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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8화 (3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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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5장. 멀리 가기 위해 휴식을 취한다(1)

멀리 박격달봉이 보였다. 바람엔 온기가 실려 있었지만, 박격달봉의 정상에 쌓여 있는 만년설은 녹을 줄 몰랐다.

천산산맥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박격달봉은 인근의 사람들에겐 영산으로 추앙받았다.

오죽했으면 박격달봉의 중턱에 있는 거대한 호수에 천지(天池)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서천산장의 후원에 있는 정자 위에서는 박격달봉의 본연의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서천산장의 장주인 은하성이 굳이 이곳에 서천산장을 세운 것도 박격달봉의 모습이 가장 잘 보이기 때문이다.

은하성의 나이 올해 예순둘이었다. 하지만 그의 겉모습은 결코 마흔을 넘어 보이지 않았다.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처럼 강렬하게 빛나는 두 눈과 뭉툭한 코,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과 각진 턱이 그의 인상을 더욱 위맹스럽게 보이게 했다.

은하성은 뒷짐을 쥔 채 박격달봉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 덮인 박격달봉의 풍경을 사랑했다.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서천산장을 박격달봉이 가장 잘 보이는 이곳에 세웠을 정도였다.

은하성의 뒤에는 오십 대 초반의 중늙은이가 시립해 있었다. 노인의 얼굴과 목덜미에는 마치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끔찍한 상처가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었다.

노인의 이름은 조혈산, 은하성의 오래된 심복이자 서천산장의 총관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박격달봉을 바라보던 은하성이 문득 입을 열었다.

“천생은?”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조혈산이 공손히 대답했다.

“흠! 이번엔 늦군.”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렇겠지.”

은하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천생은 그가 가장 신뢰하는 심복 중 한 명이었다. 서천산장을 세우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일등공신이었고, 은하성을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목숨을 버릴 수 있을 만큼 충성심도 대단했다.

“천생이 돌아오면 휴식을 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혈마총(血魔塚)의 상황은?”

“여전히 인력의 수급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천생이 돌아오면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겁니다.”

“자네가 알아서 잘 관리하게.”

“알겠습니다.”

조혈산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은하성의 시선이 다시 박격달봉으로 향했다.

“신강만으로는 만족 못 해.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제가 어찌 장주님의 뜻을 모르겠습니까?”

“우리의 꿈을 이룰 날이 머지않았음이야. 이런 때일수록 더욱 만전을 기해야 해.”

“제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음!”

은하성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장주님.”

정자 쪽으로 서천산장의 무인이 달려왔다.

조혈산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인을 바라봤다. 이곳은 장주 은하성이 안식을 취하는 공간이었다. 몸가짐을 극히 조심해야 하는 곳이었다.

수하들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도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달려오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입을 꾹 다문 채 무인을 바라봤다.

마침내 정자 아래까지 다가온 무인이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장주님. 하지만 사안이 너무 급박해서.”

“괜찮다. 그래, 무슨 일이냐?”

“장주님을 찾는 손님이 왔습니다.”

“나를?”

은하성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웬만치 중한 일이 아니고는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은하성이었다. 이제까지 수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자 찾아왔음에도 만난 사람이 거의 없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문제는 수하들도 그런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사람은 수하들 선에서 걸러졌다. 그런데도 이렇게 수하가 달려왔다는 것은 그를 보고자 하는 인물이 생각보다 거물이란 뜻이었다.

“누구냐?”

“혈린살막의 소막주입니다.”

“혈린살막?”

은하성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만큼 의외의 단어였기 때문이다. 조혈산 역시 마찬가지 표정으로 은하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주님?”

“흠! 냄새를 맡은 건가?”

은하성의 중얼거림에 조혈산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정말 저들이 낌새를 알아차린 거라면 위험합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럴 때도 되었다. 솔직히 이때까지 냄새를 맡지 못했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차라리 지금 제거를…….”

“일단 만나 보지. 어느 선까지 눈치챈 건지 알아야 대응책도 세우지 않겠는가? 빈객청으로 모시거라.”

은하성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수하가 대답과 함께 달려갔다.

“혈린살막이라…….”

이십 년 전 신강에 심수명이라는 걸출한 낭인이 등장했다. 심수명은 낭인들 중에서도 특출한 무공과 강력한 통솔력을 가지고 있었다.

심수명은 적 앞에서 사납기가 그지없었지만 특유의 호방한 기질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그렇게 그를 추종하는 무인들이 모여 만든 곳이 바로 혈린살막이었다.

낭인들이 만든 단체였지만, 누구도 혈린살막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들의 저력은 중원의 어지간한 문파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오 년 전 혈사풍이 신강을 휩쓸 때 혈린살막은 어쩐 일인지 나서지 않았다. 그 때문에 서천산장이 혈사풍을 응징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만일 그 전에 혈린살막이 혈사풍을 응징했다면 지금과 같은 서천산장의 성장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재밌군!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단 말이지?”

은하성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인적 없이 쓸쓸하기만 하던 빈객청에 등불이 걸렸다. 빈객청 주위에 무인들이 번을 서는 가운데 심옥과 흑노가 빈객청에 올랐다.

심옥이 번을 서고 있는 무인들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무인들의 기세가 대단하군.”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가씨.”

“알고 있어, 흑노.”

두 사람은 문을 열고 빈객청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미리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은하성과 조혈산이 보였다.

그들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은하성과 조혈산 누구 한 명 입을 열지 않았다.

‘시험인가?’

심옥의 눈이 빛났다.

그녀가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은하성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혈린살막의 심옥이 서천산장의 장주님을 뵙습니다.”

“반갑네. 내가 서천산장의 주인 은하성이네. 어떻게 알았는가?”

“은 대협의 기도가 좀 더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배자의 기품을 느꼈습니다.”

“지배자의 기품이라. 혈린살막은 눈썰미가 좋은 소막주를 두었군. 심 막주가 부러워.”

“감사합니다.”

“앉게.”

은하성이 심옥에게 자리를 권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자리에 앉았고, 조혈산과 흑노는 각각 주인의 등 뒤를 지켰다.

“영광이군! 혈린살막의 소막주를 이 자리에서 보게 되다니.”

“저야말로 명성이 자자하신 서천산장의 장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가?”

은하성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겉보기엔 한없이 인자해 보이는 미소였다.

심옥조차도 은하성에 대한 정보를 미리 얻지 못했다면 그의 겉모습에 깜빡 속아 넘어 갔을 정도였다.

“차 한잔하지.”

은하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혈산이 다구를 가져왔다.

은하성은 직접 화로에 물을 앉히고 찻잎을 주전자에 넣었다.

“이곳 천산에서만 나는 차라네. 아마 마실 만할 걸세.

“영광이에요. 장주님이 직접 우린 차를 대접받다니.”

“외부인 중에서는 자네가 두 번째라네. 영광으로 생각해도 충분할 걸세.”

“첫 번째가 누군지 궁금하네요.”

“자네는 상상도 못 할 사람이라네.”

“그러니까 더욱 궁금하네요.”

“과한 호기심은 가끔 횡액을 부르기도 하는 법이라네.”

“제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냥 못 지나가는 고약한 성미를 지녔답니다. 그래서 아버님에게 많이 혼나기도 하지요.”

심옥이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에 은하성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하긴 젊은 사람의 호기심은 때론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 된 것 같군.”

은하성이 조그만 찻잔에 차를 따라 심옥에게 건네주었다. 심옥이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은은한 향기가 일품이네요.”

“사람들은 흔히 용정향이나 벽라춘이 최고인 줄 알지만, 이곳 천산에서 나는 차도 그에 못지않다네. 재배가 되지 않아 특별히 약초꾼들을 고용해 채취하지. 그만큼 귀한 물건이라네.”

“이런 귀물을 맛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질녀 같은 사람인데 무엇이 아깝겠는가? 차는 많이 있으니 아끼지 말고 마시게.”

은하성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정말 좋네요.”

“나중에 갈 때 좀 싸 줄 테니 가져가게.”

“고맙습니다.”

“참, 부친은 잘 계시는가? 내 언제고 한번 찾아봬야지 하면서도 시간이 나지 않는군.”

“아버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언제고 꼭 한번 만나 뵙고 싶다고.”

“그거 영광이군.”

“그분께선 늘 말씀하셨습니다. 서천산장의 주인이 정당한 길만 걷는다면 능히 신강의 지배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정당한 길이라…….”

여운이 꽤나 오래 남는 말이었다. 하지만 은하성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심옥은 그런 은하성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말씀도 전하라 하셨습니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그것참 과분한 말씀이시군. 그분의 믿음에 반드시 보답을 해야 할 텐데. 그런데 그 말씀을 전하라 자네를 보내신 건가?”

“그런 셈이지요.”

“언제 한번 아버님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게. 그렇게 좋은 말씀을 해 주시는데 후배 된 입장에서 그냥 있을 수야 없지.”

“알겠습니다.”

“저녁때 만찬을 차리겠네. 오늘 하루 머물다 가게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별말을 다 하는군. 우리 사이에……. 조 총관이 거처를 안내해 줄 걸세. 저녁에 다시 보세나.”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보게나.”

은하성의 손짓에 심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혈산이 그녀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고마워요. 그럼 이따 다시 뵐게요.”

심옥이 은하성에게 포권을 취한 후 조혈산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흑노가 조용히 따랐다.

방문이 닫히고 혼자 남게 되자 은하성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건방진!”

조혈산이 안내한 곳은 서천산장 깊은 곳에 있는 조그만 별채였다.

“오늘밤은 여기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저녁때 사람을 보내 모실 테니 푹 쉬십시오.”

“그렇게 할게요.”

“참,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이지만 될 수 있으면 외출은 삼가해 주십시오.”

“왜 그런가요?”

“야생의 짐승이 많습니다. 괜히 이곳에서 혈린살막의 장중보옥이 무슨 일을 당했다가는 저희가 고스란히 후환을 감당해야 합니다. 부디 양측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싶습니다.”

조혈산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심옥을 바라봤다. 그런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심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짐승들이 무서워서라도 외출을 하면 안 되겠군요.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 저녁때 뵙겠습니다. 그럼…….”

조혈산이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심옥이 멀어지는 조혈산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야생의 짐승이라고? 웃기네.”

그녀의 코웃음이 바람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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