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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4장. 스쳐 가는 바람이 늘 따스한 것은 아니다(3)
경천생의 눈에 찐득한 살기가 떠올랐다.
“건방진!”
이제까지 강호를 종횡하면서 담호처럼 오만한 말을 하는 자를 본 적은 없었다. 모두가 그를 보면 고개를 숙이기 바빴고, 어떻게 해서든 잘 보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었다.
그런데 담호는 그런 경천생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깔아뭉개고 있었다.
“감히 절름발이 따위가…….”
경천생이 살기 어린 음성을 토해 내는 그 순간이었다.
쾅!
갑자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뒤이어 혈괴로 변한 누군가 경천생을 지나쳐 뒤로 날아갔다.
십여 장이나 날아가 바닥을 뒹굴다가 힘없이 널브러진 이는 평소 경천생이 아끼던 후배였다.
비록 음지의 일을 하고 있었지만 무재가 뛰어나고, 성격도 좋아 내심 눈여겨보고 있었다.
평소 활기 넘치던 얼굴에 생기가 보이지 않는다. 빛이 나던 눈은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미 숨이 끊어진 그의 얼굴엔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이 왜 죽어야 했는지 영문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쾅!
경천생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는 그 순간 다시 뇌음이 터져 나왔다.
“아악!”
뒤따라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비명. 덧없이 스러지는 또 하나의 생명.
죽음이 비처럼 내렸다.
“무슨?”
경천생의 눈에 수하들이 포탄처럼 뒤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수하들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담호와 그의 주먹이었다.
주먹이라기보다는 뭉툭한 정(釘)에 가까운 담호의 손. 그의 주먹이 한 번씩 뻗을 때마다 그의 수하들이 피를 흩뿌리며 죽어 나갔다.
성벽을 부수는 충보.
동시에 뻗어 나가는 파성추.
무섭도록 단순한 두 가지 동작의 반복이었다. 그런데도 경천생의 수하 누구도 담호의 단 일 초식을 받아 내지 못했다.
뿌드득!
팔뚝으로 막으면 뼈가 부러져 나갔고, 다리로 막으면 다리뼈가 산산조각 났다.
쾅!
“크아악!”
가슴뼈가 움푹 함몰된 무인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날아갔다.
담호는 재앙(災殃)이었다.
막을 수도, 물리칠 수도 없는.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무인들에게는 사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와악!”
무인들이 담호를 피해 메뚜기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든 죽음은 운명처럼 찾아왔다.
콰아앙!
담호의 파성추 한 방에 무인 세 명이 한꺼번에 어육이 되어 날아갔다.
“멈춰랏!”
결국 보다 못한 경천생이 벼락같이 검을 뽑아 들며 담호에게 몸을 날렸다.
츠츠츠!
그의 검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선명한 검기가 맺혔다.
추혼섬라(追魂閃邏).
그가 펼친 초식의 이름이었다.
이름만큼이나 빠르고 강렬한 위력을 가진 초식이었다. 경천생은 이 한 수로 담호를 죽이지는 못해도 학살은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놈의 왼쪽 다리가 약점이다.’
담호는 무섭도록 강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분명 약점은 존재했다. 바로 성치 않은 왼쪽 다리다.
그의 검기는 담호의 왼쪽 다리를 노리고 있었다.
수면을 스치고 날아가는 제비처럼 경천생의 신형이 바짝 숙여지며 대지에 바싹 붙어 담호에게 다가왔다.
슈아악!
바짝 굽힌 허리만큼이나 낮게 검이 날아왔다. 한껏 독을 머금은 독사처럼 은밀하면서도 날카롭게.
‘됐다.’
경천생의 눈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검이 담호의 발목을 끊기 직진이었다. 그는 담호가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때 갑자기 담호의 왼쪽 다리가 살짝 들렸다. 경천생의 검이 헛되이 발밑을 지나가는 순간 다시 담호가 발을 힘차게 내리찍었다.
쿵!
“크윽!”
경천생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이 불신으로 크게 치떠졌다.
그의 검이 담호의 발에 짓밟혀 있었다. 그 충격으로 검병을 잡은 손의 호구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경천생이 내력을 운용해 담호의 발아래 짓밟힌 검을 빼내려했다. 하지만 만근 바위에 눌린 듯 그의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검을 통해서 느껴지는 가공할 압력에 경천생이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담호의 무릎이 동공 가득 확장되었다.
쾅!
“커억!”
예상치 못한 엄청난 충격에 경천생의 고개가 뒤로 튕겨 나갔다. 그런 경천생의 코는 마치 쇠망치에 맞은 것처럼 짓이겨져 있었다.
“이익!”
고통스러운 신음성과 함께 경천생이 검을 놓고 맨손으로 대항하려 했다.
쾅!
그 순간 담호의 무릎이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에 작렬했다.
콰득!
경천생은 박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얼굴뼈가 송두리째 박살 나는 것을 느꼈다.
비명은 터져 나오지도 않았다. 또다시 담호의 무릎이 작렬했기 때문이다.
퍼석!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핏속에 두부처럼 허연 물질이 섞여 있었다.
경천생의 몸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부하들이 숨을 죽였다. 그들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무릎 공격 세 번에 경천생의 숨이 끊어졌다. 바닥을 나뒹구는 경천생의 얼굴은 원래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이 짓이겨져 있었다.
경천생은 저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경천생은 산장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다. 그의 손에 죽은 강호 고수들의 수만 백여 명이 훌쩍 넘어갈 정도였다.
그런 고수가 제대로 무공 한번 펼쳐 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무서운 일이 그들의 눈앞에서 일어났다.
담호의 서늘한 눈빛이 그들을 향했다.
그의 눈엔 경천생을 이겼다는 희열도, 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는 승자의 기쁨도 존재하지 않았다.
흉포하게 일렁이는 눈동자 속엔 오직 살의만 가득할 뿐이었다.
그의 입술을 비집고 거칠고 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결국은 증명하지 못했군.”
“으으!”
“너희들이 살아야 할 이유를…….”
담호의 음성이 울려 퍼지는 순간 살아남은 자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아, 악마다.”
“도망쳐!”
살아남은 자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명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까악! 까악!
수많은 까마귀가 허공을 선회하며 노래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마리도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죽음이 가득한 대지, 오직 한 남자만이 서 있었다.
온통 피칠갑을 한 남자는 바로 담호였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배후를 발설하지 않았다. 담호 역시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기에 묻지 않았다.
그들은 담호를 저주했다.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하늘이 천벌을 내릴 거라고.
우습지도 않았다. 자신이 건 싸움이 아니었다. 그들이 걸어온 싸움이었다. 담호는 어떤 싸움이든 피할 생각이 없었다.
담호가 자신이 만들어 낸 참상을 바라봤다.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두려웠다.
이런 참상을 만들어 내고도 담담한 자신이.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담호의 시야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처참하게 짓이겨진 경천생 근처에 나뒹굴고 있었다.
담호가 집어든 물체는 바로 묘안석이었다. 은련상단의 주인인 조수광에게 건네주었던.
세상에 보기 드문 귀물이 몇 번을 돌고 돌아 다시 그에게 돌아온 것이다.
담호는 어쩌면 이 녀석이 죽음을 몰고 다니는 마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제외하고 묘안석을 소유했던 이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손안에 들린 묘안석이 요사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담호는 묘안석을 잠시 바라보다가 품속에 집어넣었다.
***
서천산장은 천산산맥의 동쪽 끝인 박격달봉(博格達峰) 아래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서천산장이 처음 박격달봉 아래 자리를 잡은 것은 오 년 전이었다. 처음엔 이름 그대로 산장이라는 느낌이 날 정도였는데 오 년이란 시간 동안 급성장을 하며 지금은 무림 문파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서천산장은 높은 담벼락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산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력은 어떻게 되는지, 무슨 목적으로 산장을 만들었는지 말이다.
사람들에게 서천산장이 문파로서 각인된 것은 삼 년 전 있었던 혈사풍의 난 때였다.
혈사풍(血沙風)은 사막에서 기승을 부리던 마적 떼였다. 그 규모가 혈랑대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사막을 횡단하는 상인들을 습격해 물건들을 빼앗고, 살육을 자행하면서 일대를 공포로 물들였다.
수백 명 이상의 사람이 죽고, 수만금이 강탈당했다.
보다 못한 신강의 유력 문파 몇 곳이 연합해 토벌에 나섰지만 오히려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기세가 오른 혈사풍은 사막과 초원을 제집 안마당처럼 누볐다.
그 때문에 상인들의 발걸음은 끊겼고, 누구도 서역과의 교역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 나선 이들이 바로 서천산장의 무인들이었다. 서천산장은 그야말로 전력을 투입해 사막을 휩쓸던 혈사풍을 잠재웠다.
혈사풍을 잠재운 서천산장은 단번에 신강 무림의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그들의 영향력은 연일 커져 갔고, 종국에 이르러서는 신강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세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이 단 오 년 만에 이뤄진 업적이었다. 중원 유수의 문파들이 몇 세대에 걸쳐 이루기도 힘든 일을 그들은 단 오 년 만에 해낸 것이다.
서천산장은 가만히 있었지만, 사람들은 끝없이 그들을 찾아왔다. 어떤 이들은 청탁을 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하소연을 하기 위해.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연줄을 대기 위해.
서천산장의 문은 그런 이들을 위해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문지기들이 방문 목적을 물었다.
일개 문지기라고 하지만 그들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도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과연 서천산장이라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강렬한 그들의 기도에 방문자들은 위축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서천산장에 들어가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한가운데 일 남 일 녀가 있었다. 온통 검은 일색의 노인과 눈에 확 띄는 미녀는 바로 흑노와 심옥이었다.
두 사람은 행렬 중간에 서서 자신들의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문지기들도 그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심옥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서천산장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높은 담벼락에 둘러싸인 서천산장의 겉모습에서 무언가를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높이 이 장 정도의 담벼락이 장원 전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장원이라기보다는 성 같은 모습이었다.
심옥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굉장하네. 우리도 이렇게 번듯한 담벼락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보기도 훨씬 좋고.”
“담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지킬 것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저희는 지킬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제라니까. 거지나 다름없으니.”
심옥이 코웃음을 쳤다.
“모든 것이 막주님의 근검절약…….”
“그러니까 결국은 거지라는 이야기잖아.”
“휴!”
흑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 차례가 되었다. 문지기가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장주님을 뵈러 왔어요.”
“장주님을?”
문지기의 눈이 빛났다. 심옥은 그런 문지기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
찰나지간 그가 보여 준 안광은 결코 한낱 문지기가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문지기가 다시 물었다.
“약속하셨습니까?”
“아니요.”
“약속이 없으면 뵐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요? 그럼 이 말이라도 전해 줘요. 혈린살막(血麟殺幕)에서 손님이 왔다고.”
“지금 혈린살막이라고 하셨습니까?”
문지기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그래요! 나는 혈린살막의 소막주인 심옥이에요.”
심옥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