡고 나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수하가 대답과 함께 물러났다.
경천생이 몸을 일으켰다.
이젠 움직여야 할 때였다. 경천생은 가볍게 몸 상태를 점검했다.
내력은 막힘없이 전신을 휘돌았고, 근육의 상태 또한 좋았다.
“싸우기 좋은 날이군.”
경천생이 미소를 지을 때였다.
투웅!
물방울이 수면 위로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기에 파장이 일고, 곧 사방으로 날카로운 음파가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갔다.
뇌리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파동에 경천생은 온몸의 솜털이란 솜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무슨?”
경천생의 안색이 싹 변했다.
자신도 모르게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의 손잡이를 잡아 갔다. 본능이 그리 시킨 것이다.
“무슨 일이냐?”
그가 소리쳤다.
평상시라면 즉각 대답해야 할 수하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커다란 바위가 짓누르는 듯 공기 자체가 무겁게 변해 있었다. 그의 수하들은 무거워진 공기에 짓눌려 있었다.
경천생이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으음!”
순간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부하들이 향하는 길목에 언제부턴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언제?”
경천생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길목을 막고 서 있는 남자는 분명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으면 안 됐다.
‘분명 말을 타고 가는 것을 확인했는데.’
검은 말을 타고 있는 검은 장포의 남자. 그것이 담호의 가장 극명한 특징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담호는 검은 장포를 입고 있지 않았다.
그제야 경천생은 자신이 담호에게 속았음을 깨달았다.
‘쯧! 이런 기초적인 속임수에 당하다니.’
담호는 시체 하나에 자신의 검은 장포를 입혀서 말에 태웠다. 단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경천생과 수하들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경천생이 앞으로 나섰다.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구나.”
여전히 손에는 검병을 잡은 채였다.
담호의 시선이 경천생을 향했다.
“으음!”
순간 경천생의 입술을 비집고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막상 정면에서 그의 시선을 맞닥뜨리게 되니 느껴지는 압박감이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던가?’
상인들에게 들을 때는 과장이 많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선물을 보내 담호를 시험했다. 그런데 상대는 그런 경천생의 의도를 파악하고 역으로 찔러 왔다.
더군다나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가 주군으로 모시는 자에게서도 이런 압박감은 느껴 보지 못했었다.
경천생이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그러는 너희들은 누구지?”
“우리는…….”
경천생이 입을 다물었다.
아직 그들의 정체는 드러나서는 안 됐다.
담호가 경천생을 빤히 바라봤다.
“왜 상인들을 죽였지? 내가 목적이라면 나를 직접 찾아왔으면 됐잖아.”
“흥! 어차피 그 정도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가치가 있지. 그들은 겨우 그 정도 가치를 가진 것에 불과해. 존재해도 그만, 없어도 세상에 별다른 영향이 없는 자들. 그것이 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다.”
“그렇군!”
담호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그렇다면 너희들도 증명해야 할 거야. 그래도 너희들이 살 가치가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